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점
스토크시티는 6라운드에 원정에서 미들즈브러와 대결했다.
도라익은 2골을 넣고 경기 60분에 교체되었다. 일찍 교체되었지만, 8골로 득점 1순위를 달리고 있고 오늘 경기에서 이기면 1위인 맨시티를 1점 차이로 따라잡을 수 있어 도라익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문제는 도라익의 부재를 틈탄 미들즈브러의 미친 듯한 공세였다. 속도가 빠른 우디르가 있지만, 미들즈브러는 하프라인을 넘어 압박했고, 결국엔 2골을 만회했다.
2:0으로 이기던 경기가 2:2로 끝났다.
경기 후 테일러는 도라익을 불러 면담했다.
"도우. 선발이 아니라 교체로 출전하는 건 어떻게 생각해?"
이젠 도라익이 없다는 사실이 스토크시티엔 부담으로, 상대 팀엔 용기로 작용했다. 차라리 도라익이 벤치에서 대기했다면 지난 시즌 마지막 8경기처럼 선수들이 경기에 엄청나게 집중할 수 있고, 상대 팀도 여러 가지 우려로 극단적인 전술을 망설일 것 같았다.
도라익은 대답을 망설였다.
"네 생각을 솔직히 말해줘. 정식 감독은 처음 하는 거라서 내 생각이 미치지 못한 부분이 많을 거야."
"몇 경기 더 뛰면 풀타임을 소화할 것 같습니다."
"진짜?"
"예전 제 데이터를 찾아봤는데, 80분 이후에 넣은 골이 많더군요. 특히 강팀 상대로 경기 초반 아니면 극 후반에 골을 넣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체력 상태는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돌파 후 가속하는 습관으로 체력을 낭비하긴 했지만, 그게 30분 어치의 체력씩이나 되는지 의문입니다."
테일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팀이 달라졌습니다."
도라익의 대답은 조금 의외였다.
"예전엔 다른 선수들이 자기 롤을 희생해서 제 체력 비축을 도왔습니다. 특히 강팀을 상대할 땐 제가 잘할 수 있도록 많이 희생하고 양보했습니다."
"이젠 아닌 거구나."
테일러도 도라익이 말하려는 바를 깨달았다.
"지금은 제가 체력을 희생해서 다른 선수들을 돕고 있습니다. 마음의 빚 같은 거랄까요. 점점 나아지고 있고 팀에도 적응하고 있으니 곧 풀타임을 소화할 수 있을 겁니다."
#
리그 7라운드.
3승 3무 12점으로 리그 4위에 랭크된 스토크시티는 3승 1무 2패 10점으로 5위인 아스널을 홈에서 맞이했다.
도라익이 선발로 출전했고 오창범은 벤치에 대기했다.
4-4-2 전술을 사용하면서 풀백에게 공격보다는 수비 능력이 더 필요해진 탓이다. 스토크시티는 강팀 상대로는 맥자넷과 라미스, 약팀 상대로는 오창범과 스미스의 조합을 사용하는 루틴이 슬슬 형성되고 있다.
- 아, 실점합니다.
페데리치는 반응이 빠르다. 빠른 판단 덕분이었다.
문제는 약팀과 달리 아스널은 공격 수단이 다양하고 공격을 마무리할 선수도 다양하다. 빠른 판단이 때론 독이 되기도 한다.
경기가 재개되고 스토크시티는 공을 돌리며 리듬을 찾았다. 아스널의 맹공에 휘둘리며 빨라졌던 리듬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아스널도 모든 선수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스토크시티의 리듬에 맞췄다. 상대가 느리게 움직이는데 혼자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날뛰면 허튼 체력만 소모할 뿐이다.
- 도라익 선수, 돌파.
느린 리듬으로 움직이던 도라익이 공을 잡자마자 기어를 두 단계 정도 끌어올렸다. 화들짝 놀란 아스널 선수들이 리듬을 빨리했다.
그러나 도라익과 가까운 선수와 먼 선수의 반응이 달라 팀 리듬이 깨졌다.
스토크시티 선수들이 아스널 수비진에 촘촘히 침투했다.
아스널은 강팀이지만, 수비를 잘하는 팀은 아니다. 수비 전술도 괜찮고 수비수 개인 역량도 출중하지만, 단순 수비만 놓고 볼 땐 6위 안에 들지 못한다.
어마어마한 공격력 때문에 수비하는 횟수가 적어 실점이 리그 5위나 6위 정도를 차지할 뿐이다.
아스널 선수 두 명을 더 돌파한 도라익은 오른발로 공을 톡 찼다. 고운 포물선을 그린 공은 잔디에 떨어지기 전에 발제르의 왼발과 만났다.
발제르는 오른발이 주발이지만, 왼발도 슈팅 하나만큼은 꽤 정확하다.
- 들어갑니다!
- 도라익 선수가 절묘한 패스를 보냈습니다.
- 키퍼가 나오기 애매하고, 발제르 선수가 슈팅하기 편한 패스였죠.
- 발제르 선수의 왼발을 염두에 두지 않은 아스널 수비진의 실책이기도 합니다.
발제르가 오른발로 슈팅하도록 패스했다면 수비수가 먼저 공을 건드려 파괴할지도 모른다. 발제르의 왼발로 보냈기에 수비수의 반응이 늦었다.
홈팬들이 어마어마한 응원을 보냈다.
1라운드에 지난 시즌 17위로 겨우 강등을 면한 선덜랜드와 경기했다. 3라운드는 리그 2위의 신분으로 토트넘과 경기했다. 5라운드 역시 리그 2위로 아스톤 빌라를 맞이했고, 7라운드인 지금은 리그 4위로 아스널을 맞이했다.
시즌 초반에 4개의 홈 연속 자신보다 낮은 순위의 팀을 만난 것만으로도 스토크시티 역사에 드문 일인데, 원정팀 중엔 토트넘과 아스널이 있었다.
미리 진행한 경기 결과로 오늘 경기는 비기기만 해도 3위로 올라갈 수 있다. 동점 골에 팬들이 흥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골을 넣은 도라익은 정신을 한껏 집중했다. 오늘 경기를 잘 치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기 중 자신의 롤을 좀 더 명확히 해서 체력을 아끼는 것 역시 중요하다.
지난 시즌엔 대부분 교체로 출전하며 체력을 한꺼번에 쏟았다. 그게 습관으로 배어 풀타임을 위한 체력 안배가 어려웠다.
더구나 팀에 뭔가 더 큰 공헌을 해야겠다는 강박으로 다른 선수들을 돕는 바람에 비효율적으로 소모되는 체력이 많았다.
'이럴 땐 알론소가 그립네.'
테일러는 전술을 아주 세세하게 짜고 수많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책을 준비하는 스타일이다. 덕분에 중요한 경기에서 실수하지 않는다.
지난 시즌 8연승으로 강등을 면한 데는 도라익의 공이 크지만, 테일러도 꽤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선수를 분석하고 돕는 건 부족했다.
"토미, 젬, 산체스. 날 좀 도와줘. 오늘 풀타임을 뛰고 싶어."
"알았어. 우리가 좀 더 많이 뛸게."
측면 수비와 공격을 토미와 산체스에게 맡긴 도라익은 좀 더 중앙에 집중했다.
- 아, 실점합니다.
- 막을 수 있었는데, 안타깝네요.
별 위협적이지 않은 아스널의 슛이 줄리엔의 골반에 맞아 골이 되었다. 너무 일찍 몸을 던진 페데리치가 주먹으로 잔디를 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수비를 좀 더 타이트하게 하는 건 어때?"
스테판과 루이스 그리고 도라익이 머리를 맞댔다.
"그럼 경기 후반에 팀 전체가 무너질 거야."
루이스가 반대했다.
"아스널에 슈팅 기회를 아예 안 주는 건 말이 안 돼. 지금 이대로 하고, 대신 위험한 위치에선 좀 더 적극적으로 수비하자."
스테판이 건의했다.
"좋아. 그렇게 하자."
스토크시티는 아스널의 화려한 패스워크에 말리지 않고 조금 느슨한 수비 체계를 유지했다. 괜히 아스널 한 팀 때문에 지금까지 잘 유지한 수비 진형과 수비 리듬을 깨지 않으려는 게 그 이유다.
- 1:2로 점수는 불리하지만, 스토크시티의 플레이가 엄청 침착합니다.
- 자신감이죠. 이대로도 괜찮다는 자신감.
아스널은 1골 앞선 후 또 라인을 내리며 스토크시티를 끌어내려 했다. 그러나 스토크시티는 말리지 않고 자기 전술대로 차분하게 공격했다.
'리듬, 리듬 변환.'
도라익은 팀 리듬으로 움직이다가 공 잡은 선수의 리듬으로 뛰었다.
'내가 풀타임을 못 뛴 이유가 한둘이 아니었어.'
팀의 리듬에 맞춰 움직이니 체력 소모가 확 줄었다. 그간 경기를 쉰 탓에 감이 많이 사라졌다는 증거다.
- 도라익 선수, 공 잡았습니다.
잡은 공을 오른쪽으로 짧게 툭 친 도라익이 슈팅 자세를 취했다. 최근 4골 모두 복잡한 과정 없이 간단히 넣었기에 아스널 수비수는 황급히 다리를 뻗어 슈팅을 방해했다.
페이크였다.
도라익은 오른쪽으로 한 번 더 치고 달렸다. 키퍼가 자신의 위치를 조정했고, 다른 수비수가 다리를 벌리며 도라익의 슈팅 경로를 제한했다.
두 번 연속 페이크를 준 도라익이 왼발을 축 삼아 몸을 꼬며 공을 왼쪽으로 패스했다. 어느새 달린 토미가 공을 잡고 편하게 슈팅했다.
두 번의 페이크로 아스널 선수들 주의력이 모두 도라익에게 집중된 탓에 토미는 아주 편하게 침투하고 득점했다.
#
후반 75분.
도라익이 교체되자 아스널이 라인을 잔뜩 올렸다.
'다들 도우의 부재가 약점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스토크시티는 전통적으로 수비를 잘하는 팀이다. 리그 하위권을 헤맬 때도 수비만큼은 중위권이었으며, 공격이 강화된 이후엔 수비 부담이 줄어 실점도 적어졌다.
덕분에 약팀 상대로는 도라익이 교체로 내려가도 점수를 잘 지켰다.
문제는 상대가 공격에 능한 강팀이거나 수비를 운에 맡기고 극단적 공격을 하는 경우다.
더 문제는 아스널이 둘 다 해당한다는 거다. 공격에 능한 강팀인 동시에 도라익을 교체해 올라 온 우디르에게 속도 빠른 풀백을 붙이고 남은 선수 모두 공격에 투입했다.
게다가 아스널은 스토크시티 입장에서 조금 야비한 수를 썼다. 예전에 루이스의 살인 태클로 발목이 나갔던 공격수가 도라익의 교체와 함께 출전했다.
마음에 죄책감이 아직 남은 루이스가 빈번히 실수했고, 중앙이 허물어진 스토크시티가 형편없이 밀렸다.
- 연이은 실점으로 스토크시티가 무너집니다.
5분 사이에 3골을 먹은 스토크시티는 투지가 사라졌다. 2:5라는 점수도 어마어마한 압박이지만, 3승 3무로 불패를 지킨 유일한 팀이라는 자부심이 사라졌다.
'내가 체력 안배를 좀 더 잘했어도.'
무너지는 팀을 보며 도라익이 이를 갈았다.
'그저 오래 뛰는 것과 경기를 뛰는 게 다르다는 걸 일찍 알았더라면.'
고되고 고통스러운 훈련 때문에 도라익은 객관적이지 못했다. 단순히 오래 뛰는 체력 테스트를 통과한 거로 자신이 경기장에 완벽하게 복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의 준비가 적었던 탓에 풀타임을 뛰지 못하는 약점이 생겼다.
최근 많이 고민하며 풀타임을 뛸 수 없었던 이유를 속속 밝혀낸 탓에, 앞선 경기들과 달리 자책감이 훨씬 컸다.
"오늘 우리는 참패했다."
쥐 죽은 듯 고요한 라커룸에 도라익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스널이 잘해서가 아니고 우리가 못 뛰어서 진 거다."
주먹을 꽉 쥔 도라익이 다친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져서 원통한 게 아니라 제 실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진 것 같아서 분했다.
"지금 우린 6위고, 남은 경기 결과에 따라 순위가 더 떨어질지도 모른다."
남은 3경기 중 2경기의 결과가 스토크시티의 순위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우리 목표는 여전히 1위다. 난 6위나 4위를 목표로 뛰고 싶진 않다."
"나 다시 예전처럼 뛸까 봐."
루이스의 눈이 활활 불탔다.
"위험한 태클만 자제하면 되는데, 내가 그간 좀 비겁했던 거 같아."
"매일 훈련 2시간 연장한다. 날 도울 사람."
5골 중 2골은 확실한 페데리치의 실수고, 남은 3골에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물론 공짜야. 내 주급이 얼만지 다들 잘 알잖아."
오창범, 스미스, 콜린스, 쇠렌센 등이 페데리치를 돕겠다고 말했다.
"우디르도 드리블과 슈팅 훈련 좀 더 해."
도라익의 말에 우디르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연속 2경기 무시당하면서 순하기만 하던 우디르도 화가 좀 났다.
"3위하고 1점 차이, 1위하고 4점 차이다. 우린 할 수 있다."
"스토크시티 만세!"
루이스가 양팔을 번쩍 들며 겨드랑이털을 자랑했다.
- 작가의말
다음 글은 무협으로 가야겠습니다.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