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슨 감독
"형, 이거 진짜 맛있네. 좀 더 줘."
오창범은 접시에 처박은 얼굴을 들지도 않고 말했다.
"창범이 형, 체중 관리 안 해?"
맛이 안 느껴질 때까지 씹은 고기를 꿀꺽 삼킨 도라익이 핀잔을 줬다. 그러나 오창범은 식욕이 발동했는지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웠다.
"처음 왔을 땐 출전할까 봐 스트레스고, 이제 와선 출전 안 시킨다고 스트레스고.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해?"
"나도 모르겠다."
식욕이 순식간에 사라진 오창범은 냅킨으로 입을 깨끗이 닦은 후 미지근한 물로 입안을 헹궜다.
"팀에서 형이랑 계약한 게 페어린던이 리버풀로 이적했기 때문이란 거 잘 알지?"
"어, 알지."
"그럼 페어린던도 작년 1월 말에 이적 와서 시즌 내내 한 경기도 못 뛰고 벤치에도 앉지 못한 거 알아?"
"진짜?"
"애초에 페어린던하고 맥자넷은 이번 시즌을 생각해서 미리 영입한 거거든."
"그럼 나도 다음 시즌은 돼야 뛸 수 있다는 거야? 그럼 차라리 체력 안 남기고 훈련이나 열심히 할까?"
"형은 아니야. 에드워즈는 공격 가담이 극히 적고 크로스도 별로야. 형은 주전으로 쓰려고 급히 영입한 거야."
"그럼 왜?"
"티가 너무 났어. 처음 왔을 땐 완전 쫄아서 출전할까 봐 부들부들 떨었잖아."
"인정. 그럼 지금은 왜?"
오창범은 자신이 쫄보임을 쿨하게 인정했다.
"지금은 반대야. 자신감이 지나쳐."
"내가?"
"지금은 프리미어리그든 유로파리그든 출전해도 괜찮을 것 같지? 그런 생각으로 출전했다가 상대 윙한테 탈탈 털리고 '아, 감독님이 날 끔찍이 아껴서 여태껏 출전 안 시킨 거구나' 이러면서 자발적으로 반성문을 쓰지."
"나 요즘 훈련에서 괜찮잖아."
"다들 부상을 걱정해서 전력으로 안 뛰어서 그런 거야. 그리고 형이 머리가 좋아서 선수들 약점을 잘 찾아낸 덕분이기도 하고. 그런데 정식 경기는 90분밖에 없어. 형이 상대 공격수의 약점을 찾아낼 즈음이면 경기가 끝난다고."
오창범은 도라익의 말이 겁주기로 들리지 않았다.
갓 국대에 차출되어 어리바리하던 애송이 시절에도 순발력과 출중한 기본기로 곧잘 돌파하던 도라익이다.
그러나 일본전은 물론 중국전에서도 어설픈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속도가 빠르고 몸싸움도 돼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골을 넣으며 임팩트가 커서 그렇지, 경기 전반을 객관적으로 살피면 저놈이 어떻게 국가대표가 됐는지 의문이었다.
당시의 성공은 일본과 중국 모두 도라익에 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한 덕분이 컸다.
"그래서 영상 분석을 자주 하는 거구나."
"그런데 프리미어리그에선 머리로만 알면 아무 소용도 없어. 제임스는 흥분하면 판단이 빨라지고 상대 패스를 잘 가로채. 그런데 몸이 안 따라줘서 실책으로 수비 위기를 만드는 일이 더 많아."
"그러니까 결국 난 몸도 마음도 준비가 덜 된 쪼다라는 거지?"
도라익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형은 몸싸움이 안 돼. 그러면 속도와 민첩을 이용해야 하는데, 형의 플레이는 그렇지 않아. 자꾸 접근해서 손장난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애쓰는데, 그거 안 먹혀."
"안 먹히는 거 나도 알아. 어떻게든 먹히게 만들려고 그러는 거 아냐."
"프리미어리그는 손장난이 먹히는 곳이 아니야. 몰래 주먹으로 옆구리 때리면 웃어주고 다음 경기에 살인 태클 날리는 곳이야."
찰리나 줄리엔 같은 덩치가 자신을 향해 태클을 날리는 모습을 상상한 오창범은 끔찍한 나머지 소름이 돋았다.
"형이 지금 출전해서 손장난하다간 다음 시즌 까맣게 잊고 있을 때 큰코다쳐."
"그런데 왜 일찍 얘기 안 해줬어?"
"일찍 얘기해주면 역효과가 생기니까. 미리 듣는 충고는 독약이라는 말이 있잖아."
뼈저리게 겪어보기 전에 어설프게 머리로 알면 훨씬 오래 고생한다.
"더럽게 고맙다."
오창범이 툴툴거렸다. 그러나 가식 한 점 없는 웃음을 보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오창범은 에드워즈와 정반대 경우다. 속도가 빠르고 드리블과 크로스도 뛰어난 대신 수비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그걸 보완하는 게 손장난이고, 덕분에 대표팀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오창범의 가장 뛰어난 부분은 관찰력이다. 뛰어난 관찰력 덕분에 상대 선수의 약점을 빠르게 잡아내 이용하는 거로 우위를 쉽게 점한다.
문제는 오창범이 현재 속한 곳이 세계 최고로 일컫는 프리미어리그라는 것이다.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선수는 살아남기 힘들고, 살아남은 선수는 약점이 약점이 아니다.
오창범이 한국과 일본 리그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던 방식이 안 먹히는 곳이다.
"그게 아니어도 원래 프로끼리는 함부로 조언을 건네는 거 아니야. 내가 팀에 처음 왔을 때 어리다고 가르치려고 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
"그래. 대표팀에서 내가 이래라저래라 꼰대질했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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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스카이 스타디움에 부속된 4개의 대형 훈련장. 그 중 한 곳은 야간 등 4대로 대낮처럼 밝았다. 2군이나 유소년 선수까지 포함해 약 20명이 되는 선수가 자발적으로 훈련했다.
"기분이 이상해."
도라익이 저녁 훈련에 불참한 건 처음이었다. 그 탓에 새 훈련장에서 전술 훈련을 하는 선수들의 집중력이 평소보다 현저히 낮았다.
"챵붐. 넌 도우가 어디 갔는지 알지?"
오라고 호칭하는 게 좀 이상해서 다들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응. 에드워즈 만나러 갔어."
"왜?"
"부탁할 일이 있다고 그러더라. 그리고 감독하고도 만남 약속을 잡아 오늘 훈련엔 아예 안 올 거라던데."
같은 시각 도라익은 레스토랑에서 에드워즈 가족과 식사했다.
"톰, 어려운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아니야. 어차피 나야 입만 놀리면 되는데 뭐."
도라익은 에드워즈한테 오창범의 수비를 좀 봐달라고 부탁했다. 피지컬이 부족해서 밀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위치 선정이나 상대에게 어느 쪽 길을 열어줄지 판단하는 부분에서 약점을 보이면 출전할 기회조차 잡을 수 없다.
"근데 톰은 왜 코치 말고 스카우트가 되려는 거야?"
"나 사실 불량 청소년이었어. 친구들이랑 학교 도망쳐서 공원에서 공 차며 노는 걸 보고 스토크시티 스카우트가 설득해 축구를 하게 했거든."
"진짜? 넌 내가 영국에 와서 본 선수 중 가장 점잖은 사람이었어."
"결혼했잖아."
에드워즈가 수줍음 가득한 얼굴로 아내와 두 아이를 바라봤다.
"첫 아이가 태어난 날, 아내가 나한테 그랬어. 아들은 아버지의 행동을 보고 자란다고. 내가 계속 철부지로 살면 아들이 불량배가 될 거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우리 아버지도 운동선수거든. 구단이 서울이라는 곳에 있어 자주 보진 못했지만, 쉬러 집에 와서도 훈련을 멈춘 적 없어."
"그래서 도우 너도 훈련 벌레였구나."
감사의 의미로 에드워즈 가족에게 근사한 밥을 산 도라익은 택시를 타고 윌슨 감독의 집으로 갔다.
마당은 도라익의 집보다 작지만, 집은 오히려 더 컸다. 전문가를 고용했는지 작은 화원에 심은 나무들이 잘 다듬어져 있었다.
도라익은 살피는 걸 멈추고 빨간 초인종을 살짝 눌렀다.
'뭐지? 샤워라도 하고 계신가?'
도라익은 요즘 팀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감지했다. 그러나 사회생활 경험도 부족하고 프로로서의 연륜도 부족한 도라익은 도무지 뭐가 문젠지 찾아내지 못했다.
반칙으로 꽤 많은 벌금을 낸 선수들의 불만도 전달해야 하기에 윌슨 감독한테 신중하게 말을 꺼냈고, 윌슨은 저녁에 자기 집에서 보자고 했다.
그런데 정작 약속 시각이 되었는데도 윌슨은 문도 안 열어주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그때. 심장을 죄는 사이렌 소리가 크게 울리며 가깝게 다가왔다.
"진입로를 확보해."
윌슨 감독의 저택 앞에 멈춘 구급차에서 사람 여럿이 내렸다.
"무슨 일입니까?"
"도우? 팬입니다."
지시를 내리던 책임자가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왠지 신뢰감이 생기는 목소리에 도라익의 불안한 마음이 조금 가셨다.
"윌슨 감독은 3년 전에 심장 수술을 했습니다. 그리고 방금 심장에 부착한 기기가 위험 신호를 서버에 전달했습니다."
"위험한 상황인가요?"
"아직 모릅니다."
"대장, 초인종을 눌렀는데 반응이 없습니다."
"강제 진입해."
구급대원들이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간 후 창문을 부쉈다. 그리고 잠시 후 기절한 윌슨을 담가에 들어 밖으로 꺼냈다.
"위험한 상황인가요?"
구급대원 둘이 윌슨을 싣고 떠났다. 그리고 남은 대원들은 경찰에 연락했다. 창문을 부쉈기에 도둑이 들 위험이 있어 경찰이 오기 전까지 지키고 있어야 했다.
"생명이 위험하진 않습니다. 재수술이 필요한지는 의사가 결정할 일이고요."
"어느 병원으로 갔는지 알 수 있을까요?"
"결과가 나오려면 빨라도 내일 오후일 겁니다. 그러니 도우는 돌아가서 쉬는 게 좋겠습니다. 보호자로 등록된 구단 관계자들한테 이미 전화했으니 병원 쪽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윌슨은 3년 전에 수술을 받은 심장이 최근 스트레스를 받으며 문제가 생겼다. 구급대원 소견으론 심장 박동이 느려지며 뇌에 공급되는 혈액이 준 탓에 산소 부족으로 기절한 거라고 했다.
어쩔 바를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던 도라익은 경찰들이 오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클루카스, 감독님이 앰뷸런스에 실려 갔어."
"나도 방금 전화 받았다. 나보고 내일부터 1군으로 오라고 하더라고. 수석 코치가 임시 감독을 맡고 내가 수석 코치 역할을 할 거야."
"위험하진 않겠지?"
"도우. 믿는 종교가 있으면 미스터 윌슨을 위해 기도해. 그 이상의 뭔가를 하려고 하진 마."
도라익은 부처님이 예수를 믿는 미국인을 위해 자비를 베풀어줄지 걱정됐다.
- 작가의말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도라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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