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뭔데요?
최경호는 구단주가 준 벤틀리로 도라익을 시상식장 앞까지 태워 줬다.
"형은 같이 안 들어가?"
"난 구단 사람들이랑 약속 있어."
"이적 안 하는데 왜?"
"그래도 매정하게 안 만날 수 없잖아. 이적 안 하니까 우리 보지 말자고 말해?"
아직은 경험도 없고 명성도 수완도 부족하지만, 언젠간 도라익 말고 다른 선수도 맡게 될 거다. 그때를 대비해 미리 안면을 터놓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헤이, 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곱슬머리 브라질인이었다. 경기장에선 상대 숨통을 끊으려고 호시탐탐하는 재규어 같던 청년이 양복을 쫙 빼입으니 세상 물정 모르는 곱게 자란 도련님 같았다.
"베르딩요. 반가워."
"너 은퇴하고 배우 해도 되겠다. 얼굴만 잘생긴 줄 알았는데 핏도 좋아."
"너도 양복이 잘 어울려."
"근데 넌 여자친구 없어?"
베르딩요가 질문했다.
"응. 아직 여자 사귈 나이 안 됐어. 넌?"
"와이프가 임신하고 브라질에 돌아갔어."
대부분 선수는 가족 혹은 친구와 함께 왔다.
"도우, 혹시 맨유로 이적하는 겁니까?"
시상식장으로 함께 들어가는 둘을 보고 어떤 기자가 고함을 질렀다.
"아무 말도 하지 마. 긍정해도 부정해도 자기 멋대로 기사 쓸 거니까."
"말 안 해도 기사 쓸 거 같은데?"
"맨유로 이적하냐는 질문에 얼굴을 굳히고 묵묵부답."
베르딩요의 말에 도라익이 소리 내 크게 웃었다.
"여기 기자들도 그래?"
"브라질은 아예 소설을 써. 기자들 덕분에 난 애가 다섯 명이나 생겼다니까."
커다란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연미복을 입은 남자가 다가와 둘을 자리로 안내했다.
"시작하려면 멀었어. 배가 고프면 저기 가서 뭘 좀 먹어."
시상식장 한쪽에는 뷔페가 차려 있었다.
"어디 가?"
"옛 동료들 만나러."
베르딩요는 바르셀로나 선수들이 모인 곳으로 갔다. 바르사도 레알도 예전 같지 않다지만, 오늘 시상식에 초대된 양 팀 선수들로만 팀 하나 꾸려도 될 정도로 숫자가 많았다.
도라익의 스토크시티야 말할 것도 없고, 무리하여 베르딩요를 영입하며 세대교체 타이밍을 놓친 맨유도 다른 선수는 초대받지 못했다.
"헤이, 도우."
첼시의 미드필더 마이콩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마이콩 맞지?"
"그래. 경기장에서 마주친 적 없는데 알아봐 줘서 고마워."
"혼자 왔어?"
"아니. 우리 팀은 셋이야."
마지막 경기에 도라익의 활약으로 맨유가 패배하며 리그 우승을 거머쥔 첼시다. 그래선지 마이콩은 초면이나 다름없는 도라익한테 무척 친절했다.
"너 이번 겨울에 맨시티 가는 건 아니지?"
"응?"
"맨시티 구단주가 선수들 물갈이한다는 소문이 돌더라고."
31-32시즌 11라운드에 첼시가 홈에서 맨시티를 6:0으로 이겼다. 도라익과 스토크시티가 길을 못 찾아 헤매던 미로를 첼시는 힘으로 무너뜨린 것이다.
그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맨시티는 확실히 이겨야 할 팀에 비기거나 심지어 지기도 하며 몇 년 동안 투자한 보람을 못 느끼게 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FFP 걸려서 선수를 돈 주고 영입 못 하거든. 그래서 선수랑 선수 바꿔치기를 한단다. 주전 두세 명 주고 너랑 바꾼다는 소문 들었는데 아니야?"
주전급 풀백에 공격수면 도라익과 바꿔도 손해는 아니다. 페어린던이 진짜 리버풀로 이적한다면 자금 여유가 생겨 주급이 높은 선수 두세 명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
어차피 스토크시티가 스타 선수를 오래 잡아두는 건 불가능하기에 맨시티에서 데려온 선수는 여름 이적 시장에 팔고 가격도 실력도 적당한 선수를 영입하면 된다.
"난 아는 게 없어."
"이 거래의 핵심은 너야. 네가 싫다고 하면 구단이 아무리 하고 싶어도 안 되거든. 네가 아는 게 없으면 헛소문이라는 건데."
"왜 이런 소문에 그렇게 관심 가지는 거야?"
"겨울 이적시장의 결과에 따라 올해 챔피언이 바뀔 수 있거든. 지금은 맨유부터 맨시티까지 다섯 팀 모두 우승 가능성이 있어. 그 가능성을 키우고 죽이는 게 겨울 이적시장이야. 주장이라면 이런 부분도 신경 써야 한다고."
"도. 저 헛소리에 넘어가지 마."
어느새 돌아온 베르딩요가 끼어들었다. 마이콩도 베르딩요도 브라질 출신이지만, 마이콩은 현재 스페인 국가대표로 뛰고 있다.
그래서인지 리그 우승을 두고 다투는 사이여서인지 둘 사이 분위기가 부드럽지 않았다.
"선수는 그냥 경기만 열심히 뛰면 돼. 이적시장을 살피고 대응하는 건 구단이 할 일이야."
"베르딩요. 선배의 충고를 흘려듣는 건 여전하구나."
"충고랍시고 다른 선수 흔드는 버릇은 아직도 못 고쳤네?"
"다투지 마."
도라익이 말렸다.
"도움이 되는 말은 담고 아닌 말은 흘리면 돼. 다 큰 어른들이 유치하게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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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가 재밌기만 한 게 아니구나.'
아스널과 토트넘처럼 백 년 가까이 사이가 나쁜 구단이 있고, 리버풀과 맨유처럼 축구 이외의 것까지 얽혀서 사이가 나쁜 구단도 있다.
맨유와 맨시티 역시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없고 셰필드 지역 구단들은 서로 이적 협상도 안 할 정도로 날을 세운다.
그렇다고 아스널과 토트넘 선수들이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건 아니고 리버풀과 맨유도 일부 선수는 친분이 두텁다.
맨유와 첼시는 리그 우승을 경쟁하는 상대라는 걸 제외하면 딱히 대치되는 부분이 없다. 그런데 마이콩과 베르딩요가 서로 날을 세우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그다지 상쾌하지 않았다.
"미안해, 도."
마이콩이 떠나고 둘만 남자 베르딩요가 사과했다.
"내가 사과 들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맨유로 이적할 때 마이콩이 찾아와 조언을 해줬어. 같은 브라질 출신에 유럽에서 오래 뛰었으니까 곧이곧대로 들었지."
"설마 낚인 거야?"
"응. 그래서 시즌 초반에 엉망인 모습을 보였지. 아주 그럴듯해서 믿음이 가는 조언이었는데 조금씩 아닌 부분이 있었어. 그런 사소한 부분들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팀 동료들과 사이가 서먹했지."
"왜 그런대?"
"존 테리라고 들어본 적 있어?"
"아니. 내가 견문이 짧아서."
"옛날 첼시 주장이야. 센터백인데 팀을 꽉 잡고 감독도 쳐낼 정도로 파워가 강했어."
"마이콩도?"
"응. 첼시의 좋지 않은 전통이라고 할 수 있지. 선수끼리 끈끈한 건 장점이지만, 감독의 발언권이 극히 제한되는 팀이야."
도라익은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두 달 정도 고생했어. 후에 경기할 때 따졌는데 약을 올리더라고. 그때 알았지. 승리와 우승을 위해 뭐든 하는 야비한 인간이라는 걸."
뭔가 알지 말아야 할 걸 알게 된 기분이 들었다.
어른이 되기 싫은 아이가 성인식을 강제로 치른 느낌.
"시즌 초반 맨시티가 3연승으로 1위를 다투다가 잠깐 주춤했어. 그러다 다시 3연승으로 기세를 끌어올리고 있을 때 첼시를 만났지. 그리고 경기 11분 만에 맨시티의 센터백이 레드카드로 퇴장당하고 0:6으로 졌어. 그때 센터백을 도발해 카드를 받게 한 사람이 마이콩이야."
"우리 팀이랑 경기할 때는 얌전하던데?"
"당연하지. 프리미어리그에서 누가 스토크시티를 도발해. 예전보다 훨씬 점잖아졌다곤 하지만, 팀의 전통이라는 게 쉽게 바뀌진 않거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시상식이 시작됐다. 남자선수상은 베르딩요가 싫어하는 마이콩이 받았다.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는 공격수가 수상을 독점하다시피 하여 그 반발로 가끔 수비수나 키퍼한테 돌아가기도 하는데 이번엔 수비형 미드필더인 마이콩이었다.
베스트 11엔 베르딩요가 공격수 자리를 차지했다. 도라익 역시 포워드로 분류되었는데 득표수가 적어 벤치에도 들지 못했다.
골이야 꽤 넣었지만, 전반적인 플레이는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있어 투표권을 쥔 기자와 전문가들의 간택을 받지 못했다.
"푸스카스상, 라익 도. 축하합니다."
베르딩요가 가장 먼저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수상하러 앞으로 가는 길에 첼시와 바르셀로나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이 단체로 다가와 축하의 말을 건넸다.
"우선 이 상을 준 주최 측과 제 골에 투표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훌륭한 육체와 재능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하고 훈련할 때 수비수 역할을 공짜로 해준 라현이, 라연이, 라진이한테도 감사합니다. 라희한테도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고, 라유도 어서 보고 싶네요."
"국가대표로 발탁해주신 차 감독님, 대표팀 당시 많은 도움을 주신 최 코치님을 비롯한 스텝들, 기술과 경험을 아낌없이 전수해주신 선배님들 감사합니다."
"부족함이 많은 저와 선뜻 계약하고 출전 기회를 주고 주장이라는 중임까지 믿고 맡겨준 스토크시티 구단의 모든 스텝과 선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이번 겨울 저는 어디에도 이적하지 않고 시즌이 끝날 때까지 제 모든 힘을 스토크시티를 사랑하는 모두를 즐겁게 하는 데 쓰겠습니다."
박수가 터졌다.
"아. 그리고 저를 축구선수로 만들어주신 할아버지께 감사드리고, 저의 에이전트인 최경호 형님께도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잭, 네 덕분에 리그컵 우승할 수 있었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서 정말 기뻐."
수상 소감은 마친 도라익이 내려가려 했다.
"잠시만요. 도에게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사회자가 도라익을 멈춰 세웠다.
"지난 시즌 골든 보이 투표에서 겨우 7위를 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게 뭔데요?"
폭소가 터졌다.
- 작가의말
일찍 야생에 나와버린 맹수. 정글의 잔혹함을 깨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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