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략 플레이
- 한국팀, 반칙을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 이제 2분인데 벌써 멕시코에 프리킥 3개나 줬습니다.
셋 다 골대에 전혀 위협이 안 되는 위치의 프리킥이다. 그러나 고작 2분인데 벌써 반칙을 세 번이나 했다는 건 형편없이 밀리고 있다는 뜻이다.
- 돌파하는 선수를 몸으로 막고, 유니폼 당기고, 다리를 걸고. 굳이 저 위치에서 저런 반칙으로 상대 공격을 방해해야 하나 싶네요.
- 몸놀림을 보면 긴장한 것 같진 않네요. 아무래도 투지가 넘쳐서 그런 거 같습니다.
한국은 박창식을 앞에 두고 도라익을 미드필더처럼 위치를 내려 수비에 전념케 했다. 멕시코는 수비수 두 명만 남기고 남은 선수 모두 중앙선을 넘어 공격에 투입했다.
그런 상황에서 연속으로 프리킥을 얻자 멕시코의 사기가 부쩍 올랐다.
- 경기 5분인데 벌써 반칙이 7번입니다. 처음보단 조심하고 있지만, 여전히 반칙이 많습니다.
- 차 감독님이나 도라익 선수가 반칙 자제를 요구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대로 경기가 흐르면 전반전에 옐로카드 서너 개는 나올 거 같은데요.
한국팀의 플레이에 변화가 생긴 건 전반전 7분 정도였다.
공을 빼앗은 한국팀이 라인을 빠르게 올렸다.
- 멕시코가 반칙했습니다.
- 첫 프리킥인데 골대랑 50미터 거리여서 의미가 없네요.
프리킥을 얻은 한국팀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땅볼을 굴려 공을 도라익한테 줬다. 공을 잡은 도라익은 바로 드리블로 골대를 향해 직진했다.
- 반칙입니다.
- 35미터면 슈팅해도 괜찮은 위치죠?
그러나 한국팀은 슈팅 대신 노마크로 있는 도라익에게 땅볼로 패스했다.
프리킥은 수비 측 선수가 반드시 공과 9.15m 거리 두기를 실천해야 한다. 그렇기에 공과 6m 정도 거리를 둔 도라익에게 마킹을 붙일 수 없다.
공을 잡은 도라익이 또 드리블로 밀고 들어갔다. 멕시코 선수 둘이 협동 수비를 했으나, 결국 정상 수비로 도라익을 막지 못하고 반칙했다.
골대와 26m 거리의 직접 프리킥이 선언되었다. 도라익과 오창범이 공 앞에 섰다.
오창범이 본인이 찰 것처럼 고함으로 다른 선수들 위치를 지정했다. 도라익은 차분하게 서서 구경만 했다.
주심의 휘슬이 울리자 오창범이 산에서 사냥하러 내려 온 범처럼 기세 좋게 달려가 공을 강하게 찼다.
그간 오창범은 킥력이 약한 단점 때문에 낮고 평평한 크로스를 올리는 연습을 자주 했고, 꽤 성과를 보였다.
그런데 긴장한 나머지 프리킥도 그런 식으로 찼다. 발끝을 조금 더 세워서 공을 높이 차야 하는데, 긴장으로 크로스 올리는 방식으로 공을 찬 것이다.
그 탓에 오창범의 슈팅은 점프한 멕시코 선수의 머리에 맞아 옆으로 흘렀다.
그때, 박창식이 움직였다.
왼발인 이혁신이 멕시코 키퍼의 왼쪽에 있는 포스트로, 박창식이 오른쪽 포스트로 달리기로 했다.
그런데 공이 멕시코 선수의 머리에 맞는 바람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박창식 근처로 흘렀다.
박창식은 급정지하며 왼발에 대부분 체중을 싣고 오른발을 뒤로 뻗어 바닥에서 튀는 공을 쓱 끌어왔다.
마치 갈고리를 쓰는 것처럼 위화감이 전혀 없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급히 달리다가 급정지하고 또 공이 다른 곳으로 안 튀게 하려고 조심스럽게 끄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어느새 멕시코의 3번이 빠르게 달려왔다.
'페널티킥 유도하자.'
박창식은 공을 살짝 밖으로 밀어낸 후 몸으로 멕시코의 3번을 막으며 바닥에 넘어질 준비를 했다.
그런데 신체 능력이 뛰어나고 경험도 풍부한 멕시코의 3번은 박창식에게 접근하며 속도를 급격히 줄였다. 신체 접촉은 있지만, 충격은 거의 없었다.
웬만하면 충돌하는 순간 몸을 잔디에 던지려 했던 박창식의 머리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이대로 넘어지면 오히려 박창식이 옐로카드를 받는다.
"형."
그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먹구름이 가득한 가운데 한 줄기 햇살을 본 감동을 느끼며 박창식은 아무 생각 없이 오른발을 뻗어 공을 밀었다.
질풍같이 달려 온 도라익이 잔발로 빠르게 스텝을 조정한 후, 오른발로 강한 슛을 때렸다.
- 골! 골! 골! 고오오오오올!
강철민과 박만호가 고음 대결을 펼쳤다. 옆 부스에 있던 다른 나라 해설들이 그 장면을 보고 소리 내 웃었다.
골을 넣은 도라익이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세리머니를 자제했다. 그러더니 손가락 하나 들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골을 더 넣겠다는 예고 세리머니였다.
- 자,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경기 초반에 반칙했던 건 전술 같습니다.
- 저희야 늘 이제 와서 얘기하죠. 무당이나 점쟁이는 아니니깐요.
- 한국팀 최강의 무기는 도라익입니다. 이건 외계인들도 인정하는 문제죠.
- 그렇습니다.
- 전쟁에서 이기려면 최강의 무기가 최대의 살상력을 보여야 합니다. 군대 나온 분이라면 다 아는 상식이죠.
- 그럼요. 취사병이었던 저도 아는 얘깁니다.
- 한국팀은 경기 초반에 일부러 라인을 내리고 반칙을 일관했습니다. 웬만큼 관대한 주심도 같은 반칙을 연속 보면 짜증 나서 호각을 불게 되죠. 그렇게 한국팀은 주심의 판정 기준을 조정했습니다.
- 만화 같은 얘기네요.
- 도라익 선수가 걸어 온 여정 자체가 만화보다 더 만화 같은데요.
패스워크는 멕시코가 우위여서 한국팀은 도라익과 이혁신 그리고 오창범의 드리블로 돌파구를 만들어야 하고, 개인 돌파에 더 치중할 수밖에 없는 한국팀엔 반칙을 쉽게 선언하는 주심이 유리하다.
주심의 반칙 기준을 한국팀에 유리하게 가져오기 위해서 한국팀은 경기 초반에 안 해도 될 반칙으로 주심의 짜증을 유발했다.
그러다 주심의 반칙 판정 기준이 한국팀에 유리하다는 판단이 들자 바로 라인을 올려 도라익의 돌파로 멕시코의 문을 강하게 두드렸다.
한국팀의 골은 비록 의도한 바가 아니었지만, 순전히 운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다.
- 이번 골의 의미는 그냥 1골이 아닙니다. 프리킥을 오창범 선수가 찬 것 때문에 멕시코는 프리킥 수비를 할 때 머리가 복잡할 겁니다.
첫 프리킥으로 골을 만들 생각은 직접 차는 오창범조차 별 기대가 없었다. 그저 오창범이 차는 거로 멕시코 선수들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려던 것뿐이었다.
- 경기 재개합니다.
- 도라익 선수와 박창식 선수가 위치를 바꿨네요?
- 한국팀이 라인을 내리고 도라익을 앞세워 반격을 도모합니다.
한국팀의 변화는 그뿐이 아니었다.
- 잠시만요. 오창범 선수가 자타를 단독 마킹하는 거 같은데요?
스토크시티에서 수비를 제일 잘하는 선수를 뽑으라면 당연히 리 그레고리다. 오창범과 동갑인 이 선수는 순수하게 수비 능력 하나로 프리미어리그 팀인 스토크시티의 일원이 되었다.
위치 감각만 평균 수준이 됐다면 수비 잘하는 풀백으로 써먹어도 되는데, 아쉽게도 훈련으로도 극복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오버래핑과 복귀 타이밍을 잘 몰라도 위치 선정은 괜찮은 오창범과 수비 기술이 뛰어난 그레고리는 서로 부족한 부분을 가르쳤다.
덕분에 오창범의 단독 마킹은 10번에게 꽤 큰 곤혹을 줬다.
완전히 묶인 건 아니지만, 공격의 핵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자 멕시코의 패스워크도 버벅거렸다.
오창범이 비운 자리는 오른쪽 윙으로 출전한 선수가 차지했다. 한국팀은 양쪽 윙은 물론이고 도라익 이전에 부동의 포워드 선발이었던 박창식마저 수비를 꽤 잘했다.
- 도라익 선수 전후좌우로 계속 움직입니다.
- 단순히 상대 체력을 빼려고 그러는 건 아닌 거 같은데요.
- 네. 공의 위치에 따라 반격하기 가장 좋은 위치를 잡는 거 같습니다. 선수마다 킥력이 다르기에 공을 잡고 찰 선수가 누군지에 따라 잡아야 할 위치가 다르죠.
도라익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덕에 공의 소유권을 지킨 도라익은 순발력으로 자신을 마킹하는 3번을 잠깐 따돌렸다.
속도는 빨라도 순발력은 도라익에 미치지 못한 콘카는 아주 짧은 순간 도라익을 놓쳤다. 그 틈에 도라익은 멕시코 골대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다른 선수들 것과 달리 속도가 엄청 빠른 플리플랩이 연속 펼쳐졌다. 그러나 콘카는 미동도 없었다. 괜히 반응하면 순발력이 뛰어난 도라익에게 돌파당할 것을 알기에 더없이 집중하면서 도라익이 진짜로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그때, 도라익이 공을 톡 밀어 콘카의 가랑이 사이로 찌르고 앞으로 달려 콘카와 몸을 부딪혔다.
주심이 휘슬을 불어 콘카의 진로 방해 반칙을 선언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한 콘카로선 조금 억울했지만, 다른 주심이어도 수비 측 반칙을 선언했을 것이다.
삐빅!
반칙이 선언되자마자 도라익이 앞으로 달렸고, 어느새 달려온 고명준이 프리킥을 찼다. 콘카는 몸을 돌려 도라익을 쫓기엔 이미 늦었다는 걸 알기에 공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고명준이 찬 공을 건드려 속공을 방해했다.
- 콘카 선수, 옐로카드입니다.
- 아직 전반전이 반도 안 갔거든요. 도라익 선수를 경기 내내 마킹해야 하는 콘카인데, 옐로카드는 치명적입니다.
한국팀이 라인을 확 올렸다. 대부분 선수의 개인 능력이 멕시코보다 딸리는 한국이기에 수비진부터 공격진까지 최대한 압축해야 한다.
그래야 개인 능력이 부족한 약점을 팀워크로 덮을 수 있다.
- 도라익 선수 드리블합니다.
한국은 도라익이 공을 잡고 돌파하는 거로 라인을 올렸다. 그러나 멕시코가 도라익에게 3명 투입하면 바로 패스로 공을 빼돌렸다.
- 멕시코 선수들 머리가 아플 겁니다.
- 운이 안 좋아서였지만, 프리킥으로 실점한 기억 때문에 위험한 지역에선 반칙을 자제해야 하거든요.
- 덕분에 이혁신 선수와 오창범 선수의 드리블도 꽤 먹힙니다.
이혁신이나 오창범에게 선수 2명을 붙인다는 건, 2번 혹은 3번의 패스로 공이 도라익 발밑에 갈 때 투입할 병력이 부족해진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이혁신이나 오창범은 일대일로 수비할 수밖에 없고, 반칙도 조심해야 했다.
덕분에 한국팀은 도라익의 중앙, 이혁신의 왼쪽, 오창범의 오른쪽 모두 원활하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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