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그 데뷔전
1월 21일.
세인트제임스 파크.
오만 명의 홈팬과 채 3천 명도 안 되는 원정 팬이 욕 배틀이 붙었다. 경기 2시간 전에 스토크시티 팬이 SNS에 '뉴캐슬은 노츠 카운티 짝퉁 아닌가'라고 글을 올렸고 '좋아요' 수천 개 받았다.
그에 뉴캐슬 팬들은 급히 현수막을 제작해 경기 개시 전에 펼쳤다. 거기엔 '스토크시티의 31-32시즌 챔피언십 분투를 미리 축하합니다'라고 크게 적혔다.
경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관중석은 이미 후반전 80분 분위기였다.
한편.
극도로 흥분한 팬들이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복도를 지나 대기실에 전달될 땐 아무 의미도 없는 소음이 되어 선수들을 압박했다.
특히 뉴캐슬의 대기실은 방음이 별로여서 팬들의 소동이 여과 없이 전해진다.
"캠벨. 도우의 위치 선정을 도와줘."
타이리스 캠벨은 38세로 스토크시티에서만 20년 뛴 베테랑이다. 사실 반쯤 은퇴하고 유스 코치로 전환하려고 수업을 받던 중 블루스와 찰리 아담의 연이은 부상에 선수로 복귀했다.
"노 프로블럼."
"잘 부탁해. 엉클."
"콜 미 브라더."
"아저씬 우리 아빠보다 형이야."
도라익은 깔끔하게 29세까지 브라더로 부르고 30세부턴 엉클로 불렀다. 안타깝게도 팬들이 리빌딩을 언급할 만큼 평균 연령이 높은 팀이어서 엉클이 무려 15명이나 되었다.
"우리 전술은 찰리 아담하고 블루스가 있을 때랑 똑같아. 캠벨이 키가 좀 작으니 크로스 올릴 때 주의하고, 도우는 블루스보다 빠르니까 패스를 더 과감하게 해도 좋아."
캠벨은 20년 동안 스토크시티를 위해 98골을 넣었다. 주전으로 뛴 기간이 채 6년도 되지 않은 걸 고려하면 괜찮은 성적이다.
물론, 2부리그 골이 태반이어서 인정받는 공격수는 아니다.
'아씨. 왜 이렇게 떨리지?'
도라익은 긴장한 마음으로 경기를 기다렸다.
윌슨한테서 선발로 출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땐 기쁘기만 했는데, 정작 경기에 나가려고 하니 여기저기가 떨려왔다.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긴장한 티를 내는 도라익에게 아무 조언도 건네지 않았다. 싫어하거나 무관심한 사람들은 당연히 해줄 말이 없고, 도라익을 좋아하거나 응원하는 선수들도 섣불리 뭐라 하지 못했다.
어설픈 조언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기에 그저 도라익이 빨리 평소 하룻강아지 모습으로 돌아오길 기대할 뿐이었다.
"오케이. 전술대로 하면 오늘 경기는 우리 승리다. 출발하자."
감독과 코치를 비롯한 스텝들 그리고 벤치 선수들이 먼저 나갔고 팀의 주장인 잭 버틀랜드가 선수들을 줄 세웠다.
서열 최하위인 도라익은 줄의 맨 마지막에 서게 되었다.
"하이. 아유 쏜?"
플레이어 에스코트를 맡은 대여섯 살로 보이는 꼬마가 질문했다.
"도. 도우라고 불러도 돼."
"몇 살이야?"
"열여섯, 넌?"
"네 살 아니면 다섯 살."
꼬마는 자기 나이도 정확히 몰랐다. 그러니 이미 은퇴한 손 선수와 도라익을 헷갈리는 거겠지.
"너 우리 팀 팬이야?"
"아니. 난 맨유 팬인데."
오랜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고 겨우 부활한 맨유. 지난 라운드에 아스널에 1:2로 졌지만, 여전히 2위인 첼시를 6점이나 앞서고 있다.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의 손을 잡은 심판들이 앞장서고 선수들도 입장했다. 도라익이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 머나먼 한국의 스튜디오에서 난리가 났다.
- 도라익 선수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 스토크시티에서도 대표팀과 같은 등 번호를 입었습니다.
- 한 시간 전에 선발 명단이 발표될 때까지도 입방정이 될까 봐 말을 아꼈는데요. 이젠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도라익 선수가 프리미어리그에 정식으로 데뷔했습니다.
- 프리미어리그 최연소 출전, 최연소 선발 출전이죠?
- 당분간은 두 기록만 깨겠습니다.
- 설마 우리 강 해설은 득점이나 도움도 기대하는 건가요?
최 PD가 박만호가 있는 방향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없는 말을 지어내서라도 시청률을 높여야 하는 판에 초 치는 박만호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
- 박 해설은 어렵다고 생각하나요?
- 현재 23라운드 진행한 경기에서 스토크시티는 12득점 33실점입니다. 최근 6경기는 2득점 10실점이고요.
콕 집어서 얘기하진 않았지만, 골 기회를 많이 만드는 팀이 아니라는 뜻은 명확히 전달했다.
- 눈썹 걸까요?
강철민이 도발했다.
- 그럼 저는 공격 포인트 올리는 데 걸겠습니다.
박만호가 약삭빠르게 발을 뺐다.
- 저도 거기에 걸 생각입니다. 반대편에 걸 사람이 필요한데. 최 PD 자네 생각은 어떤가?
도라익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죽음을 묵념했다. 백 년이 넘은 리그여서 거의 매 경기 누군가의 죽음을 묵념하는 행사가 있다.
묵념이 끝나고 악수한 후 선공을 골랐다. 심판이 호루라기를 불기 기다리며 양 팀 선수들은 팔다리를 활동했다.
"도우. 내 헤딩 습관은 잘 알지?"
"물론이지. 엉클도 내 스피드 잘 알지?"
"근데 수비수가 나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세서 헤딩이 정확하지 않거나 속도가 느릴 수 있어. 그럴 땐 어떻게 하라고 했지?"
"손으로 밀어서라도 자리를 지키라고 했어. 근데 진짜 주심이 파울 안 불어?"
"다 그런 건 아닌데, 오늘 심판은 몸싸움에 관대해."
뉴캐슬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스토크시티는 변형 442 포메이션을 사용한다. 여기에서 변형이라고 하는 건, 미드필더의 둘이 윙처럼 움직일 수도 있고 가운데 자리하여 중앙 미드필더처럼 움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의 하나를 차지한 도라익 역시 상황에 따라 윙이나 미드필더처럼 움직여야 한다.
도라익은 캠벨의 지시대로 뉴캐슬의 오른쪽 센터백에게 접근했다. 뉴캐슬은 스리백 전술을 쓰는 팀으로, 두 윙백의 컨디션이 경기 승패를 좌우한다.
도라익이 자리를 잡자 뉴캐슬의 오른쪽 센터백이 다가와 몸을 부딪쳤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도라익은 몇 걸음이나 밀려났다.
'뭐지? 도발은 아닌 것 같고. 프리미어리그식 인사인가?'
도발이라고 하기엔 표정이 너무 평온했고, 인사라고 하기엔 부딪침의 강도가 수위를 넘었다.
"너 되게 빠르다며?"
센터백이 말을 걸었다. 도라익은 다가오는 센터백을 손으로 밀었다. 전력은 아니어도 꽤 힘줘 밀었는데도 근육이 돌덩이처럼 단단한 센터백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넌 옐로카드 아홉 장이라며?"
옐로카드 5장이면 자동으로 한 경기 출장 정지다. 그리고 10장이면 2경기 정지다. 지금 도라익을 도발하는 센터백은 옐로카드를 9장 적립했다.
특히 다음 경기는 유로파 리그 자격을 두고 아스톤 빌라와 홈에서 겨뤄야 한다. 지는 건 물론 안 되고 비겨도 큰 타격이 오는 경기다.
"괜찮아. 우리 팀엔 훌륭한 수비수가 많거든."
"에이. 그럼 옐로카드 아홉 장 받을 때까지 널 안 썼지."
뉴캐슬 센터백은 왠지 인정받은 느낌도 들고 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때. 도라익이 갑자기 앞으로 뛰었다. 센터백은 도라익을 쫓으며 상황을 살폈다.
스리백 전술은 수비수에 대한 요구가 매우 높다. 지역 방어도 돼야 하고 대인 방어도 돼야 하며 어느 정도 마킹 능력도 필요하다.
중앙 센터백은 지휘 능력에 더불어 필요에 따라 미드필더 위치로 올라가 팀의 공 컨트롤에 참여해야 하고, 좌우 센터백은 가끔 풀백으로 뛰어야 한다.
그래서 중국 풀백처럼 도라익의 폭주에 놀라 허둥대며 수비 라인을 깨진 않았다.
수비 라인을 지난 도라익은 속도를 천천히 죽이고 자기 위치로 돌아갔다. 방금 공을 잡은 선수가 바로 긴 패스로 공간에 떨궜으면 도라익의 단독 찬스다.
"도우. 잘했어."
캠벨이 도라익의 침투를 칭찬했다.
스토크시티의 팀 전술에서 공격수인 도라익이 아주 중요한 역할이지만, 팀의 공격 전술은 도라익 중심이 아니다.
도라익은 득점보다 공간을 만들고 상대 수비를 허무는 보조적 역할이다.
득점력이 중요한 건, 골 결정력이 없는 선수가 아무리 전술적으로 훌륭하게 움직이더라도 효과를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방금도 도라익이 리그에서 20득점을 한 선수였다면 뉴캐슬 센터백이 끝까지 뛰었을 것이고, 수비 라인이 무너진 걸 이용해 기회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저 멍청이."
윌슨은 화를 버럭 내며 노트에 글자를 마구 적었다. 공을 잡은 톰 인스가 도라익과 캠벨 사이에서 고민하며 머뭇거리다가 타이밍을 놓쳤다.
방금은 캠벨에게 주는 것보단 도라익한테 주는 게 훨씬 위력적인 상황이었다. 연습 경기에선 도라익에게 한 번도 패스한 적 없지만, 스토크시티 최고의 스타 선수 톰 인스는 프로로서 개인적인 감정을 정식 경기에까지 들고 올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도라익이 저렇게 훌륭한 침투를 할 거라는 기대가 전혀 없었기에 마음의 준비가 미흡하여 정말 좋은 기회를 허망하게 날리고 말았다.
"도우를 믿으세요."
수석 코치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저 아이 심리 테스트 결과를 안 봤죠?"
"좋은 얘기들만 있어서 자세히 살피지 않았지."
"문제에 직면했을 때 필요한 게 뭔지 빠르게 찾아낸다고 하더군요."
윌슨 감독은 수석 코치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방금 몇 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하나는 뉴캐슬 센터백이 도우를 끝까지 따라가지 않은 거고, 하나는 공을 잡은 인스가 패스를 하지 않은 겁니다. 이는 상대 팀이든 우리 팀이든 도우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단 뜻이겠죠."
"도우가 그걸 해결할 거란 얘긴가?"
"증명하려고 할 겁니다. 진짜로 골을 만들지는 모르지만, 자기 생각대로 안 된다고 당황할 아이는 아닙니다."
도라익에게 큰 기대가 없는 감독과 달리, 작년에 도라익의 입단 테스트를 직접 진행했던 코치는 요 며칠 도라익을 면밀히 주시했다.
연습 경기에서 패스가 잘 오지 않아 별 활약이 없었지만, 코치는 도라익이 작년에 보여준 놀라운 모습을 잊지 않았다.
'뭔가를 해. 우리 팀을 구원해. 도우, 넌 천재야.'
- 작가의말
도천설 추종자 한 명 발견. 신분은 스토크시티 현직 코치. 소속 팀 이름으로 봐서 스토커 기질이 다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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