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또라이커
- 음. 도라익 선수 안 울었으면 좋겠습니다.
- 본인부터 울지 마세요.
- 박 해설 내가 진짜 싫은가 봐. 해설 은퇴 안 한다니까 그때부터 되게 뭐라 하네?
경기가 끝나고 맨유 선수들은 맨유 선수대로 우승을 축하하고, 도라익은 도라익대로 은퇴 인터뷰하러 근처 호텔의 기자회견장에 왔다.
발 디딜 틈 없다는 게 과장법이 아닌 사실주의 화법이었다는 걸 수백 명 기자가 증명했다. 도라익 은퇴 인터뷰에 참석하려는 기자가 하도 많아 사진 기사나 카메라맨을 대동치 못하는 상황이 돼서 대부분이 직접 카메라나 사진기를 들었다.
- 대부분 은퇴 인터뷰에서 대성통곡하는 선수가 많은데요. 도라익 선수라면 무덤덤하게 끝낼 수 있지 않을까요?
- 제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도라익 선수가 울면 너무 슬플 것 같아요.
도라익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등장했다. 저 환한 미소가 곧 사라지고 슬픔으로 가득 찰 거란 생각에 강 해설은 마음이 찢기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저 오늘 은퇴합니다. 정식 은퇴는 월드컵 뛰고 할 거지만, 프로로서의 은퇴는 오늘입니다."
월드컵은 아마추어도 참가할 수 있지만, 리그는 프로만 된다.
"근데 오늘 분위기가 생각보다 무겁네요. 제가 축구 그만두고 죽는 것도 아닌데."
도라익의 신난 말투에 기자들 얼굴이 하나같이 멍해졌다.
"저 그간 하고 싶은 게 많았거든요. 술도 종류별로 맛보고 싶고, 라면도 먹고 싶었어요. 그리고 사이다. 이게 제일 궁금했어요. 스테이크에 소금이랑 후추랑 여러 향신료를 듬뿍 뿌려서 먹고 싶구요. 맞다. 스키도 타보고 싶어요. 계약서에 금지된 스포츠여서 한 번도 못 타봤거든요."
- 역시.
- 도라익답습니다.
"밤새워서 게임도 할 거예요. 차 운전도 해보고. 늦잠도 잘 거고. 눈 나빠진다고 TV도 잘 안 봤는데, 재밌는 드라마 다 찾아볼 겁니다. 인터넷도 마음대로 하고, 댓글도 달 거예요. 그리고 세계 여행도 다녀보고 싶어요. 경기 걱정 없이 편한 마음으로 즐겁게요."
축구인으로서 도라익은 끝이지만, 인간 도라익은 이제 시작이다.
도라익은 그간 하고 싶었던 것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기자들은 멍한 얼굴로 기계적으로 촬영 버튼만 간간이 누르면서 도라익의 하소연에 깊이 빠져들었다.
"물론, 월드컵 끝나 완전히 은퇴한 다음 얘깁니다. 이번 월드컵은 결승이 목표거든요. 그간 16강과 8강에서 멈췄는데, 이번엔 끝까지 달려보렵니다."
도라익의 발언이 끝나고 질문 시간이 됐다. 기자들이 멱 따이는 돼지가 놀라 소리도 못 낼 정도의 굉음으로 첫 질문 기회를 쟁취하려 했다.
도라익은 얼굴이 익은 한국 기자에게 영광의 첫 질문 기회를 줬다.
"감사합니다. 도라익 선수님. 은퇴하고 지도자의 길을 걸을 생각은 없습니까?"
귀에 꽂은 자동 통역기로 질문을 이해한 기자들이 탄식했다. 도라익한테 꼭 묻고 싶은 3개 질문 중 하나를 한국 기자가 채갔다.
"없습니다. 제가 동생이랑 아들을 가르쳐 봤는데, 제가 가르치는 데 전혀 소질이 없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되던 거라서 안 되는 걸 어떻게 되게 하는지 전혀 모르거든요."
"그럼 도라유 선수와 도민호 선수는 누가 가르친 겁니까?"
"라유는 제임스가 가르쳤습니다. 여자 꼬시는 법도 가르쳤는데, 제임스 역시 꼬시는 건 잘해도 가르치는 건 젬병이더군요."
도라유는 동양인 기준으로 잘생긴 얼굴이지만, 서양까지 섭렵할 상은 아니었다. 도라익이나 제임스처럼 동양과 서양의 기준에 둘 다 부합하는 얼굴을 드문 편이다.
"민호는 잭이 알아서 키웠습니다. 둘이 작년에 계약해서 잭이 민호의 에이전트가 되었습니다."
도라익을 탐냈던 잭은 최경호와 도라익의 끈끈함이 칼로도 자를 수 없음을 인정하고 라유와 민호를 노렸다.
아쉽게도 라유는 뮐러의 회사와 계약했고, 잭은 작년에야 도민호와 계약하는 데 어렵게 성공했다.
"은퇴 후 야구 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두 번째 기자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아니요. 실제 오퍼는 몇 개 받았지만, 좀 전에 말했다시피 전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습니다. 야구 때문에 제 계획을 미루고 싶지 않습니다."
"야구는 축구와 달리 매우 편한 스포츠로 알려졌는데요. 특히 한국 야구 말입니다. 경기 중에 식사도 할 수 있고 음식 가리는 것도 없고 음주 흡연 모두 허용된다던데요."
"그래요? 우리 아버지 구단은 음주랑 흡연 금지하던데."
질문과 답변이 끝나고 세 번째이자 마지막 기회가 됐다. 질문 세 개만 받고 끝내는 인터뷰가 아니지만, 중요한 질문을 자기 입으로 뱉으려는 기자들의 열의는 회견장 천장을 태울 만큼 뜨거웠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도우, 감사합니다."
세 번째 질문 기회를 잡은 기자가 성호를 그렸다.
"은퇴하면 할리우드 가서 배우 한다던데, 사실입니까?"
"잠시만요."
도라익은 전화기를 꺼내 최경호에게 문자를 보냈다. 바로 5미터 밖에 서 있던 최경호는 도라익의 문자를 확인한 후, 말해도 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출연하는 건 아니구요. 제 그간 인생을 그린 드라마를 찍습니다. 제 아들 민우가 주인공을 맡아 출연할 건데요. 실제로 민우의 성장에 맞춰 10년 동안 시즌제로 촬영할 예정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각색을 최소화하는 드라마로, 그간 저에 관한 오해나 헛소문이 드라마를 통해 풀리길 바랍니다. 저 사실 또라이 아니거든요."
드라마의 판권 수익 및 간접 파생 수익의 40%를 자신이 가진다는 얘기는 굳이 안 했다.
그 뒤로 자잘한 질문이 이어졌다. 도라익은 웃는 얼굴로 기자들의 질문에 시종일관 성실히 대답했다.
- 이렇게 즐거운 은퇴식은 처음 봅니다.
- 도라익 선수는 축구를 사랑하는 만큼 자기 인생도 사랑하는 거죠. 저희가 본받을 모습입니다.
"여긴 오늘 데뷔한 제 아들 민호입니다."
질문이 끝나갈 즈음 도라익은 아들 민호를 불렀다. 슈트로 갈아입은 도라익과 달리 여전히 스토크시티의 18번 유니폼을 입은 민호가 도라익의 자리를 대신했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를 잡은 도민호가 익살스럽게 말했다.
"보통 제 장난감을 아빠가 건드리면 다신 작동 안 하던데, 이 마이크 어디서 만들었는지 튼튼하네요."
기자들이 빵 터졌다.
"안녕하세요. 도민호입니다. 미리 말씀을 드리는데, 도라익 아들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곧 모두가 아빠를 도민호 아버지라고 부를 겁니다."
어린 도라익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출사표를 던졌다.
"일단 여름에 월드컵에 참가할 거고요. 그럼 아버지 최연소 대표팀 출전 기록이 깨질 겁니다. 골도 당연히 넣을 거고, 도움도 기록할 겁니다. 기회가 되면 해트트릭도 하겠습니다."
'아버지랑 판박이다.'
"내년 스토크시티는 챔피언스리그에 참가합니다. 챔피언스리그 최연소 출전과 득점 및 도움 기록을 전부 갈아치울 겁니다. 혹시 내년 스토크시티가 조 3위를 해서 유로파리그 토너먼트로 가게 된다면 유로파리그 최연소 출전과 득점 그리고 도움 기록도 모두 갈아치울 겁니다."
기자들은 도민호의 말에 점점 빠져들었다.
"저는 원래 올 시즌 초에 데뷔하기로 했습니다. 기량은 이미 완성됐거든요. 프리미어리그에서 주전 공격수를 담당해도 괜찮다는 아버지와 구단 코치들의 공동 의견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키가 크는 바람에."
생각만 해도 억울한지 도민호가 이를 살짝 갈았다.
"바로 데뷔하면 자칫 프로 인생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경고 때문에 쭉 쉬다가 38라운드에 겨우 출전했네요."
심호흡으로 억울함을 해소한 도민호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일단 제 소개를 하자면, 키가 189인데 아직 몇 센티 더 클 거랍니다. 193에서 195 정도로 예상하구요. 그래선지 스피드는 아빠보다 빠릅니다. 0.1초 더 빠른데, 나이 먹으면 더 빨라질 거라고 의사 선생님이 그랬어요."
"그리고 힘이 아빠보다 세요. 팔씨름은 작년부터 이겼고, 어깨를 대고 미는 놀이는 두 달 전부터 제가 이겼습니다."
"헤딩은 아빠보다 훨씬 잘합니다. 기본 키가 있으니 점프를 좀 늦게 해도 되는데, 그게 공의 궤적을 판단할 시간이 조금 길다는 뜻이거든요. 이런 작은 차이가 헤딩 정확도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순발력은 아빠랑 비슷합니다. 10미터 안에선 제가 지는데 20미터면 제가 이겨요."
"슈팅 정확도는 왼발이 8.8이고 오른발이 9.7입니다. 참고로 아빠는 왼발이 9.3이고 오른발이 9.5입니다. 아빠는 프로로 20년 가까이 뛰어서 왼발 완성도가 높은 게 당연합니다. 저도 몇 년 안에 왼발 슈팅 정확도를 9.5 이상으로 올릴 생각입니다."
"전술 이해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빠와 달리 저는 어려서부터 여러 나라의 축구 스타일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전술 이해력을 키웠고, 지난 일 년 경기와 훈련을 못 하는 아픔을 비디오 분석으로 달랬습니다. 오늘 경기에서 유감없이 보여드린 거 같은데 어땠나요?"
질문을 받은 기자들이 어리벙벙해 서로 쳐다봤다. 보통 질문을 하는 입장이기도 하고, 누구한테 던진 질문인지 몰라 선뜻 나서기도 뭐 했다.
"이견이 없는 것 같군요."
침묵은 묵인이다. 도민호는 기자들의 말 없는 인정이 마음에 들었다.
"우선 프리미어리그에서 아빠 골이랑 도움 기록을 깰 거예요. 합산 기록이야 얼마 안 되니까 어렵지 않고, 한 시즌 40골은 저로서도 좀 운이 따라줘야 합니다. 레드카드나 부상으로 장기 결장만 없으면 18세 이전에 해결을 보고 다른 리그로 이적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아버지보다 더 또라이야.'
기자들이 도민호를 상향 평가했다.
"저기요. 도민호 선수. 하나 질문해도 됩니까?"
한국 기자가 용기를 냈다.
"그래요.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 다 대답해 드릴게요. 여친은 아직 없으니까 그 질문은 빼시구요."
"왜 아버지를 성공의 길로 이끈 최경호 씨와 계약하지 않고 경험이 전무한 잭 버클리와 계약했습니까?"
도민호는 이마를 찌푸리고 잠깐 망설였다.
"제가 아저씨와 계약하면 아빠가 걸어온 길 그대로 따라가겠지요. 전 30살 전에 아빠 기록을 전부 깨고 제 길을 만들 생각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기자분이 아빠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대단한 선수라고 쓴 걸 봤는데, 전에만 없었던 거로 바꾸겠습니다. 전무후무의 타이틀은 제가 갖겠습니다."
-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보기 좋은데요. 굳이 아버지 은퇴식에서 할 얘기들은 아닌 거 같습니다.
"형. 쟨 누굴 닮아 저렇게 생겨먹었을까?"
유전의 힘은 위대하다. 도라익은 은퇴식에서 드디어 아버지와 어머니와 똑같은 질문을 머리에 떠올렸다.
"다른 애들은 안 저러잖아."
아버지와 어머니 입에서 수백 번도 더 터져 나왔던 말을 도라익도 뱉게 됐다.
"난 알 거 같은데."
최경호가 작게 중얼거렸다.
- 잠시만요. 현재 도민호 선수가 영국 대표팀으로 뛸 가능성이 없냐고 하는데요.
- 게다가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스페인 영주권도 갖고 있습니다.
- 어머니의 나라인 노르웨이 대표팀에 가도 되고요.
채팅창에 올라 온 글을 본 강철민과 박만호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 잠시만요. 도민호 선수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영국도 영주권만 있고 국적은 없습니다.
- 혈연 계가 없다면 국적 취득 후 3년이 지나야 대표팀을 대표해 A급 국제 경기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곧 있을 월드컵에 참가한다고 했으니 영주권만 있는 나라들을 배제해도 될 거 같습니다.
- 그럼 노르웨이만 남았는데.
- 요즘 유럽에서 강팀으로 떠오르는 노르웨이거든요. 어머니가 있으니 국적을 취득하는 즉시 대표팀 경기를 뛸 수 있습니다.
- 월드컵 조 추첨도 한국보다 훨씬 낫고요. 전문가들한테 최소 8강으로 평가받습니다.
채팅창에 글이 미친듯이 올라왔다.
- 아. 노르웨이 대표팀 감독이 방금 도민호의 영입에 최선을 다할 거라고 인터뷰했다고 하네요.
- 협회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일단 성명부터 발표해야죠.
- 그럼요. 당장 인터뷰하고 기사 내면서 분위기 만들어야죠.
- 차 회장님이 그만두시고 협회가 또 예전으로 역행하고 있는데요. 참으로 걱정입니다.
- 제발. 도민호 선수에게 대표팀 유니폼을 입게 하면 평생 협회 욕 안 하겠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 기간을 유럽에서 보낸 도민호다. 대표팀 경기 때마다 지구를 반 날아야 하는 한국보단 노르웨이 대표팀이 훨씬 구미가 당길 것이다. 게다가 FIFA 랭킹 30위인 한국보단 랭킹 8위인 노르웨이가 훨씬 강팀이기도 하고.
- 그럴 줄 알았으면 지난여름에 만났을 때 용돈 많이 줄 걸 그랬습니다.
- 도민호 선수 노르웨이에서 뛰면 강 해설 책임으로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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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많은 기록을 수립한 축구 선수 도민호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 작가의말
내일 기존 설정에 관해 마지막 글 올리겠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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