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
"라익아, 금맥 터졌다."
조커 입이 된 최경호가 말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주급 55만 유로 제안했어."
스토크시티는 이미 레알 마드리드를 비롯해 여섯 팀의 오퍼에 동의했다.
"맨시티는?"
"거긴 선수 정리가 잘 안 되나 봐. 아직 별 반응은 없어."
리버풀의 오퍼는 스토크시티가 거절했다. 아직 7월 이적 시장이 열리기까지 시간이 꽤 있기에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지만, 스토크시티가 원하는 바를 맞추기엔 리버풀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다.
토트넘은 도라익의 이적료를 지급할 정도는 되지만, 주급 체계 때문에 도라익의 영입을 망설이고 있다. 찰리 아담에게 했던 것처럼 계약금을 많이 주고 주급을 26만 파운드로 낮추는 방법이 있긴 한데, 한꺼번에 수천만 파운드의 계약금을 줄 정도로 넉넉하진 않다.
"중요한 건 이거야. 바르사가 참전했어."
선수들의 반대로 도라익의 영입 의지가 식었던 바르사. 그러나 멕시코전에서 보인 도라익의 활약은 꺼진 불을 다시 지피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레알이 45만 유로에서 55만 유로로 올린 건 바르사 덕분이야."
조금씩 조건을 올리며 싸우다 보면 체면 때문에 못 멈추는 경우가 있다. 레알은 아예 주급을 확 올리는 거로 바르사가 엄두를 못 내게 할 작정이었다.
"아틀레티코도 35만 유로보다 더 줄 수 있다고 말을 바꿨어. 출전 수당이랑 득점 수당 그리고 승리 수당도 큰 폭으로 올려줄 수 있대."
도라익은 스트레칭 자세를 바꾸며 최경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예전이라면 그저 최경호에게 맡기고 결과만 들었을 테지만, 이젠 좀 더 공 차는 외의 일들에 관심을 두기로 했다.
"그리고 드디어 대형 스포츠 브랜드에서 장기 계약을 제안했어."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의 장기 계약 제안은 축구 선수에게 돈이 될 뿐만 아니라 실력과 지위에 대한 인정이기도 하다.
"여긴 10년, 여긴 12년, 여긴 8년인데 종신 계약으로 전환하는 옵션이 있어."
"종신 계약? 그런 게 있어?"
"마이클 조던이랑 호날두가 종신 계약을 맺었잖아."
"은퇴해도 계속 광고한다는 거야?"
"그럼. 은퇴했다고 가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그럼 연금처럼 돈이 계속 나오겠네?"
"그렇지. 그런데 종신 계약이든 장기 계약이든 한 업체하고만 할 수 있으니 신중해야지. 돈뿐이 아니라 해당 브랜드의 이미지도 고려해서 결정해야 해. 이 부분은 뮐러네 회사가 잘하니까 걱정할 건 없어."
"뭐 더 없어? 스페인이랑 경기하기 전에 최대한 컨디션을 끌어올려야 한다고."
멕시코전에서 도라익은 최상의 컨디션을 보였다. 만약 리그가 진행하는 중이라면 한두 경기 더 좋은 컨디션을 이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는 몸에 피로가 꽤 쌓인 상태다. 생각보다 덥진 않지만, 생소한 이집트 날씨도 컨디션 유지를 방해했다. 어차피 컨디션이 떨어지는 건 어찌할 방법이 없기에 스페인전까지만 현재 컨디션을 유지하고 콩고전에선 컨디션이 떨어지게 놔둘 생각이었다.
"시계 광고, 향수 광고, 화장품 광고. 화장품은 여성용이어서 엘이랑 같이 찍는 조건이야. 그리고 자동차 광고도 있고, 기업 이미지 광고도 있어."
"공익 광고도 2건 있는데, 따로 찍을 필요는 없고 네 경기 영상이랑 사진을 사용하도록 허락만 하면 돼. 광고 멘트는 우리가 알아서 체크할 거고."
그때 최경호의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최경호는 독일어로 대화했다.
"대박."
통화를 마친 최경호가 주먹을 꾹 쥐고 웃음을 참았다.
"바르사가 뮐러를 통해 연락했어. 여기로 사람 보낼 테니까 계약 협상을 하자고."
"왜 형을 직접 안 찾고?"
"지난 시즌에 널 영입할 생각도 없으면서 나랑 협상하는 척 연기했잖아. 열 받아서 차단했었는데 잊고 안 풀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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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식들로 도라익의 컨디션 유지에 작은 도움을 준 최경호는 바로 근처 호텔로 이동해 미팅을 했다.
"독점 계약입니다. 계약금은 연 65억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유럽이랑 미국에서도 계약 제의가 들어왔거든요. 독점 계약은 어렵습니다."
"그쪽에서 노리는 주요 시장이 어딘가요? 미국 아니면 유럽인가요?"
"아시아 포함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쪽은 얼마 제안했나요?"
"그건 알려드리기 힘듭니다. 아직 협상 단계기도 하구요."
"저희도 세계 시장을 노립니다. 가격 면에서 협상 여지도 많구요."
"아주 많아야 할 겁니다."
비록 아직 멀었지만, 최경호는 협상을 자신한테 유리하게 가져가는 법을 터득했다. 어차피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은 게 자신임을 알기에 섣불리 정보를 노출하지 않고 상대가 먼저 입을 열게 만들었다.
'아이구, 삭신이야.'
반 시간이나 지속한 미팅에서 의미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한 마디도 실수하지 않으려고 집중한 탓에 어깨가 뭉치고 허리도 쑤셨다.
'그냥 다 모아 놓고 경매나 했으면 좋겠다.'
이런 별 의미 없는 듯한 미팅이 사실 꼭 필요한 절차라는 걸 안다. 그리고 간혹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상대가 의도 없이 뱉은 말이 좋은 정보가 되어 협상을 더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다.
그래서 예전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지만, 오늘처럼 성과가 전혀 없을 경우엔 상실감도 크다.
그때 전화기에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월드컵 특집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은 아나운서 오연화입니다. 혹시 시간 되시면 방송 출연과 관련해서 잠깐 상의할 수 있을까요?]
최경호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도라익 선수 이번 여름에 일정이 안 납니다.]
[도라익 선수 말고 최경호 님 출연 때문입니다. 지금 어디 계신가요? 만나서 직접 뵙고 말씀드렸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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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감독과 코치들은 스페인과 콩고의 경기를 보며 근심에 푹 잠겼다.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데?"
90분 경기를 하는 동안 콩고는 고작 3회의 슈팅을 기록했다. 그러나 총 31회나 슈팅한 스페인은 1:0의 점수밖에 기록하지 못했다.
"키퍼가 너무 잘합니다."
키퍼 코치가 말했다.
"반응이 빨라 슈퍼세이브가 많습니다. 그런데 높은 공 수비에도 약점이 없어요. 킥 정확도가 문제긴 한데, 그건 수비랑 상관없는 일이죠."
경기 중 스페인의 페널티킥 하나를 막기도 했다.
"두 센터백도 잘해요."
수비 코치가 말했다.
"쌍둥이라 그런지 협동 수비가 장난 아닙니다. 어쩌면 라익이가 저 둘에게 묶일지도 모르겠네요."
"이러면 스페인과 최소 비겨야 하는데."
첫 경기에서 이긴 한국팀은 콩고만 이기면 출전이 보장된다. 멕시코가 아무리 날뛰어도 6점이 최선인데, 골 득실에서 한국팀이 크게 우세했다.
그렇기에 스페인전에 지더라도 토너먼트 진출이 확실하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막상 스페인과 콩고 경기를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스페인이 운이 안 좋아서 1:0으로밖에 못 이긴 게 아니라, 경기 과정에서 콩고가 정말 뛰어난 수비를 보여줬다.
스페인이 슈팅을 많이 기록하긴 했지만, 대부분 밀집 방어를 못 뚫고 외곽에서 때린 중거리 슈팅이었다.
"이건 라익이도 어쩔 수 없어."
도라익의 득점은 대부분 페널티킥 박스 안에서 이뤄졌고, 보통 제임스나 산체스의 스루패스를 받아 키퍼를 제치고 슈팅하거나 토미의 짧은 패스를 반 박자 빠르게 슈팅해서 얻었다.
대표팀에선 이러한 지원을 받을 수 없다.
"멕시코는 도발이 먹혀서 잘 풀렸는데."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여러 상황이 멕시코 선수들에게 도발처럼 느껴져서 경기 초반부터 라인을 올렸다. 게다가 오창범의 프리킥이 운 좋게 골이 되면서 상황이 한국팀에 유리하게 흘렀다.
"명표까지 올려서 헤딩을 노리는 건 어떨까요? 창범이가 프리킥이나 코너킥 모두 괜찮은 편이고, 라익이는 물론 창식이도 헤딩 꽤 하잖아요."
그때 듣기만 하던 전술 코치가 입을 열었다.
"그냥 스페인전을 이기는 건 어때요?"
시선이 전술 코치에게 집중됐다.
"멕시코와 콩고 경기를 보면 뭔가 방법이 나올지도 모르잖아요. 당장은 스페인 경기에 집중하는 게 나은 것 같습니다."
차 감독은 가타부타 말이 없이 고민에 잠겼다.
월드컵이 끝나면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 협회로 갈 생각이다. 첫 경기에서 5:1의 대승을 거두면서 이미 좋은 시작을 끊었다.
여기에 스페인을 이기기까지 하면 협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마음껏 낼 수 있다.
'내가 신중하지 못해 라익이가 이적을 1년 늦췄다. 여기서 또 내 욕심으로 스페인전에 역량을 투입했다가 괜히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할지도 모른다.'
스페인에 지고 콩고와 비길 경우, 한국은 4점이다. 만약 멕시코가 스페인과 콩고를 이기면 조 3위로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한다.
더 큰 문제는 콩고에 질 경우다.
'성적만 생각하면 스페인전에 적당히 뛰어 체력을 남겨서 콩고를 이기는 쪽으로 전략을 짜는 게 맞다.'
스페인의 컨디션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은 점을 감안해도 콩고의 수비는 어마어마했다. 객관적 실력이 떨어지는 한국이 뚫기엔 쉬운 수비가 아니다.
차라리 컨디션이 덜 오른 스페인과 승부를 다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차 감독은 이런 생각이 개인 욕심인 거 같아서 자꾸 망설여졌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막내인 팀 닥터가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다들 여기 계셨군요."
방문자는 다름 아닌 도라익이었다.
"무슨 일인데?"
"컨디션 때문에 얼음찜질 하려는데요. 얼음 값을 호텔비로 내도 되나요? 아니면 제가 자비로 부담해야 하나요?"
단기 광고 하나만 해도 몇천씩 받는 도라익이고 주급도 12만 파운드나 되지만, 돈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다.
"호텔비에 달아둬."
용건을 마친 도라익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떠났다.
"참 나."
차 감독과 코치들은 헛웃음만 나왔다. 자신들은 월드컵 경기 때문에 근심과 걱정을 머리에 이고 사는데, 감독 방까지 찾아온 도라익의 용건은 고작 얼음 값이었다.
"콩고 경기는 일단 놔두고, 스페인 경기부터 고민하지."
차 감독이 결단을 내렸다.
얼음 값을 호텔비에 달아둘지 개인이 부담할지를 차 감독은 선수의 컨디션을 위한 일이기에 호텔비에 달아두는 게 맞는다고 판단했다.
'결국엔 원칙 문제다. 라익이도 돈이 아까워서 찾아온 게 아닐 거야. 그저 그 부분은 누가 부담하는 게 옳은지 궁금했겠지.'
스페인 경기가 먼저인데 콩고 경기를 고민하는 건 원칙에 어긋난다. 콩고 경기에 관한 생각은 일단 모두 접고 스페인 경기에 집중하는 게 맞는 일이다.
- 작가의말
도라익 : 아싸, 돈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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