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4월 27일.
스토크시티가 홈에서 뉴캐슬을 맞이했다. 경기가 시작하기 5분 전에 엘은 TV를 끄고 전화기도 껐다.
"도우는 바르고 훌륭한 사람입니다. 제발 다치지 않게 보살펴 주세요."
어릴 때 외할머니를 따라 성당에 잠깐 다니긴 했지만, 재미가 없어서 어떻게든 핑계를 대고 미사에 빠졌던 엘이다.
지금도 믿음이 그다지 깊지 않지만, 신이라면 마음이 넓은 거란 기대로 최대한 진심을 담아 도라익을 위해 기도했다.
"엄마, 꾸꾸, 꾸꾸."
꾸꾸는 최근 아기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만화 캐릭터다.
"안돼. 지금은 안돼."
엘의 진지한 표정에 아들이 풀 죽은 얼굴로 돌아섰다.
'모르는 게 약이야.'
엘은 도라익이 다치는 게 너무 무서웠다. 그러나 도라익이 축구를 향한 열정을 알기에 단 한 번도 축구 그만두자고 설득한 적이 없다.
도라익이 복귀한 후 스토크시티의 경기를 지켜보다가도 도라익이 교체로 출전하면 바로 TV를 끄고 전화기도 끈 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오늘은 선발 출전이기에 경기 전부터 TV를 끄고 전원까지 뽑았다.
만화를 보려는 요청을 매몰차게 거절한 것도, 장난꾸러기 아들이 리모컨을 돌리다가 우연히라도 스포츠 채널이 켜질까 봐 겁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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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지금 뭐 해?"
구단주 부인이 질문했다.
"기도."
구단주가 꾹 감았던 눈을 뜨며 대답했다.
"무슨 기도?"
"도우가 전반전에 득점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구단주는 주말마다 교회에 나가고 성금도 꼬박꼬박하는 꽤 신실한 신자다. 그러나 구단주는 신실한 이미지가 돈 버는 데 도움이 되어서 의무적으로 하는 거지 진심으로 신을 믿지는 않았다.
그걸 잘 아는 구단주 부인이기에 구단주의 기도를 이상하게 여겼다.
"당신 혹시 갱년기 아니야? 병원 예약할 테니 검사 좀 받아."
구단주는 간절한 나머지 부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경기장 상황에만 집중했다.
마침 도라익이 공을 잡았다. 뉴캐슬의 세 센터백 중 두 명이 도라익을 수비했다. 대신 수미 한 명이 위치를 내려 두 센터백의 공백을 메꿨고, 왼쪽 풀백도 위치를 안으로 좁혔다.
도라익은 왼쪽의 토미한테 패스했다.
'그냥 슛해서 골 넣었어야지.'
구단을 운영하지만, 정작 축구는 잘 모르는 구단주가 아쉬움에 몸서리쳤다.
패스를 받은 토미는 바로 왼발로 긴 패스를 때려 오버래핑한 오창범을 찾았다. 공을 안정적으로 잡은 오창범은 고개를 들어 문전 상황을 체크했다.
안으로 좁혔던 풀백이 크로스를 방해하러 밖으로 달렸고, 센터백 두 명을 단 도라익이 풀백이 있던 자리로 달렸다.
두 센터백의 공백을 메꿨던 수미는 어정쩡하게 눈치를 살피며 움직이지 못했다.
덕분에 도라익이 있던 골대 정면에서 25미터 정도 되는 곳에 공백이 생겼다. 오창범은 강한 땅볼 패스로 공을 공백 지역에 보냈다.
풀백이 비운 자리로 달리던 도라익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오창범의 패스 경로로 이동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공을 건드리지 않고 헛다리 한 번만 짚었다.
도라익의 헛다리에 멈칫한 바람에 작심하고 몸을 던졌으면 파괴할 수도 있었던 오창범의 패스를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다.
'좀 더 세게 차야 했어.'
도라익의 도움에 감사하며 오창범은 자신의 실책을 솔직히 인정했다.
공간에 나타나 공을 잡은 건 발제르였다.
신출귀몰까지는 아니어도 늘 좋은 위치에 느닷없이 나타나는 발제르다. 덕분에 최근 발제르 찾기라는 놀이도 생겨났다.
크게 유행한 건 아니지만, 스토크시티 경기 화면에서 30초를 골라 발제르의 모습이 가장 오래 보인 사람이 승리하는 놀이다.
오창범의 크로스를 걱정해 센터백 위치를 잡고 있던 수미가 늦지 않게 달려 나와 발제르를 수비했다.
발제르는 슈팅 경로가 꽉 막히자 망설이지 않고 공을 사선으로 비스듬히 찔렀다.
발제르의 패스를 받은 건 토미였다.
도라익의 헛다리 때문에 모든 사람의 집중력이 공에 간 사이, 토미는 슬금슬금 움직여 스트라이커 위치를 잡았고, 발제르의 패스와 함께 안으로 달렸다.
제때 반응하고 속도도 빠른 덕분에 토미는 공이 골라인을 벗어나기 전에 잡았다.
- 패스!
토미는 왼발로 잡은 공을 오른발 쪽으로 툭 쳤다. 키퍼는 가까운 포스트를 지켰고 센터백은 중앙으로 향하는 패스 경로를 막았다.
발제르를 수비하던 수미는 발제르로 향하는 패스 경로를 몸으로 막았다.
토미는 뻔한 선택을 하지 않고, 오른발 발끝으로 공을 톡 차서 센터백의 가랑이를 뺐다.
- 골! 골!
실점을 확인한 키퍼가 주먹으로 땅을 쳤다.
- 도라익 선수 언제 저기 간 거죠?
헛다리로 오창범의 패스를 도운 도라익은 가만히 서서 패스의 진행을 구경했다. 그러다 발제르가 슛 대신 패스를 선택하자 바로 움직였다.
발제르가 슛할 줄 알고 덜 집중했던 두 센터백이 뒤늦게 반응했지만, 10미터 안에서 도라익을 따라잡을 순 없었다.
골대 앞으로 순식간에 돌진한 도라익은 토미의 패스를 받아 아주 편하게 골을 넣었다.
'신이시여, 기도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구단주가 속으로 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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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 전반전에 한 골 더 넣어야 해."
물 마시러 온 도라익에게 테일러가 말했다. 도라익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그 모습이 테일러한테 그렇게 듬직할 수 없었다.
'정식 감독이 아니니 이럴 때 난감하구나.'
경기 하루 전, 구단주는 테일러에게 도라익을 선발로 출전시킨 다음 후반전이 시작할 때 교체로 내리라는 언질 줬다.
테일러는 선수들이 지친 후반전에 도라익이 출전하는 게 전략이나 전술적으로 훨씬 나은 선택임을 어필했으나 구단주의 결심은 확고했다.
아직은 임시 감독인 테일러는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결국 구단주에게 굴복했다.
'도우가 다시 출전할 수 없다는 사실이 양 팀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더 설명했어야 했는데.'
한 골 넣은 거론 도무지 안심되지 않는 테일러였다.
- 제임스가 또 차단에 성공합니다.
테일러는 후반전에 없을 도라익 때문에 걱정이지만, 진실을 모르는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도라익이 선발로 출전한 데 큰 고무를 받았다.
덕분에 제임스는 전반전부터 컨디션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고, 경기장에 흩날리는 풀잎을 셀 정도로 집중력이 뛰어났다.
공을 뺏자마자 커다란 공간을 확인한 제임스는 바로 왼발로 패스했다. 익숙지 않은 왼발이지만, 어마어마하게 집중한 덕분에 오른발로도 힘든 멋진 패스가 나왔다.
동시에 도라익이 움직였다. 뉴캐슬 센터백이 도라익의 유니폼을 잡으려 했지만, 강하게 휘두른 도라익의 왼팔에 걸려 실패하고 말았다.
- 키퍼의 판단 실수입니다.
제임스의 패스를 보고 달려 나오던 키퍼가 황급히 멈춰서 뒤로 달렸다. 도라익보다 먼저 도착해 공을 처리할 것 같았는데, 제임스의 패스는 중간에 방향을 틀어버렸다.
- 페널티 박스 진입했습니다.
공을 잡은 도라익은 바로 드리블로 페널티 박스에 진입했다. 중거리 슛도 열심히 훈련했고 웬만한 선수보다는 잘 찰 자신이 있지만, 발이 상대적으로 작은 탓에 가까운 거리에서 때리는 슛이 훨씬 편하고 자신 있었다.
- 골! 멀티 골입니다.
- 가볍게 찔러 골이 되었습니다.
뉴캐슬 키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왼발과 오른발 모두 쓰는 도라익이기에 짧게 드리블하는 가운데 어느 발로 슈팅할지 판단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스트레스 때문에 고민을 멈추고 페널티킥 막을 때처럼 방향 하나 정해 도라익이 슈팅 자세를 잡는 순간 몸을 날렸는데, 운 나쁘게 반대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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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 왜 저를 교체합니까?"
도라익도 내심 자신이 풀타임을 소화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부상에 대한 두려움을 아직 완전히 떨치지 못했고, 그간 아무리 훈련을 열심히 했다고 해도 너무 오래 쉬어서 리그의 리듬을 따라갈지 의문이다.
"도우. 너무 조급하지 마. 아직 리그가 3라운드 남았어."
구단주가 시켰다고 실토할 수도 없는 테일러다. 그렇기에 도라익의 억울함이 가득 담긴 눈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원론적인 얘기만 했다.
"조급한 게 아니라 제가 전반전에 어떤 부분이 부족했는지 알고 싶어서 그럽니다."
도라익은 단지 억울해서가 아니라 혹시 자신이 미처 모르는 실책이 있어서 교체되는 게 아닌지 궁금해 끝까지 따지려 했다.
"그런 게 아니야."
더 따지려던 도라익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이번 시즌이 끝나면 내 계약도 끝이다. 감독 입장에선 떠날 선수를 중용할 수 없겠지.'
다음 시즌 도라익 없이 팀을 운영해야 하는 테일러기에 굳이 도라익에게 풀타임을 소화하게 할 필요가 없다.
실상과 다르지만, 도라익은 자신이 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내 실력이 예전 같지 않나 봐.'
잘못된 판단이 도라익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만약 예전의 도라익이라면 아무리 이적이 확실하다고 해도 45분만 뛰고 교체되는 일이 없었을 거다.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 훈련은 물론 추가 훈련도.'
말끔히 사라지지 않은 두려움 때문에 추가 훈련에 한 번도 참가하지 않은 도라익이다. 그러나 전반전만 뛰고 교체되며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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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가 타격을 받지 않을까요?"
잭이 최경호에게 질문했다.
잭은 축구에 재능이 없었다. 일찌감치 현실을 깨달은 잭은 선수 대신 에이전트를 목표로 삼았다.
에이전트를 장래 희망으로 삼은 잭의 첫 타깃은 최경호였다. 도라익이 은퇴하기 전에 최경호 대신 도라익의 에이전트가 되는 게 잭의 목표였다.
"괜찮아."
자신이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줄도 모르고 최경호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어떤 일을 당했을 때 훌륭한 사람은 어떻게든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아닌 사람은 어떻게든 부정적인 방향으로 가는 거야. 라익이는 훌륭하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잭은 경기를 지켜보면서도 최경호에게 에이전트가 되고부터 있었던 일들을 질문했다. 도라익이 교체되며 경기에 흥미를 잃은 최경호는 잭의 질문에 자세히 답변했다.
'도우 진짜 대단하네.'
최경호 같은 에이전트를 두고도 다른 어떤 선수보다 나은 커리어를 쌓았다. 만약 보아스나 다른 급이 있는 에이전트를 처음부터 만났다면 지금 얼마나 대단한 선수가 됐을지 상상이 안 갔다.
그러나 최경호의 이야기가 길어지며 잭의 생각이 바뀌었다.
'도우는 특별해. 그러니까 이런 특별한 에이전트랑 계약한 거야.'
제대로 된 에이전트라면 굳이 선발 출전을 고집하지 않았을 거고, 도라익은 2년 정도 유스 팀에서 뛰어야 했을 거다.
그리고 18살 즈음에 헝가리나 벨기에 혹은 네덜란드 리그에서 1년 정도 뛴 다음, 분데스리가나 라리가로 갔을 것이다.
거기에서 안정성을 증명한 다음 레알이나 바르사나 뮌헨 혹은 프리미어리그로 이적했을 것이다.
'미스터 최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 하고, 미스터 최가 못 하는 일도 할 수 있어야 해.'
목표가 생긴 잭은 최경호에게 음식 레시피, 옷 빨 때 어떤 섬유 유연제를 넣는지, 도라익이 몇 킬로미터 시속으로 달리는 걸 좋아하는지 등을 질문했다.
후반전에 1골을 추가로 넣은 스토크시티는 5연승으로 34점이 되며 리그 16위로 순위가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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