226. 체르노젬 대회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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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유. 화려하네.”
“그러게. 무장상태는 지금까지 본 적 중 최고네.”
진형 멀리 기마가 도열해 있다.
모든 말에 마갑을 씌웠고, 말 위엔 풀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기사가 타고 있다.
기사 중 일부는 5보가 넘는 긴 랜스를 들고 있고, 일부는 할버드, 일부는 대검, 일부는 권총을 들고 있다.
“권총?”
“어. 카라콜 전술이야.”
“그게 뭔데.”
“미리 장전하고 적진 앞까지 돌격한 후 권총샷을 쏜 후 돌아가는 전술이야.”
“불은 어떻게 붙여?”
“긴 심지에 미리 불을 붙여. 달려가서 적의 코앞에서 방아쇠를 당기면 심지가 아래로 내려오며 화약에 불을 붙이지.”
“불발 졸라 많겠네.”
“어. 맞아. 그래도 테르시오 같은 창총진에게 기마가 상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전술이야. 창진 뒤의 총병에게 하도 박살나니 기병을 써먹을 궁리를 하다가 만들어진 거지. 잡다한 화살공격은 갑옷의 방어력에 맡기고.”
풀 플레이트 아머는 이 시대의 야금술을 상징한다.
장인급 철공이 녹은 쇠를 최대한 얇은 판으로 만들어 기사의 몸에 딱 맞게 만드는데, 여기 들어가는 품이 만만치 않다.
인체에 딱 맞고, 관절부가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기술은 훗날 산업혁명의 기초, 철 제련술의 발전을 불러왔다.
그렇게 힘들게 갑옷을 만들었는데 화약무기에 밀려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하긴. 유럽이라고 바보만 있는 건 아니지. 나름 최선을 다해 싸웠고 최선의 전술을 개발한 거겠지. 어찌됐건 세계의 주인이 되었으니 무시하면 안 되겠지. 저 등 뒤에 꽂은 건 예비 무기냐? 화살인가?”
수천기의 기마병 등 뒤에 깃털이 잔뜩 달린 장대가 솟아 있었다.
마갑과 풀 플레이트가 번쩍이는 기사 수천기가 등에 예비무기까지 잔뜩 갖고 있으니 위압감이 든다.
“아니. 날개야.”
“날개? 하늘을 난다고?”
“아니. 그냥 장식용.”
“......”
유럽을 무시하고 싶어졌다.
“쟤들 부대 명칭이 윙드 후사르야. 폴란드 리투아니아 왕국의 자랑이자 자존심. 저 특유의 날개를 단 기마대가 수많은 업적을 이뤘지.”
“...... 날개에 특별한 기능이라도 있냐? 저 깃털이 독 묻은 깃이라서 던지면 중독된다든가...”
“아니. 없어. 순수 뽀대용이야.”
“야이. 시발. 전쟁이 장난이야? 저렇게 두면 팔 휘두를 때 걸릴 거 같은데? 보병이 낫으로 걸어 떨구기도 쉽고. 저것 때문에 전투력이 감소할 것 같은데.”
“글쎄. 전투력이 감소하는 만큼 뽀대 효과가 있으니 꼭 나쁜 것 같지는 않은데. 일단 알아보기 쉽잖아.”
“그게 뭐? 자기 자랑 하려고 저 지랄을 한다고? 말이 되냐? 누구나 목숨은 하나잖아.”
“내 생각엔 전투력이 올라갈 것 같은데.”
“어떻게?”
“적이 알아보잖아. 폴리 왕국의 기사들은 윙드 후사르를 엄청 자랑했어. 어디서 누굴 죽였고, 어디서 누굴 전멸시켰고. 이러면 당연히 싸우는 상대도 알게 되지. 그 무섭다는 윙드 후사르가 나타났대. 사기가 떨어지겠지?”
“... 그러네.”
“자존심도 오르지. 저 멋진 날개 장식을 단 부대에 들어가고 싶다. 열심히 수련해서 드디어 뽑혔다. 부대의 자존심과 선배들의 전통을 이어받자. 열심히 싸우자. 이러지 않을까?”
“그렇군.”
“해병대 아재들이 그러잖아. 민간인이 보기엔 불쌍하게 끌려간 똑같은 징집병인데 온갖 뽀대와 자부심에 취해 있잖아. 그러면 전쟁에서 좀 더 열심히 싸울지도 모르지.”
“......”
“우리도 좀 만들까? 날개는 표절이니까.... 붉은 망토 어때? 말 다리까지 내려가는 기다란 장포를 둘러주는 거야.”
“전투력 떨어진다.”
“에이... 그럼 뿔? 키 높이의 뿔을 투구에 달아줄까? 정충신의 초원기사단을 소문내고 무패 전적을 알리고 특유의 장식을 달면 싸우기도 전에 적이 쫄아서 도주하지 않을까?”
“하지마라. 삼족오기면 충분하다.”
“하긴. 우리는 성격이 다르지. 정밀한 정보수집과 완벽한 진형을 갖춰 박살내는 무적의 군단.”
한참 중얼거린 모현성이 개떡이를 돌아봤다.
개떡이와 방어진지 책임자 원숭환이 나란히 서서 적을 보며 소근거리고 있었다.
“막을 수 있지?”
“스페인 기사들과도 싸워봤지만, 정확히 측정하지 못했습니다. 저 철갑옷의 두께는 어느 정도입니까?”
“보통 2미(mm) 정도야. 가슴 같은 주요부위는 좀 더 두껍고.”
풀 플레이트 아머를 두껍게 만든다면 대포알도 막아낼 수 있겠지만 그러면 기사가 움직이지 못한다.
대부분의 플레이트 아머는 최대한 얇게 만든다.
비실비실 날아오는 화살이나 휘두르는 창날은 막지만, 화약무기는 막지 못한다.
“시험에 보겠습니다. 몇 보까지 뚫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화망을 다시 구성하겠습니다.”
“재들 철은 우리의 강철보다 약하다. 그거까지 감안해.”
“알겠습니다.”
개떡이와 원숭환이 장인들을 불러 철판을 준비하고 거리에 따른 화력 시험을 했다.
주력무기인 기관총으로 200보까지 뚫을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철조망을 옮기며 새로운 화망을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에 적 기마대는 자리를 지켰고, 후속부대가 속속 도착했다.
기마의 종자들이 오더니 러시아 군이 오고 스웨덴군이 온다.
서로 숙적인 동유럽 3국이 힘을 합쳤다.
3국의 기병이 모이자 기마대만 2만에 달했다.
“쟤들 서로 적이라며?”
“그러게. 서로 싸우던 놈이 힘을 합쳤네.”
이건 예상 밖의 일이다.
“이슬람이란 공통의 적 때문인가?”
본래 유럽은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다가도 이슬람의 공격이 시작되면 하나로 힘을 합쳤다.
오스만이 빈을 공격할 때 간첩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기독교 국가가 전쟁을 멈추고 신성로마제국을 도운 것처럼 이번에도 힘을 합친 것이다.
“음.”
“곽재우에게 소식은 전하긴 했는데 시간 안에 도착할지 모르겠네.”
몽골을 정리하고 서방 원정을 준비 중인 곽재우는 소식을 듣자마자 선발대를 보냈다.
그래도 3000큰보의 거리를 뛰어넘을 순 없다.
다행히 적도 곧장 달려들진 않았다.
뒤이어 폴란드 본대가 오고 러시아군과 스웨덴 군이 좌우에 서서 진형을 조율하는 데 한참 걸렸고, 그 후엔 서신이 오갔다.
-내 땅이다. 꺼져라
-페르난디트 2세를 모시는 백성들이다. 구할 것이다.
-그놈들만 챙겨서 떠나라.
-이 땅은 투르크 아리안족의 땅이다. 오스만의 염원을 돕겠다.
-남의 땅에 눈독 들이지 마라.
-원래 니들 땅도 아니지 않냐?
이런 내용의 서신이 온갖 외교적 수사로 꾸며져 오갔는데 한번 왕복하는데 일주일씩 걸렸다.
그 후엔 사신이 달려와 서신을 찢고 내동댕이치는 걸로 협상이 종료됨을 알렸고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딱히 나서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던 광해는 중얼거렸다.
“역시... 재들은 전쟁을 장난으로 알아.”
저들 입장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은 윙드 후사르가 나타난 순간이다.
그때 다른 부대들도 함께 나타나 일제히 돌격해 왔으면 칸제국은 패하지 않더라도 큰 피해를 입을 뻔했다.
그러나 저들은 모이고 대열을 정비하는데 한 달 가까이 걸렸고 칸국군이 대비할 시간을 줬다.
그 후엔 쓸데없는 서신을 보내 한 달이나 시간을 버렸다.
“일부러 지는 놈은 없지만, 지더라도 명예를 잃지 않는 게 더 중요해. 명예를 잃지 않으면 패해도 귀족대접 받지만, 명예를 잃으면 패할 경우 죽을 수도 있지. 어차피 죽는 건 징집병이나 용병일 뿐 귀족은 명예만 유지하면 돼.”
“그놈의 예절 때문에 전투에 패하는 것도 감수하는 거네.”
“조선 성리학자도 그랬으니 뭐. 문명세계 전부 그랬을 걸. 자기 목숨이 가장 소중하니 국가가 무너져도 자기 앞가림 먼저 하는 게 인간인거지.”
“......”
15년(1622) 5월 3일.
테르시오를 본딴 보병들이 먼저 전진한다.
전방에 5열 장창보병이 서고 그 뒤에 화승총병이 따라붙는다.
곳곳에 광해이포와 닮은 무기도 보인다.
그 뒤로 수레로 끄는 포대와 기병대가 열을 유지하며 천천히 따라왔다.
콰콰쾅!
칸제국의 포가 먼저 불을 뿜었다.
언덕위에 설치한 200문의 광해포는 적이 최대 사거리 1500보에 닿자마자 곧장 발사했다.
다행히 적에겐 사거리가 긴 포는 없는 듯 했다.
나름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왕국의 병사들은 곳곳에서 희생자가 발생하는데도 꿋꿋이 전진했다.
그러면서도 의아함을 느꼈다.
적이 안 보인다.
성벽이 목표라면 성벽, 대회전이 목표라면 적의 집단이 보여야 할 텐데 적은 광야에 나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언덕 위엔 포병 수백명이 보이고 그 앞엔 총을 든 병사 서너 명씩 흩어져 있다.
땅을 파고 숨은 병사들의 머리가 살짝 살짝 보이는데 많지 않다.
6만여명 모인 삼국 군과 비교하면 너무 적다.
그 덕에 포탄 세레를 받으면서도 꿋꿋이 전진했다.
“이길 수 있다!”
우와아아!
“몇 놈 안 된다. 집단 창진도 없다!”
우와아아아!
“속보! 진형 흐트리지 말고 속보! 붙으면 이긴다. 붙으면 대포 따위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우워어어어어어!
적이 보인다.
달린다.
덜컥.
“이거 뭐야?”
“쇠가시?”
“잠깐. 밀지 말아봐 잠깐!”
콰콰콰쾅.
전쟁은 자기복제의 연속이다.
주어진 자원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작전을 써야 하니 가장 훌륭한 전술은 계속 반복 된다.
포를 먼저 쏘고, 기관총을 쏘고, 그래도 돌격하는 이는 철조망으로 멈춰세운 후 광해이포로 마무리한다.
적의 무기체계가 획기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이 전술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으아아! 살려줘!”
정면으로 달려들던 보병 삼만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멈춰 섰다. 거기에 기관총과 광해이포 화력이 쏠리니 순식간에 피의 강을 만들었다.
“기병 출동! 모든 기병은 적의 좌측으로 돌아라. 적의 후방을 쳐라.”
다행히 지휘부는 빠른 판단을 내렸다.
아군 보병을 밟고 지나는 대신 후방을 공격하게 했다.
칸제국 보병 오천은 전방에 쏠려 있고, 뒤엔 크림 칸국과 오스만 제국에서 지원온 병력 일만명이 있다.
그 주위엔 자원한 유민 이만여명이 죽창을 들고 있지만, 전투력은 기대할 수 없다.
“결국 옆으로 도는 군.”
“형이 다 막을 수 있어?”
“아니. 그래도 버티다 보면 개떡이가 지원하기로 했어.”
광해가 후방으로 이동하자 저 멀리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기병이 보인다.
말안장에 긴 장대를 세운 날개 군단.
윙드 후사르.
“확실히 개성은 있네.”
어차피 인간의 힘엔 한계가 있다.
훈련받으면 성장하지만, 어느정도 성장하면 멈춘다.
유명하다고 해서 시속 100킬로로 달릴 수 없고, 활을 500미터 날리지도 못할 것이다.
다만 그 무시무시하다고 소문난 기마대가 다가오니 겁에 질린 병력이 눈에 보인다.
“쯧. 좀더 전진하자.”
새로이 광해의 호위로 뽑힌 병사 백명이 따랐다.
진형의 동쪽 끝까지 나간 광해는 아공간을 열어 기관총 다섯정을 꺼내 설치했다.
화려한 복장과 확연히 다른 인종.
사신들이 왕래할 때 얼굴을 비춰 칸제국의 대칸임을 보여줬다.
적의 지휘관이라면...
“저! 저저저! 저자가 적의 왕이다!”
알아볼 것이다.
“저놈을 잡아라. 저놈을 잡으면 끝난다. 영웅이 될 수 있다.”
알아본다면 달려오겠지.
투다다다!
기관총 다섯정이 불을 뿜는다.
옹기종기 모여 설치한 기관총이 사방으로 탄피를 날리는데 팝콘 튀기는 것 같다.
“아뜨거. 등짝에 들어갔어!”
“시끄럽고 탄띠나 제대로 잡아.”
“뜨거뜨거. 뜨겁다고.”
난리다.
기관총이 미숙한 새 호위병의 발악에도 적 기마는 잘도 쓰러진다.
적 기마대가 유명하다 해도 쇠갑옷을 입은 기병 중에서 유명한 것이다.
무기의 한계는 어쩔 수 없다.
화약무기를 쇠갑옷이 상대하는 시대는 끝났다.
타다다다다!
쿠웅. 쿠웅.
기관총이 깨를 볶고 언덕위의 광해포가 포구를 돌렸다.
“제.. 젠장. 흩어져라. 후방을 쳐라.”
천여기의 손실을 본 적장이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난전으로 가면 기병이 유리하다.
그정도 판단력은 있다.
“디그.”
구덩이를 판다.
“디그. 디그. 디그.”
광해는 친위대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을 유지하면서 함정을 팠다.
직접 죽이는 것보다 이렇게 적의 발을 붙잡는 게 더 효과가 좋다.
“아아아. 다가온다.”
“버텨! 우리의 숫자가 더 많다.”
“아 안돼. 기사들을 어떻게 이겨?”
그럼에도 하나 둘 후방이 뚫린다.
타국의 지원병과 징집병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무기를 휘두를 힘조차 잃었다.
이것이 풀아머 기사의 무서움이다.
“쯧. 밥상을 차려줘도 먹지 못하네.”
후방이 털려도 칸국군의 피해는 없다.
저들이 죽는 사이 적을 다 해치우면 이득이지.
전투준비에 최선을 다했지만, 기본조차 해내지 못하는 아군이라면 지켜줄 수 없다.
뿌우우우~
채애앵. 채앵. 채애애앵
둥둥둥둥.
동쪽에서 소음이 들려온다.
돌아보니 저 멀리 먼지 구름이 일어나고 있다.
“도착했군.”
둥둥둥둥.
뿔나팔과 징, 북소리를 울리며 기병대가 나타났다.
정충신의 초원기사단.
고작 두 달 만에 삼천 킬로를 돌파해 도착했다.
“지원군이 나타났다. 칸제국 기병 오만이 도착했다.”
광해의 목소리가 평원에 쩌렁쩌렁 울린다.
조선어로, 투르크어로, 폴란드어로.
광해의 큰 목소리에 다들 동쪽을 보고는 절망, 혹은 환희에 잠겼다.
“이겼다!”
“버티면 이긴다!”
“퇴각!”
“지금 빠져야 해!”
전투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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