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황제의 하루
순도 100% 픽션입니다
짧은 해외출장을 끝내고 게이트를 만들어 한성으로 돌아왔다.
캬아앙!
게이트 앞에 앉아있던 구름이가 달려와 얼굴을 비빈다.
혀로 핥는 건 광해가 싫어해서 다른 사람에게만 핥을 수 있다.
“아. 맛있는 거 사오기로 했지.”
방금 북경오리를 먹고 온 광해는 구름이를 보자 그제야 생각났다.
컁!
“쟤가 빨리 오자고 해서 잊었어. 쟤를 때려.”
광해는 모현성을 가리켰다.
화난 구름이의 바바바.
“컥. 엌. 크헉. 칵.”
정확히는 광해의 의지를 마력으로 전달받은 구름이가 장난삼아 때리는 거였다.
착한 구름이는 사람을 때리지 않지.
“크흑. 형 바로 갈 거야?”
“가지 뭐. 할 것도 없잖아.”
가서 소유키랑 예서에게 마력 좀 쐬어 주고, 소유키의 딸과 예서 뱃속의 아기에게도 마력을 쐬어 줘 건강하게 해 줘야지.
아기와 임산부는 언제 병에 걸릴지 모르니 매일 마력샤워를 해 줘야 한다.
“며칠 쉬다 가. 황궁 완성됐어.”
“황궁?”
“형은 황제잖아. 창덕궁은 서칸왕이 쓰니 형의 황궁은 따로 지어야지.”
“그딴 게 필요가 있냐? 가뜩이나 재정도 쪼들린다며. 엄청 적자라더니.”
“그래도 랜드마크는 필요해. 건물 하나쯤은 그리 큰 돈이 들지 않고 건물을 볼 때마다 백성들이 얻을 자긍심과 신앙심을 생각하면 만드는 게 이득이야. 가보자.”
“그래.”
광해는 구름이를 탔고 모현성은 말을 탔다.
서칸 왕의 호위병과 함께 창덕궁을 나서 육조거리를 지났다.
“숭례문을 통과하면 정면에 경복궁이 보이지. 경복궁은 문화거리로 쓰고 있으니 우리가 만든 랜드마크는.”
“저거냐?”
멀리서도 눈에 띄는 고층 건물이 있다.
햇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건물.
“어. 덕수궁 자리야. 숭례문 밖에서도 딱 보이는 위치지. 외국의 사신들이 모두 보게 되는 위치고.”
“그리 크진 않군.”
“돈이 없으니까 크크크.”
광해가 세자 시절 살던 정릉행궁.
창덕궁이 완성된 후 서궁이라 불리게 되며, 소성대비를 이곳에 유폐했고, 후에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어 조선왕조 마지막 왕이 기거하던 곳이다.
이제는 옛 혹은 미래의 이름을 모두 버리고 유리황궁이라 불린다.
“멋지네.”
“현재 기술로 할 수 있는 최고 건축물이야.”
5층짜리 네모난 건물이 세 동 올라가 있다.
기둥을 철근콘크리트로 둥글게 세웠고, 바닥 층도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었다.
벽면은 나무판자로 만들되 큼직한 창문에 판유리를 꼈고, 남쪽 면은 벽면 전체가 통유리다.
“통유리 못 만든다며.”
“만들 수는 있지. 대신 졸라 비싼데 잘 깨질 뿐.”
“지진나면 다 깨지겠다.”
“지진이 문제가 아니야. 빌어먹을 새들이 자꾸 머리 꼬라박고 자살해서 수십 번 깨졌어. 아놔. 이제 생각해보니 전래동화 까치의 보은 그거 실화일거야. 분명.”
“그래서 유리 앞쪽에 철망을 세웠군. 보기 안 좋다고 생각했더니 그런 이유가.”
“왠지 감옥 같을까봐 철망은 안 쓰려고 했거든. 그런데 도저히 안 되더라고. 매 모양의 연을 띄우고 허수아비 세우고, 풍선을 띄워도 자꾸 깨져. 새새끼들 진짜 자살본능은.”
모현성의 새타령을 들으며 황궁 입구에 도착하자 위사 사이에 서 있는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박내관. 오랜만이네.”
“무강하셨습니까 폐하.”
고자지만 궁녀였던 아내와 나란히 서서 인사하는 박상전.
“이따 알약 좀 줄게. 따로 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광해가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박내관은 한성의 궁을 관리하려 남았다.
소설 속 집사처럼 광해의 집을 관리하는 데 인생을 바친 충성스런 박상전.
비아그라 좀 챙겨줘야지.
정문으로 들어가자 정면에 황제의 궁이 보인다.
그 뒤쪽에 비슷한 모양의 두 건물이 있는데 하나는 소성왕후와 인비 등 선왕의 대비들을 위한 대비전이고 하나는 광해은행 창고다.
창덕궁 앞의 황금탑보다 수십 배 큰데 말 그대로 건물 전체에 황금과 광해신금이 쌓여있다.
유리창을 통해 황금과 신금이 광채를 사방에 비추고 있다.
칸국의 국력을 상징하며 대놓고 보물을 자랑해도 된다는 군사력의 자신감을 표현한다.
“광해대칸을 뵙습니다.”
박내관 뒤로 고용인 수십명이 줄을 맞춰 인사한다.
조선시절 천명이 넘는 고용인을 생각하면 많이 줄었지만, 건물 하나만 관리하니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다 예쁘다.
“뭐야. 얼굴보고 뽑았냐?”
무심코 던진 말을 모현성이 받았다.
“새로 만들 황궁에서 일할 지원자가 엄청 몰렸거든. 그 중에서 뽑다 보니 이렇게 된 거지. 이왕이면 예쁜 게 좋잖아.”
“내가 욕먹을 것 같은데. 하렘 차렸다고.”
“황제를 누가 욕해? 크크크. 어차피 쟤들도 일하고 싶어 지원했고 그 중에서 뽑은 것뿐이야. 원래 스튜어디스나 기상캐스터도 뽑는 기준에 미모는 없지만, 뽑은 결과는 다 예쁘잖아.”
“여성단체가 지랄할 문장이군.”
“이게 뭐! 그게 뭐가 나빠서. 솔직히 맞는 말이잖아. 예쁜 게 못생긴 것보다 좋지. 돈 받고 몸 대주는 매춘이나 돈 많은 노인하고 결혼하는 거나 똑같지. 돈 보고 결혼하면 그것도 매춘이야? 애초에 신데렐라나 인어공주나 전부 왕자 눈에 들어 팔자 고치는 얘긴데. 그게 자기에게 최선의 선택이니 그런 삶을 선택한 게 왜 나빠!”
갑자기 급 발진하네.
“어 그래. 인정. 음. 그래도 창덕궁 궁녀와 레벨이 많이 다른데.”
“거긴 사람 수 줄이면서 나이 많은 사람 위주로 남겼으니까.”
“넌 여자 욕심 없냐?”
“난 주인공이라 안 돼. 주인공은 고자여야 하지만 만약 결혼한다면 여주와 일편단심 사랑을 해야 해. 내 위인전을 보는 독자에게 주인공이 결혼하고 여러 여자 만나면 마이너스요소야.”
오랜만에 듣는다. 모현성의 주인공 병.
“그래. 서른일곱에 월 80만원 버는 시간강사 노예가 왕 됐으면 반쯤 주인공 됐지. 인정.”
“어. 난 먼저 가볼게. 내일 봐.”
기특한 주인공 놈이 알아서 빠져준다.
새집을 둘러보려는데 도열해 있는 궁녀들이 눈에 밟힌다.
수줍게 고개 숙이는 아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예쁜 표정 지으며 바라보는 아이.
다 예쁘네.
승은을 받고 싶다 -
이하 동문.
소망도 참 깜찍하다.
원한이나 못된 소망도 없고 참 착한 애들만 모아 놨다.
칸반도 칸족만 있는 게 아닌 듯 투르크계, 남방 인니계도 보이는데 인종은 달라도 다 예쁘다.
예쁜 여자는 언제나 옳다.
그러고 보니 최근 길게 참았지.
예서는 임신 초기고 소유키는 딸을 생산한지 얼마 되지 않으니......
앗. 그러고 보니 예서의 소망이......
크흠.
그래 죽은 사람 소망도 들어준다는데.
“큼. 박내관은 술상을 준비해라. 너희들은 내 집을 안내해줄래?”
말하다보니 광해답지 않은 순한 말이 나왔다.
줄서있던 궁녀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다가왔다.
“예.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제가.”
“얘가 구름이옵니까? 너무 예쁩니다.”
광해의 성격에 대한 강의를 들었는지 애들이 겁먹지 않고 솔직하게 다가와 말한다.
그래. 인간관계가 이래야지.
구름이는 알아서 정원을 뛰어다니라 시키고 건물에 들어가니 궁녀들이 다가와 재잘재잘 떠든다.
이 침구는 무굴에서 왔고 이 발은 선비국에서 왔고, 이 융단은 오스만에서 왔고 이 침대는 형상기억 자가복원 특수합금으로 만들었고......
“어? 뭐라고?”
“이 침대는 형상기억 자가복원 특수합금으로 만들었다 말씀 드렸사옵니다. 광해님. 모현성 칸이 그렇게 설명했습니다.”
그건 뭔 SF슈퍼울트라변신로봇용 금속이세요?
광해는 예쁜 궁녀가 가리킨 침대를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천을 덮은 침댄데.
약간의 꺼림칙함을 참고 조심해서 앉아보니 금속이 느껴진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스프링에 그런 거창한 명칭을 붙였구나.
하여튼 모현성 이놈의 허세는 진짜.
스프링 합금법을 몰라서 K2소총을 못 만든다더니 결국 찾아냈나보다.
조합법을 찾을 때까지 갈려나갔을 철공들에게 애도를.....
건물 내부는 백평 정도 크기인데 중간에 복도가 있고, 남쪽은 주로 넓은 거실이나 응접실로 꾸며져 통유리로 밖을 보게 만들어졌다.
북향은 침실이나 옷 갈아입는 방 등이 있고 천장엔 전구가 달려 있다.
“오. 불을 켤 수 있느냐?”
“예. 스위치는 벽면에 있습니다.”
궁녀가 경쟁하듯 달려가 불을 켜니 백열등 노란 불이 켜진다.
전구 내부를 진공으로 만들거나 질소기체만 채울 수 없어서 생산할 수 없다더니 유리장인을 갈아 넣어서 어떻게든 만들었나보다.
어차피 전기는 기밀기술이니 통제구역 내에서만 쓰겠지만.
각 층마다 용도가 다른 방과 거실을 보며 5층까지 올라갔다.
하중을 받을 필요가 없는 최상층은 중간에 답답한 기둥이 없고, 천장도 전부 유리를 씌웠다.
높은 곳에서 보니 서쪽 한강으로 가라앉는 태양이 마지막 노란 빛을 유리창에 반사시켰다.
“시간이 되었으므로 점등하겠습니다.”
한 궁녀의 말에 건물 내부와 외벽의 전등이 일제히 켜졌다.
그뿐 아니라 건물 외벽 쪽 기둥 위에서 화염이 솟았는데 그 높이가 5M에 달할 정도로 강한 불이었다.
“저 불은 왜 켠 거냐?”
“제국의 영화를 상징한다 들었습니다. 서칸왕의 말로는 가솔린이라는 것이 남아돌아서 이렇게 불 피워도 된다고 합니다. 대칸께서 오지 않은 날에도 매일 어두워지면 이렇게 불을 켭니다.”
가솔린이 남아도는 좋은 나라네.
변변한 조명이 없는 세상이니 5층 건물 전체를 밝히고 옥상에 거대한 화염을 일으키면 한성 전역에서 볼 수 있겠군.
이 건물을 보는 것만으로 경외와 신앙심이 생길 테고, 한성을 방문한 외인에게 저항할 의지를 빼앗을 것이다.
버려지는 가솔린보다 이득이 훨씬 많을 것 같다.
5층에서 경관을 보니 한성이 다 보인다.
강 남쪽 노량진은 더욱 커졌고, 한성 내부엔 온갖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고 지어지고 있다.
칸국은 발전하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상이 올라오고 각종 산해진미가 차려졌다.
설탕과 고추, 후추,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 식재료가 추가되어 예전보다 다채롭고 화려한 음식들이 생겨났다.
겸상을 좋아하는 광해의 성격을 아는 박상전은 커다란 상 여러 개를 붙여 다 같이 먹을 수 있게 만들었다.
사용인들을 위한 자리니 궁녀들을 비롯해 수라간 나인들과 가솔린 불기둥 관리인까지 전부 데려와 먹었다.
주로 박내관과 두런두런 이야기 하다가 궁녀나 목수, 전기 기술자와 말하는 동안 궁녀들이 교대로 나가 가야금이나 피아노 등 연주를 했다.
태평성대구나.
현대에 온 것 같은 기분에 금방 취했다.
“음. 이제 잘까. 어디보자 소망이...... 네 소망이 가장 크구나.”
딱 봐도 혼혈처럼 생긴 투르크계 미녀의 소망이 가장 크다.
이건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의식인거다.
의심하지 말지어다.
“침실은 어디에 있느냐.”
“이층에 있사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지목받은 궁녀가 조심스레 다가와 팔짱을 끼고 안내한다.
확실히 광해의 성격에 대해 많은 말을 들은 것 같다.
“이층?”
“예. 대신들은 누구도 대칸 머리 위에서 움직일 수 없으니 최상층에 둬야 한다 말했지만, 서칸왕이 막았습니다. 최상층에 침실을 두면 광해님은 귀찮아서 안 올라갈 거라며. 그래서 최상층이 연회실이 되었습니다.”
그 새끼. 날 너무 잘 아네. 죽여야겠어.
이층. 아까 자가복원형상기억합금 침대를 소개받은 그 화려한 침실로 가 오늘 처음 보는 여자와 잠을 잤다.
오래 살아보니 알게 되는 것이 있다.
남자는 자기 나이가 어떻든 젊은 여자를 좋아하게 되어 있다.
아마 여자도 나이 상관없이 젊은 남자를 좋아할 것이다.
예서식 표현을 빌린다면 원래 그런 거 일거다.
인간은 원래 젊음의 아름다움에 끌리게 만들어져 있을 거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만나는 건 노벨상까지 받은 게임 이론, 그 선택지가 현실적 최선이기에 그런 것뿐이지 마음은 젊은 상대를 좋아할 거다.
아마.
“여. 갑자기 젊어진 거 같네.”
“그러게. 몇 달 놀다 갈까? 승은을 베풀려면.”
“시끄러. 가서 다리나 만들어.”
생각해보니 황제가 된 후 황제다운 하루를 보낸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어제 같은 하루가 계속되어야 하는데.
그게 다 이 새끼 때문......
“죽일까?”
속마음이 튀어나왔네.
“뭘?”
“아무것도.”
“됐고. 오늘 사람 하나 같이 만나자. 그담에 가든지 머물든지 맘대로 하시고.”
“중요한 외교사절이야?”
“그건 아닌데 재밌는 제안이 들어와서.”
잠시 후 모현성의 손님이 창덕궁 편전에 들어왔다.
“서칸의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헛. 다시 뵈어 영광이옵니다. 광해님.”
다시 뵈어?
“누구냐?”
“나오에 카네츠구라 합니다.”
별거 아닌 놈 같다.
기억에 없는 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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