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rest
"미치겠네."
최경호는 장갑을 벗고 손바닥에 난 땀을 바지에 닦았다. 한쪽으로 충전하며 전화를 받는 바람에 전화기인지 다리미인지 헷갈릴 정도로 뜨거웠다.
"난 멍청해 죽을 거야."
전화기가 또 울리자 최경호는 통화 버튼을 클릭한 후 핸즈프리로 전환했다. 그리고 일찍 이 좋은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멍청했던 최경호를 원망했다.
- 경호, 요즘 바쁘지?
절친 뮐러였다. 자신한테 너무 잘해줘서 혹시 게이 아닌지 의심했지만, 뮐러가 사귀었던 여자가 최경호를 찬 여자보다 많다.
- 미치겠어. 통화하다가 3도 화상 입은 사람 지구에 또 있나 몰라.
- 그런 멍청이가 둘이면 인류의 미래도 암울하지.
- 내 전화기 온도에 기여할 생각이 아니라면 빨리 끊어.
- 오늘은 친구로서가 아니라 비즈니스 파트너 제의를 하려고 전화한 거야.
- 잠깐 기다려.
최경호는 냉장고에 가서 차갑게 얼린 팩을 꺼내 전화기 밑에 받쳤다. 도라익과 오창범 모두 대표팀 친선경기 뛰러 가고 집에 혼자 있어서 에어컨은 꺼둔 상태다.
- 그래, 얘기해 봐.
- 도우의 이미지 컨설팅, 우리한테 맡기는 거 어때? 알다시피 우리 회사가 이미지 컨설팅에 있어 세계 3위 안에 들고 유럽에선 부동의 1위야.
- 아시아에선 3위에 못 들잖아.
- 아시아에서 컨설팅을 왜 해? 거기선 도우의 존재 자체로 겜 셋인데.
하긴. 독일 국가대표가 독일에서 이미지 좋게 만들려고 돈을 쓴다는 것도 웃기는 얘기다. 손 선수의 은퇴로 아시아 지역은 축구 아이돌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짠 나타난 도라익이 데뷔 일 년 반 만에 이미 그 자리를 꽉 채우고도 성에 안 차는지 저돌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 도우는 관리받는 거 싫어해. 그리고 축구 이외의 것에 신경 쓰는 것도 싫어하고.
- 너 그냥 겉핥기로 아는구나. 필요하면 이미지 연출을 하지만, 우린 기본적으로 고객 성향에 맞춰서 컨설팅해. 그리고 광고 컨택과 협상도 대신해 줄 수 있어.
최경호의 귀가 쫑긋했다.
- 자세히 설명해 봐.
- 입이 방정인 고객한테는 대화 방법을 알려주지. 입이라는 게 조심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그래서 정확한 대화 방식을 알려주고 훈련을 통해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하는 거야. 도우의 축구 선수 신분에 알맞고 도우의 성향에도 어울리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만들 거야.
- 축구에 방해 안 되고 본인이 귀찮지도 않은 방식이라는 거지?
- 그럼. 그리고 지난여름에 도우가 기부했을 때 있잖아. 왜 그렇게 빨리 시들었는지 모르겠어. 우리라면 최소 2개월 지속했을 거야. 그리고 아시아와 영국뿐이 아니라 축구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캐나다나 미국에서도 난리 나게 만들었지.
최경호는 자괴감이 들었다. 굳이 구실을 찾자면 도라익이 당분간 광고 생각이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언론을 어떻게 대하고 다뤄야 하는지 미숙한 점도 분명히 있었고.
- 10%. 구단이랑 어떤 비율로 나누는지 모르겠지만, 우린 초상권의 10%를 원해. 그리고 본인이 직접 컨택한 광고 말고 우리를 통해 받은 건 3% 커미션을 요구할 거야. 대신 3%가 아깝지 않도록 최고의 조건을 받아낼 거고, 세금을 아낄 수 있도록 금액 분할도 할 거야.
- 금액 분할? 그건 뭔데?
- 광고 금액을 여러 명목으로 나눠서 순차적으로 지급하는 거야. 이 부분은 나도 자세한 건 모르는데 우리 회계사가 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야.
최경호는 슬슬 구미가 당겼다. 광고를 제안한답시고 최경호가 처음 듣는 단어들을 쏟아내는 사람들한테 이미 지칠 대로 지쳤다.
- 고민하고 답변할게.
- 잘 생각해. 그리고 우린 고객의 자금 관리 그리고 투자 고문도 병행해. 사실 이게 우리 주 업무이기도 하고.
전화기를 무음으로 돌린 최경호는 찬물로 샤워했다. 그리고 큼직한 얼음 하나 깨물고 깊은 고민에 잠겼다.
'내가 편하려고 하는 게 아닐까?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오판하는 건 아닐까? 괜히 라익이를 혼란하게 만드는 건 아니겠지?'
한참 고민한 최경호는 결심을 내리고 반쯤 녹은 얼음을 꿀꺽 삼켰다.
- 라익아, 형이야.
-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한국은 취침 시간이다.
-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거든.
최경호는 뮐러한테서 온 제안을 자세히 설명했다.
- 괜찮은 조건이네. 대신 모든 일은 형 통해서 연락하라고 해. 나한테 직접 연락하지 말고.
'시발. 애보다 못한 멍청이.'
최경호는 도라익보다 생각이 짧았던 자신을 책망했다. 도라익이 편하게 축구에 전념하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1순위다. 그러려면 당연히 돈만 생각하며 광고를 찍자고 조를 뮐러의 회사를 최경호가 중간에서 적절하게 통제해야 한다.
- 그럼 동의한 거로 알고 그쪽하고 협상할게. 최종 계약서가 나오면 다시 전화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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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은 일주일이나 걸렸다.
도라익은 그동안 2개의 친선 경기에서 센터백, 좌우 풀백, 수미까지 네 위치에서 뛰었다. 센터백은 평범했지만, 수미와 좌우 풀백은 꽤 괜찮은 수준을 보여줬다.
- 뮐러 회사엔 8% 주기로 했어. 대신 그쪽에서 컨택한 광고는 4% 주기로 했고.
최경호와 뮐러 그리고 스토크시티 구단 관계자까지 셋이서 계약을 체결했다. 결과 도라익이 본인 초상권의 62%를 보유하고 뮐러의 회사가 8% 그리고 스토크시티 구단이 30%를 차지했다.
- 창범이 형이 내일 출발해서 거기로 갈 거야. 형이 나 대신 창범이 형 단도리해. 어떻게든 에드워즈의 수비 기술을 하나라도 더 배우라고.
- 너 혹시 챔피언스리그도 노리는 거니?
- 응.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
- 너 상식 좀 챙겨라. 최선을 다하는 건 좋지만, 목표를 너무 크게 잡지 마. 서두르지 말고 일단 다음 시즌 직접 겪어봐.
- 알았어. 챔피언스리그 공부 좀 할게.
도라익이 고분고분하게 나오자 왠지 불안했다.
- 근데 너 여자친구 안 만나니?
- 엘이 바빠서 한국 못 온대. 그냥 내가 유럽 가서 보기로 했어.
참으로 쿨한 커플이라며 혼자 작게 투덜거렸다.
둘이 사귄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 시샘으로 배가 아파 병원에 갈 뻔했다. 더 배가 아픈 건 양심에 털이 덜 나서 지금까지 도라익한테 엘 친구를 소개해달라고 부탁하지 못한 부분이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나서 부탁해야지. 요즘 세상에 10살 차이가 뭔 죄라고.'
- 뮐러 회사에서 한국으로 사람 보냈어. 곧 팬 미팅을 열 거야. 5천 명 규모를 기획한다는데 사고 안 나게 조심해.
- 알았어. 나 잘 시간이니까 그만 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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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엘은 한국에 놀러 가서 사진으로만 봤던 도라익의 가족한테 인사하기로 했다.
자주 만나지도 못하고 키스 이상의 진도를 나가진 못했지만, 도라익은 이미 엘을 신붓감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엘 역시 마찬가지 마음이었다.
"엘, 너 혹시 도우 번호 있어?"
같이 무대에 섰던 모델이다. 26세의 나이에 가는 곳마다 염문을 뿌리는 방탕한 여자다.
"왜?"
"생각해보니 동양 남자를 사귄 적이 없더라고. 아시아 인구가 전 세계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데 내가 너무 소홀했어."
"도우 번호는 없고, 도우 에이전트 번호는 있어. 도우 에이전트도 동양인인 거 알지?"
"그럼 됐어."
최경호가 알았으면 피눈물을 흘릴 대화였다.
'그냥 알려줄 걸 그랬나?'
도라익이라면 딱 한 번 전화를 받고 바로 번호를 차단했을 것이다.
'한국은 잘 시간이네?'
엘은 전화기를 이탈리아 시간과 한국 시간으로 세팅했다. 덕분에 도라익이 쿨쿨 자고 있을 시간이라는 걸 알았다.
'아침에 일어나 통화하자.'
화장을 깨끗이 지운 엘은 호텔로 돌아가 간단히 씻고 바로 깊은 잠에 빠졌다.
"너무 잤어."
아침에 일어나니 얼굴이 살짝 부었다. 호텔 직원한테 부탁해 얻은 얼음으로 부기를 빼며 도라익에게 전화했다.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뭐지? 설마 그 목욕탕이라는 곳에 갔을까?'
훈련할 때도 손목시계를 차면 전화를 받을 수 있다. 전화를 받을 수 없는 경우는 잠을 자거나 말로만 들어도 신기한 목욕탕이라는 곳밖에 없다.
문자를 보면 전화 달라고 메시지를 보낸 후, 한국의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자판을 한글로 바꾸고 조심스럽게 검색창에 도라익 세 글자를 쳤다.
한글을 익힌 지 오래지 않아 아직 받침은 어렵고 아는 단어도 부족하다. 그저 새로 뜬 사진이나 볼 요량으로 접속했다.
그런데 인기 검색어에 '도라익 구속'이 있었다. 번역기를 켠 엘은 구속 두 글자를 느리게 치고 버튼을 눌렀다.
Arrest!
가끔 뉴스에서나 듣고 실생활에선 거리가 멀던 단어가 떴다. 황급히 관련 뉴스를 클릭했지만, 아는 단어가 적어서 뭐라고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엘은 뉴스 타이틀에 붙은 '속보'를 번역기에 넣고 돌렸다. 급히 전하는 소식이라는 의미임을 깨달은 엘은 황급히 최경호한테 전화했다.
"미스터 최. 한국 포털에 도우가 구속됐다고 뉴스가 떴어요."
오창범을 배불리 먹여 훈련장으로 보내고 편한 아침을 즐기던 최경호가 벼락 맞은 소처럼 펄쩍 뛰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엘사 씨는 걱정하지 마세요."
통화하고 채 10분도 안 되어 SNS에 도라익의 구속 뉴스가 떴다. 유럽에서 유명한 피아노 연주자가 자기 SNS에 '도라익 구속'이라는 인기 검색어를 캡처해 올린 다음, 번역기로 돌린 결과도 함께 덧붙였다.
[부디 오해였으면 합니다.]
SNS는 순식간에 수백 건이나 리트윗되었다.
엘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시 최경호한테 전화를 걸었다.
"엘사 씨,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최경호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들렸다.
- 작가의말
구속 이유.
1. 도둑을 잡았는데 도둑이 도라익을 도둑이라고 모함함.
2. 커풀 싸움을 말리다가 쌍방 폭행으로 끌려감.
3. 천마가 몸에 빙의해서 깽판 치다가 스턴건에 맞고 잡혀감.
4. 봉인을 깨고 흑염룡을 푼 죄로 ‘애완동물 관리법’ 위반으로 체포됨.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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