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소
리그가 5라운드 남은 상황에 A매치 데이가 끼어들었다. 스토크시티는 토미와 루이스와 페데리치 그리고 오창범과 맥자넷까지 다섯 명이 대표팀으로 불려갔다.
내친김에 구단에서도 선수들에게 이틀 휴가를 줬다.
도라익과 엘은 아들을 데리고 놀이동산에 갔다.
"여보, 그만 타고 가자."
아직 만으로 2살도 안 된 아들이 즐길 수 있는 기구는 몇 없었다. 대신 도라익이 온갖 놀이기구에 푹 빠져서 점심조차 거를 지경이었다.
"범퍼카 한 번만 더 타면 안 돼?"
도라익이 최대한 불쌍한 얼굴로 사정했다. 그러나 이미 사용 한도를 초과한 탓에 전혀 효과가 없었다.
"귀 잡혀서 갈래 아니면 그냥 곱게 따라올래?"
도라익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지상낙원과 작별했다.
#
"저기요."
식당에서 식사하는데 한국인이 접근했다.
"사인 한 장만 부탁해도 될까요?"
상대는 비밀 접선이라도 하는 듯 몸을 움츠리고 소리를 한껏 죽여 말했다.
"네. 괜찮습니다."
도라익이 즐거운 얼굴로 사인했다. 사인을 받은 청년은 곧 눈물을 떨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사진을 찍어도 되냐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럼요."
도라익이 한 사인을 들고 함께 사진까지 찍은 청년은 곧 떠나지 않았다.
"저기요. 그런데 소문이 진짜예요?"
"제가 인체 개조를 통해 뼈를 금속으로 바꿨다는 소문이요?"
"아니요. 축구협회에서 도라익 선수 등록을 말소했다는 소문이요. 협회에 등록되지 않아서 도라익 선수를 대표팀으로 못 부른 거라던데요."
"어디서 들은 건가요?"
"제가 자주 가는 게시판에 글이 잠깐 올라왔다가 사라졌거든요. 본 사람이 별로 없고 원글도 사라져서 크게 화제가 되진 않았는데, 진짜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아요."
#
에밀리아와 즐거운 데이트를 하던 최경호의 전화기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최경호는 다급히 전화를 받았다.
"라익아, 별일 없지?"
- 별일 있어. 방금 밥 먹다가 들었는데, 내 협회 선수 등록이 말소됐대. 나 다시는 대표팀 못 가나 봐.
최경호는 안도의 숨을 후 내 쉬었다.
"별일 아니네."
- 별일 아니라니. 월드컵 다시 참석 못 하는데.
"바보야. 다시 등록하면 되잖아."
- 그게 돼?
"운전면허도 취소당했다가 시험 통과하면 다시 주잖아."
- 잘못을 해서 면허 취소된 거면 다시 안 주는 게 맞지 않아?
"거기까진 내 알 바 아니고. 일단 넌 모른다고 해. 뮐러랑 상의하고 전화 줄게."
통화를 마친 최경호는 바로 뮐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 최경호를 에밀리아가 세상 귀엽다는 듯이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뮐러, 나야. 한국 축구협회에서 도우의 선수 등록을 말살했다는데, 사실인지 알아봐 줘. 그리고 어떻게 대응하는 게 맞는지 알려주고."
뮐러가 다시 전화한 건 약 50분 뒤였다.
- 사실이야. 사이트에서 확인했는데 도우 이름이 없어.
"다시 등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 그건 좀 더 기다려. 임원들이 회의하는 중이야.
"뭘 이런 걸 다 회의해?"
-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현재 도우의 영웅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있잖아. 이럴 땐 축협과 같은 갑의 겁박은 아주 훌륭한 스토리가 된단 말이야.
"뮐러. 너 예전엔 순수하고 좋았는데."
- 네가 순수해서 모두 순수하게 보인 거야. 난 예전부터 이랬어. 변한 건 너야.
#
원치 않게 놀이동산과 작별한 기억으로 조금 슬픈 가운데, 도라익은 기자의 인터뷰를 받았다.
다시 그라운드에 복귀한 감상과 상처를 공개하게 된 계기를 워밍업 삼아 입을 풀었다. 도라익은 기자의 질문에 솔직히 대답했다.
"그럼, 조금 민감한 주제로 옮기겠습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기자가 주제를 바꿨다.
"최근 믿기지 않는 소문을 들었고, 직접 진위를 확인했는데요. 한국 축구협회에서 도우의 선수 등록을 말살했네요."
영국 축구협회에는 등록되어 있기에 프리미어리그를 뛰는 덴 아무 문제도 없다.
"진짜요? 이유가 뭔가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도라익이 펄쩍 뛰었다.
"도우는 전혀 몰랐던 건가요?"
"네. 어떤 언질도 받지 못했습니다."
"축구협회의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도라익은 성이 잔뜩 치밀었다. 복귀를 위해 겪었던 가슴을 에고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떠올리니 이가 절로 갈렸다.
"쓸모없는 병신은 필요 없다는 뜻으로 해석되네요."
울컥한 마음에 도라익은 필터를 거치지 않고 말했다.
"토사구팽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냥감이 없으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뜻이거든요. 아무리 사냥감이 없어도 귀여운 개를 죽일 필요까지 있겠나 싶었는데,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인제 알 거 같네요."
독일 기자는 토사구팽이라는 말에 별표를 다섯 개 그렸다.
"여기 오는 길에 그간 도우의 모든 인터뷰를 확인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축구협회와 사이가 틀어질 만한 일은 없었거든요. 더구나 지난 월드컵에서 실버 슈즈를 타서 국가의 위신을 올린 장본인이잖아요."
"음. 예전에 협회장이 친구들 모임으로 절 불렀는데 거절했거든요. 혹시 그 일 때문이 아닐까요?"
"친구들이 모이는 곳에 도우를 불렀다구요?"
"네. 저는 친구들 만날 때 협회장 안 부르거든요. 그래서 안 갔는데, 그것 때문에 앙심을 품은 게 아닐까요?"
최경호와 뮐러가 서로 부둥켜안고 무음으로 함성을 질렀다. 미리 준비한 대본을 보여주지 않은 게 신의 한 수였다.
"설마 그것 때문일까요?"
"그게 아니면 제가 데뷔전에 일본을 4:3으로 역전한 다음 노래를 불렀거든요. 그땐 몰랐는데, 그 노래가 정치색이 있대요. 할아버지한테 들었는데, 친일파 청산이 안 돼서 한국보다 일본을 더 좋아하는 한국인이 꽤 있대요. 협회장도 그런 게 아닐까요?"
주변 시선만 아니었다면 최경호와 뮐러는 키스했을지도 모른다. 도라익의 대답은 둘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따로 한국 축구협회에 물어보도록 하죠."
인터뷰가 산으로 가는 느낌을 받은 기자가 노련하게 운전대를 틀었다.
"대신 이건 꼭 묻고 싶네요. 혹시 다시 협회에 등록된다면 대표팀을 위해 경기를 뛸 의향이 있나요?"
"그럼요. 국기를 가슴에 달고 모든 국민의 응원을 받는 건 즐겁고도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요."
도라익이 풀 죽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협회장이 마음에 안 든다고 또 제 등록을 말소하면 어떡하죠?"
#
└ 이게 나라냐!
└ 양궁 협회에서 다른 협회 접수하면 안 되나?
└ 협회장 외가 친일파 집안이더라.
└ 아시안컵도 결승에서 일본 만날 예정이었으면 항소 안 해서 도라익 출전 정지 맞게 했을걸?
└ 친구 모이는데 선수 왜 불러? 게이냐?
└ 협회장 게이 유력. 마누라랑 별거한 지 10년 넘음.
└ 기껏 국위선양했더니 부상 좀 입었다고 바로 내쳐?
└ 이순신 장군 스토리가 픽션이 아니라는 생생한 증거다.
└ 김연아 선수 생각나네. 국위선양 기껏 해놨더니 국내에선 상 하나 제대로 안 주고.
└ 근데 협회장은 아직도 자진사퇴 안 했네?
└ 축협에 일인시위 간다. 같이 갈 사람.
└ 일인시위면 혼자 가야지.
"이번 사태에 관해 축협이 어서 합리적인 해석을 내놓고, 그렇지 못할 경우 협회장을 비롯한 관계자 전부 자진사퇴할 것을 촉구합니다."
"여러분, 나라가 잘못 가고 있습니다. 제가 바로잡겠습니다. 유권자 여러분을 대표해 축협 협회장을 비롯한 관련자 전부 사퇴할 것을 명합니다."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적인 문제고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잘못한 개인을 벌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시스템을 고치고 문제를 해결하겠습니다."
2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탓에 대권 주자들이 앞다투어 협회를 질책했다.
"내가 병신들을 키웠어."
협회장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한때 수족처럼 여기던 부하들을 바라봤다.
"쓸데없는 짓을 해서 날 벼랑으로 밀어?"
협회장의 거듭된 추궁에도 누구 하나 자기 짓이라고 고백하지 않았다. 어차피 협회장은 지는 해에 쓰러진 성벽이다.
협회장과 함께 쓸려나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좋아. 이번 일은 내가 다 짊어지고 자진사퇴한다."
"용단에 감사드립니다."
"회장님의 온정을 잊지 않겠습니다."
"너희라도 남아서 협회를 지켜야지. 무식한 선출들이 아마추어식으로 운영해 협회를 무너뜨리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해라."
협회장 자리가 공석이 되면 경선을 치르게 된다. 협회 임원들 투표가 꽤 높은 비율을 차지하기에 협회장도 안면을 몰수하고 이들을 완전히 등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음 회장으로는 내가 훌륭한 사람 추천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내심 협회장 자리를 탐냈던 몇몇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로 얼굴을 펴고 협회장에게 아부했다.
"아무렴요. 회장님 추천이면 어련하시겠습니까."
#
"도라익 선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여섯 개 방송사에서 영국으로 취재를 왔다. 서로 먼저 한다고 싸우던 끝에 동시에 인터뷰하기로 합의를 봤다.
"도라익 선수의 등록이 말소된 책임으로 협회장이 자진사퇴했는데요. 소감 부탁드립니다."
"스토크시티에서 시즌을 운영하는 건 감독 책임이고요. 선수를 영입하는 건 스카우트 팀이 감독에게 협조해서 진행합니다. 경기를 뛰는 건 선수들이 직접 하죠. 구단주가 일일이 간섭하진 않습니다."
"협회장이 사퇴한 거로 부족하단 말씀인가요?"
"협회장 말고 다른 사람이 사퇴하면 그 사람이 한 짓이라고 오해를 살 수 있잖아요."
"그건 그렇죠."
"그러니까 일 제대로 못 한 사람들 다 그만두면 안 될까요? 괜히 안 한 짓을 했다고 오해를 사지 않아도 되고, 협회나 대한민국 축구에도 좋은 일이잖아요."
무심코 던진 돌멩이가 개구리를, 아니, 개구라를 일삼는 협회의 버러지들을 맞혔다.
"협회의 개혁을 촉구하는 건가요?"
"그래야지 않겠어요? 고명준 선배와 같은 훌륭한 선수가 오라는 팀이 없었다잖아요. 그때 명준 선배 대신 뽑힌 선수는 서른도 안 돼서 은퇴했대요."
"도라익 선수가 당한 부상 때문에 등록을 말소했다는 협회의 해석에 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박창식 선배도 큰 부상이 있었는데 등록을 말소하지 않았잖아요. 분명히 다른 이유라고 생각해요."
"도라익 선수가 생각하기에 협회장은 어떤 사람이 맡는 게 옳나요?"
"제가 뭘 알겠어요. 그저 차 감독님처럼 나라를 사랑하고 축구를 사랑하는 인품이 훌륭한 분이었으면 좋겠어요."
- 작가의말
아는 게 없는 도라익.
Commen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