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승전
2031년 1월 12일.
약 12억이 넘은 사람이 제20회 아시안컵 결승전을 시청했다.
- 지난 경기 이후 축하 메시지를 그렇게 많이 받으셨다면서요?
- 네. 제 지갑 사정을 아시는 분들이 이발비 아꼈다고 축하 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항간에 제가 한국팀 승리에 1억 베팅했다는 소문이 돌던데, 저 그렇게 큰돈 없습니다.
- 그 일억이 머리카락 개수를 말하는 건데요.
- 이런 나쁜 사람들 같으니라고.
강철민과 박만호가 유쾌하게 시작을 열었다. 지난 중계에서 도라익 관련 정보를 단독으로 푼 덕분에 시청률이 경쟁사보다 3%나 높았고 오늘도 시작부터 시청률이 쭉쭉 치솟았다.
- 오늘 도라익 선수가 선발로 출전하는데요. 우레이 감독이 말한 약점이 도대체 뭘까요?
- 이틀 전 갓 16살 된 어린 선수입니다. 약점보다 장점을 찾아야 할 나이죠. 도라익 선수한테 약점이 많다고 말하는 건 7살짜리 제 아들보고 논리적 허점이 다수 존재한다고 지적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 강 해설은 아들하고 말싸움하면 늘 지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 가족끼리는 논리가 안 통하더군요.
- 전통적으로 한국은 중국에 강했는데요. 10년에 한 번 진다는 말이 있을 정돕니다.
- 공교롭게도 2년 전에 한 번 졌으니까 오늘은 승리 확률이 100% 되는 건가요?
- 오늘의 승패 관건은 공격이 아닌 수비에 있습니다. 중국팀이 공격력 하나는 확실합니다.
중국팀이 결승에 진출하는 바람에 AFC 아시안컵 결승은 월드컵 부럽지 않았다. 월드컵도 10억 관람 경기는 몇 개 안 된다. 덕분에 해설자들도 신났다. 중국에서 하는 생중계를 볼 형편이 안 되는 해외 시청자들이 한국 생중계로 몰려왔다.
- 어제 대표팀에 찾아가 석고대죄하여 머리를 조아린 덕분에 작은 정보를 캐냈습니다.
- 어떤 정보인데 해설 파트너인 저한테까지 비밀로 한 건가요?
- 곧 유럽 빅리그에서 도라익 선수가 활약하는 모습을 TV로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입니다.
- 공중파에서 보나요 케이블에서 보나요?
- 거기까진 아직. 제가 심은 첩자가 화장실에 잠복하여 귀로 도청한 내용입니다. 도라익 선수의 주리를 틀었지만, 결국 입을 열지 못했답니다.
"형은 뭐 먹고 키가 컸어요?"
"글쎄. 너 몇 살이야?"
"열 살이요."
도라익은 대기 통로에서 플레이어 에스코트를 맡은 아이와 대화했다.
"형은 14살 때 키가 16센티나 자랐어. 너무 아파서 두 달이나 운동도 쉬었거든. 여기 무릎 위에 흰 줄 보이지? 키가 너무 빨리 커서 생긴 거야."
"나도 형만큼 키가 클까요?"
"키 커서 뭐 하려고?"
"배구 선수가 제 꿈이에요."
"형이 부처님께 소원 빌어줄게."
"저 천주굔데요."
"야, 넌 안 떨려?"
도라익과 마찬가지로 선발 출전한 이혁신이 몸을 움츠린 채 질문했다.
"감독님 시킨 대로 하면 되는데 떨리긴 뭐가 떨려요."
일본전 경기 후 인터뷰 때 떨었던 건 다른 사람이라도 되는지 도라익이 큰소리를 뻥뻥 쳤다.
"근데 너 에이전트 있다며?"
"있는데 실력이 별로예요. 원래 가수 기획사 하던 형이거든요."
도라익은 최경호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기 싫었다. 어디에 내놔도 부끄러운 형이어서 가능한 자신만 알고 싶었다.
"그럼 에이전트 바꿀 거야?"
"아니요. 유럽에 있는 동안 모든 비용을 형이 댔어요. 여기 오는 비행기표도 5백만 원이 넘는데 그 형이 냈어요."
"더 좋은 에이전트 만나 성공해서 갚으면 되지."
"제가 아직 에이전트 가릴 실력이 아니라서요."
그때 심판들이 양 팀 선수 사이로 지나갔다. 이혁신은 대화를 멈추고 마음을 다스렸다.
AFC 깃발과 페어플레이 깃발 그리고 인종차별 반대 깃발을 앞세우고 그라운드로 나갔다. 심판이 그라운드에 진입하기 전에 받침대에 놓인 공을 손에 들었다.
공이 놓였던 받침대는 찬란하게 빛나는 우승컵이었다. 도라익은 우승컵을 들고 튀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쭉 도열해 양국 국가를 연주한 후 악수하고 동전을 던져 선공을 골랐다. 도라익은 대기 통로에 있을 때부터 궁금했지만, 중국팀 선수들한테 실례가 될까 봐 꾹 참았던 질문을 이혁신한테 했다.
"형. 결승 상대가 중국팀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응. 남미랑 유럽 애들은 귀화 선수야."
도라익은 자세히 셌다. 동양인으로 보이는 얼굴이 다섯이고 서양인으로 보이는 얼굴이 여섯이다. 프로필의 작은 사진으로 확인할 때는 그저 혼혈이거나 머리를 염색한 거려니 했는데, 직접 눈으로 보니 절대 동양인이 아니었다.
"저래두 돼요?"
"응. 옛날에 미국은 아예 영국인으로 팀을 꾸려 월드컵에 참가했어."
대체 선수로 중도에 차출되는 바람에 자세한 교육을 받지 못한 도라익한텐 중국팀 상황이 놀랍고 신기하기만 했다.
'누가 미리 좀 얘기라도 해주지. 놀랐잖아.'
삑 소리와 함께 중국팀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도라익과 이혁신은 먹이를 본 맹수처럼 앞으로 달려갔다.
[중국팀의 약점은 공격과 수비의 불균형에 있다.]
차 감독이 했던 말이 귓가에 생생하게 울렸다.
'양쪽 풀백이랑 키퍼랑 오른쪽 중앙수비수가 중국인이고, 미드필더 중 한 명이 중국인이구나.'
일본을 상대할 때와 달리, 이혁신과 도라익은 중국 수비수들이 공을 앞으로 차는 걸 방해했다. 자기들끼리 패스를 주고받는 건 굳이 막지 않았다.
상대는 골키퍼까지 다섯이서 공을 돌리고 한국팀은 이혁신과 도라익이 압박했다. 아무리 돌려도 더 많은 한국 선수가 오지 않자 골키퍼가 길게 뻥 찼다.
중국팀의 좌측 윙을 맡은 에릭슨이 가슴으로 공을 트래핑했다. 한국팀 윙이 마크하고 풀백이 백업했다.
에릭슨이 공을 부드럽게 굴리며 개인기로 돌파하려고 했지만, 경기가 갓 시작한 시점에 누구나 체력과 투지가 만땅이다. 공은 수비수의 다리에 맞고 라인 밖으로 나갔다.
중국팀 왼쪽 풀백이 달려가서 스로인 공을 던졌다. 그러나 두 중앙수비수와 오른쪽 풀백은 라인을 올리지 않았다.
[중국팀은 미드필드를 버리는 전술이다.]
축구는 공격보다 수비가 쉬운 스포츠다. 열 번의 공방이 있다면 최소 아홉 번은 수비가 승리한다.
중국팀은 선수들의 체력이 부족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원을 버리고 수비와 공격이 따로 노는 전술을 취했다.
실제로 중국 최고의 리그인 CSL의 강팀들 모두 이러한 전술을 사용한다.
진짜 강팀이나 일본처럼 패스워크가 뛰어난 팀을 만나면 쉽게 무너지지만, 한국은 둘 다 해당하지 않는다. 언론이 공공연하게 역대 최약체 대표팀이라고 지적하듯이, 개인 기량도 팀 전술도 부족한 면이 많았다.
이는 K리그의 몰락으로 모든 위치에 좋은 선수를 뽑을 수 없는 탓이다. 특히 미드필더에 부족함이 많아 중국의 전술이 잘 먹혔다.
[가장 큰 약점은 저들의 단합이다. 수비수들을 괴롭혀라.]
기본기가 부족한 중국 수비수들은 공을 잡는 상황을 싫어한다. 특히 경기에서 지면 늘 누구 탓인지 며칠씩 팬과 언론들이 떠들어대기에 느끼는 압박감이 상상 이상이다.
오버래핑했다가 복귀하지 못해 실점을 초래한 풀백이 그 경기를 끝으로 대표팀을 강제 은퇴한 일도 있었다.
- 어떤 의미에선 결승전답습니다.
- 중국팀도 조심스럽지만, 한국팀 역시 너무 웅크리는 느낌입니다.
-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관객이나 해설자 입장에선 일본전 같은 경기가 최고죠.
한국은 둘이 상대 진영에서 압박하고 여덟이 수비한다. 중국은 네 수비수 중 하나만 공격에 가담하고 남은 셋은 중앙선을 아예 넘지도 않는다.
그렇게 약 20분 무미건조한 경기가 지속했다. 다행히 중국과 한국 관객들이 번갈아 노래와 구호로 응원한 덕분에 오디오는 심심하지 않았다.
도라익은 이혁신이 뒷짐을 쥔 걸 확인하고 한쪽 무릎을 꿇고 신발 끈을 정리하는 척했다. 전술 이해가 낮은 도라익을 위해 차 감독이 어렵게 짜낸 고육지책이다. 준비한 전술을 사용할 상황이 되면 이혁신이 도라익한테 신호를 주기로 했다.
자신뿐 아니라 도라익까지 신경 써야 하는 이혁신이야 죽을 맛이겠지만, 이혁신보다 빠르고 힘도 센 도라익이 차 감독의 전술대로 움직여주면 팀엔 좋은 일이다.
도라익이 딴짓을 하자 중국 수비수도 팔을 쭉 뻗고 스트레칭했다. 그때 도라익이 총소리를 들은 토끼처럼 팔짝 앞으로 뛰었다.
깜짝 놀란 수비수가 황급히 도라익을 쫓았다.
그에 맞춰 이혁신이 오른쪽으로 달렸다. 마침 공격을 지원하러 간 왼쪽 풀백 때문에 비어 있었다.
후방에서 공을 돌리던 한국팀 선수들이 재빨리 라인을 올렸다. 풀백이 무턱대고 도라익을 쫓아간 바람에 중국팀 수비 라인이 무너졌다.
그런 상황에서 속도가 빠른 이혁신을 그대로 둘 수 없어 중앙수비수 중 하나가 쫓아갔고, 남은 중앙수비수는 둘 중 하나를 지원하려고 역시 물러났다.
한국 선수들은 간결한 패스로 순식간에 중앙선을 넘어섰다. 수비와 공격을 이어주는 두 명의 중국 미드필더가 애써 저지하려 했지만, 공간이 너무 컸다.
중국팀은 공격수들의 복귀가 늦은 바람에 잠깐 엄청난 수적 열세에 처했다. 안타깝게도 중국팀의 반격이 두려워 신중하게 대처하다 보니 득점으로 이어가진 못하고 코너킥만 얻었다.
정성껏 준비한 전술 하나가 허망하게 날아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공격수들이 무턱대고 라인을 내린 수비수들을 책망하고 수비수들이 빠르게 돌아오지 않은 공격수들을 욕하며 중국팀이 분열 양상을 보였다.
중국은 국산을 고집하여 우레이를 감독 자리에 앉힌 탓에 귀화 선수들을 다스리는 데 애먹고 있었다.
- 작가의말
바르샤에 골을 넣은 우레이를 중국팀 감독으로 취임시켰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우레이의 상징성 때문이라도 언젠간 대표팀 감독 자리에 한 번은 앉힐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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