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삶 대 삶
순도 100% 픽션입니다
“지금 당장 변호사 시험을 보면 통과할 수 있어?”
광해의 질문에 기자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칸.”
“다음주, 다음 달, 세달 후. 특별 시험을 열겠어. 통과하게 된다면 직접 맡아서 수사해봐. 어떻게 수사할 거야?”
“죄지은 사람이 정확히 죗값만을 받게 하겠습니다. 법에 인종이란 단어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가능하겠어? 사람이 완전 중립에 서기 힘들 텐데.”
이초란 정도의 차가운 심장을 갖지 않는 한 완벽한 중립적 판단은 힘들 텐데.
“그게 어려워 지금껏 편히 농사일에 전념했습니다만 답답해서 직접 나설 수밖에 없군요.”
“차라리 잘 됐네. 시험 통과하면 제대로 수사해봐. 본인 때린 놈이라고 가중처벌 하지 말고.”
“맡겨주십시오. 대칸.”
예서가 아들을 출산했다.
광해는 마력을 꾸준히 넣어줘 산모와 아기를 보호해서 둘 다 건강히 회복했다.
선로 건설은 네바다 산맥 난코스를 완전히 벗어나 고원지역을 지나고 있다.
이제 로키산맥 구간 일부만 뚫으면 터널 뚫기도 끝난다.
가끔 마력이 많이 찼을 때 한번 씩만 방문해 교량과 터널을 건설해주면 된다.
기자헌은 변호사가 되었고, 자신이 모은 언더도그마 범죄를 수사했다.
법에 민족의 구분을 두지 않는다.
죄 지은 자가 죄 지은 만큼 벌 받는 것이다.
기자헌의 수사를 지켜보던 광해는 믿고 맡겨도 된다는 판단을 했다.
이초란처럼 로봇 같지는 않지만 인간 중에서 가장 중립적 수사를 한다.
중립적으로 죄만 볼 수 있다면 세상 모든 문제의 절반이 해결된다.
광해는 주로 인디언 마을들을 순회하며 병자를 치료하고, 악마를 잡고, 마법을 보여줘 광해소망교가 퍼지는 데 힘을 보탰다.
채유진 사건으로 데인 바 있으니 처음부터 분열을 막기 위해 통합에 열중하는 것이다.
김집은 직무유기와 범죄옹호로 4년형을 받았다.
최명길의 신뢰를 받아 동칸에서 거의 이인자의 위치에 있다가 한순간에 몰락한 것이다.
저수지 공사에 투입된 김집을 방문한 날.
그 곁에 있는 아이 둘이 눈에 밟혔다.
“너희도 노역형을 받았나?”
송중기와 송시열이 가느다란 팔로 모래마대를 나르고 있었다.
“아닙니다. 스승님을 돕는 것입니다.”
스승이 유배를 가면 제자가 따라가 수발을 드는 게 성리학의 미덕이다.
제자란 이름의 노예.
송시열이 어떤 놈인지는 모현성에게 들었지만, 아직 어리니 제대로 가르치면 큰 인물이 될 텐데 길을 잃은 게 안타깝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이봐 김씨. 네 제자들에게 다른 선생을 붙여 교육시키는 건 어때? 기자헌 따라다니면 배울 게 많을 텐데.”
“대칸이시어. 이곳에서도 배울 수 있는 게 많습니다.”
김집은 황제에게 최대한 공손하게, 하지만 불만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광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긴 세월 살아오면 느낀 건 완벽한 어른이 몇 없다는 것이다.
저런 놈이 여자를 만나면 때릴 것 같은 놈이 여자를 사귀고, 저런 놈이 아비가 되면 큰일 날 것 같은 놈이 자식을 낳고, 저런 놈이 누굴 가르치면 큰일 날 것 같은 놈이 아이를 가르친다.
그에 오염되는 아이는 오염된 어른이 되는 거고.
이 모든 게 사람 속을 몰라서 일어나는 거겠지.
안타깝지만 그게 인생이다.
뚫고 나오거나 진흙이 되어 침전하거나.
“니 맘대로 해라.”
누가 책임져줄 수 없다.
인생은.
저수지 축조현장을 돌아보고 일꾼들의 소망을 들어준 후 돌아서는 길.
광해의 곁엔 아들 산남대군이 있었다.
“불안하냐?”
산남대군의 소망을 본 후 슬쩍 물었다.
산남대군은 알아듣지 못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요.”
“동생이 태어났으니 네 자리가 더 작아질 것 같지 않느냐?”
“아닙니다. 전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입니다. 다만 어마마마께서 좀 불안해하십니다.”
황제의 총애를 잃은 황후.
그녀의 인생이 산남대군에게 투사되어 있다.
아들이 다음 황제가 된다 - 1109142
소망이 두 배 이상 커졌고, 무려 백만을 넘어섰다.
더 이상 미뤘다간 한이 되겠다.
“내일부터 날 따라다녀라. 한마디도 하지 말고 바로 뒤에서 지켜보거라. 하루 종일.”
“알겠습니다. 아바마마.”
다음날 새벽 산남대군이 광해의 처소 앞으로 왔다.
광해는 아무 말 없이 마법진을 그려 한성으로 이동했다.
12년(1619) 7월
광해와 산남대군은 유리황궁이 아닌 창덕궁으로 이동했다.
대기하고 있던 박내관과 궁녀들이 광해가 복장을 차려입는 걸 도와줬다.
전통 왕의 복장을 입은 후 전통방식의 수라간 조식을 받았다.
식사 후 곧장 편전.
“남월의 사신 응다푸엔이 대칸을 뵈옵나이다.”
해외에서 온 사신을 접견하고 우는 소리를 들었다.
“광서와 광동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을 주옵소서. 또한 절강성까지 월족의 영역이오니 세력을 확장함을 용인하여 주옵소서.”
칸국의 해외 동맹국 중 가장 강하고 신뢰가 두터운 게 남월국이다.
칸국의 도움으로 베트남의 영역을 벗어나 광서성과 광동성을 차지한 덕에 영토가 세 배, 인구는 두 배까지 늘었으니 그들에게 칸국은 어버이 국가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외교란 원래 징징대고 칭얼대는 것이다.
배가 불러도 울면서 도와 달라 하는 게 외교의 정체.
광해는 의젓하게 칭얼대는 소리를 듣다가 허균에게 물었다.
“국무총리 어찌 생각하는가.”
“불가하옵니다. 애초에 남월에서 월족의 영역이 아닌 주변 소수민족의 땅 세 개를 침범하며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혼란을 없애려면 남월측에서 전진한 영역에서 철수해야 합니다. 또한 절강성은 이미 북월국에서 안정시켰습니다. 북월과 남월은 서로 민족적 동질감도 없으며 사용하는 언어도 다릅니다. 합칠 수 없습니다.”
중국을 쪼개는 게 최종 목표인데 합치게 놔둘 쏘냐.
“들었지? 시정되지 않으면 세계경찰의 철퇴를 보게 될 것이다.”
혹 떼러 온 남월의 사신은 혹만 붙이고 돌아갔다.
다음 사신이 들어왔다.
“선비국의 왕 모용황이 대칸을 뵙습니다.”
무려 왕이 직접 왔다.
“그래. 용건은?”
광해는 모두 평등하게 퉁명스레 대했다.
“선비국이 칸국에 신종하고 합치는 걸 허가해 주옵소서. 모든 특권을 버리고 칸국의 법규에 따라 평범한 백성이 되겠나이다.”
응?
이건 생각지 못한 제안인데.
“왜?”
“선비족 또한 대평원에서 시작된 기마민족으로 칸민족의 한 갈래일 뿐이옵니다. 강이 바다를 찾아가듯 본류를 따라가고 싶습니다.”
“그런 외교적 명분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봐라.”
광해의 솔직한 말에 모용황이 쓴 웃음을 지었다.
“선비족 백만명으로 한족 천만명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게다가 최근 지주를 향한 증오가 확산되며 무차별 학살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부를 포기하자니 부족민들의 지지를 잃을 것이며 부를 지키자니 민초들의 봉기가 너무 강합니다. 한족이라 생각하는 자들에게 선비족의 뿌리를 찾아주기도 전에 제 민족이 전멸할 지경입니다.”
독버섯이 퍼지고 있구나.
초기 공산주의의 강한 전염력.
지주를 죽여 재산을 나눠갖자.
모용황 정도 되면 누가 그 사상을 퍼트리는지 알겠지.
칸국의 공작에 끊임없기 고통 받느니 모용황은 차라리 신종을 선택했다.
“신종이라...... 자치권을 원하나?”
“아니옵니다. 가진바 모두를 바치고 평범한 백성이 되겠나이다. 그 후 울타리 안에서의 공정한 경쟁을 하겠나이다.”
왕이 자기 자리를 버리기 힘들었을 텐데 굉장히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잠시 생각하다가 한켠에 서 있는 서칸왕을 봤다.
“어떻게 생각하냐?”
“산서성과 하북성의 절반인데...... 지키기 어려워. 계획에 없는 땅이고, 지하자원도 많지 않아. 얻어봤자 실만 많은 땅이고, 그 땅의 중국인 천만명을 동화시키는 건 더 어렵지.”
광해는 허균을 바라봤다.
“소신의 의견을 물으신다면 반동과 자리를 바꿈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반동?”
“몽골초원에 칸국의 지배를 거부하는 부족이 십만명 가까이 있습니다. 저희의 약속이 있기에 동맹만 유지하고 있지만, 그들은 끝내 동화되길 거부했습니다. 그들에게 산서성을 주고. 복속을 원하는 선비족을 받아들이면 큰 혼란은 없을 것이옵니다. 앞으로도 준가르나 카작스 쪽에서 칸국을 거부하는 이들을 산서로 밀어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서에 따르면 산서와 하북 모두 기마민족의 땅이었으니 그들이 본래 자기 땅을 찾는 것일 뿐이옵니다.”
중국의 중화사상이 역사를 조작 왜곡했듯 칸국 또한 역사를 슬쩍 왜곡하고 있다.
원래 역사는 만들기 나름이다.
“모용황. 동의하나?”
“예. 이해했습니다.”
“선비족 전원이 이동할 생각이야?”
“대부족장들 모두 동의했지만, 밑에 거부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복속을 허가받으면 돌아가서 의견을 모으겠습니다.”
“그래. 돌아가서 명단 만들어. 대신 스스로 진정 원하는 이만 데려와라. 생각 없이 따른다거나 와서 문제 일으킬 놈은 데려오지 마라. 한족의식에 젖은 놈들도 버리고.”
“알겠습니다.”
“반년 주마. 그동안 재산도 최대한 챙겨두고. 괜히 버릴 필요 없잖아.”
“감사합니다. 대칸.”
선비족과 몽골족의 민족대이동이 아주 간단하게 결정되었다.
몇차례 접견을 더 한후 검소한 중식을 먹었다.
그 후 상소를 읽고 경연을 열었다.
창덕궁 정자에 대신과 학자가 모여들었다.
남인 이원익.
북인 정인홍.
은퇴한 학자 둘이 경연을 주제한다.
“10년만입니다.”
“연산군도 이렇게 경연을 소홀히 하진 않았을 겁니다.”
“난 괜찮아. 연산군보다 훌륭하니 됐어. 아픈덴 없고?”
“예. 세월이 갈수록 건강해지고 있습니다.”
72세 이원익. 84세 정인홍.
증손자가 장가가는 것까지 본 나이건만 둘 다 정정하다.
본 역사에서도 더 살았으니 의료가 발전한 현 시대엔 한참 더 살겠지.
“하는 일은 잘 되고?”
“허허. 얼개는 잡았으나 서칸왕 전하께 계속 지적받고 있습니다. 어쩌면 평생 고쳐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은퇴한 두 노신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고 있다.
오늘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가 아니니 잡담을 줄이고 경연을 시작했다.
삼남지방에서 발생한 인종혐오 범죄와 방지법에 대한 연설 겸 토의.
경연이 끝나고 상소문을 읽는다.
그 후 저녁을 먹고 잔다.
황제의 하루.
모현성에게 말해 전통방식 황제의 삶을 꾸몄다.
모든 일과를 끝낸 광해가 산남대군을 봤다.
“내가 신내림을 받았기에 나는 이러지 않아도 된다. 서칸왕과 신하들에게 맡겨도 알아서 잘 돌아가지. 하지만 네가 황제가 된 다면 나보다 열배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반란으로 쫒겨나거나 모든 권한을 잃고 허수아비가 된다. 황제의 자리는 일반 노동자보다 편한 자리가 아니다. 수백 배 힘든 자리지.”
“명심하겠습니다.”
“잘 보고 일주일 후 느낀 바를 말하도록.”
다음날도 산남대군은 새벽부터 광해의 뒤에 붙었다.
비슷한 일과가 이어진다.
밥먹고 공부하고 상소를 읽고 정무를 보고 교육받고 제례를 지내고.
편전과 경연장을 비롯해 정해진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일만 해야 한다.
괜히 조선의 왕이 단명한 게 아니다.
그렇게 칠일 째 된 날 재밌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소망상회의 주인 정이라는 자입니다.”
“과...광해니임을 만나게 되어 삼생의 영광이옵나이다.”
벌벌 떨며 절하는 평범한 아낙.
충남 태안에 사는 해미댁이다.
- 작가의말
200화~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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