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베로
리베로는 이탈리아어로 자유인이라는 뜻이다. 축구에 국한한다면 공격 가담을 즐겨 하는 센터백을 일컫는 말이다.
현대 축구에선 정해진 위치와 롤이 없이 경기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뛰는 선수를 지칭하기도 한다.
문제는 위치와 롤 없이 자신의 판단으로 90분 경기를 이끌어 나갈 선수가 없었다. 체력적인 문제는 둘째 치고, 90분 내내 고도로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대부분 선수한텐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남은 10명의 선수 중 누군가가 리베로와 움직임이 겹치면 문제가 생긴다.
"3번!"
도라익이 외쳤다.
"3번.","3번이다.","야, 넌 저기야."
선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간혹 틀리는 선수가 있어도 곁에 선수가 잘못을 바로잡았다.
알론소는 흐뭇한 미소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전술 이해와 이행 능력이 상상 이상이야.'
알론소가 한국 대표팀 감독 자리를 수락한 건 한국이 아시아에서 강팀이기 때문이다.
강팀은 상대적으로 전술 사용의 주도권이 있다. 상대 눈치를 안 보고 우선하여 전술을 펼칠 수 있기에 전술 자유도가 약팀보다 훨씬 크다.
클럽팀의 한 시즌은 마라톤과 같아 안정성이 중요하다. 알론소의 머리에 떠오르는 기상천외한 전술을 시험할 수 없다.
토너먼트 형식의 컵 대회가 있긴 하지만, 리그와 동시에 진행하기에 역시 함부로 새 전술을 시험할 수 없다.
남미는 선수들 재능이 뛰어나나 감독의 전술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 유럽의 축구 강국들은 알론소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알론소한텐 한국 축구협회가 내민 손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더 기쁜 건 한국 선수들이 보여준 모습이었다. 상상력과 창조성이 살짝 부족하지만, 11명 선수가 기계처럼 돌아가는 현대 축구에선 오히려 장점이다.
"7번!"
잘 짜인 수비 진형으로 상대 공격을 무산시킨 한국은 빠른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공을 잡은 건 도라익이 아니었다. 상대 수비 중심이 도라익한테 쏠린 틈을 타 변경태가 오른쪽에서 공을 잡았다.
세 명의 선수가 변경태를 지원하며 패스로 공을 안전하게 지켰다.
"형!"
도라익의 외침이 들리자 변경태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발을 휘둘렀다.
- 오, 좋은 패스!
변경태는 도라익과 수비수들 위치와 움직임을 보고 마지막 순간에 발목을 비틀고 힘을 조절했다.
드리블과 돌파가 조금 부족하지만, 시야가 넓고 패스가 정교한 선수답게 도라익에게 좋은 패스를 보냈다.
- 슛!
도라익은 수비수 두 명을 달고 뛰었다. 한 명은 도라익의 오른쪽에 있고, 한 명은 도라익을 뒤에서 쫓고 있다.
변경태의 크로스가 빠르진 않지만, 가슴으로 트래핑하고 처리하기엔 운신의 폭이 넓지 않았다.
그래서 헤딩으로 공격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 골! 골입니다.
- 너무 잘 들어간 골입니다.
도라익의 머리에 맞은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먼 포스트 쪽으로 가서 골이 되었다. 마치 손으로 던진 듯 정교한 궤적에 키퍼는 그저 고개를 돌려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골을 넣은 도라익은 양손을 머리 위에 대고 뿔을 만든 다음, 허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꾸꾸의 모습이었다.
"라인 내려."
벤치에서 지시가 전달됐다.
한국팀은 바로 라인을 내렸다. 상대는 한국의 페이스에 안 말리려고 패스로 천천히 밀고 올라왔지만, 채 5분도 안 되어 라인을 올리고 말았다.
젊은 선수가 대부분이라 결국 분위기에 말려버린 것이다.
- 알론소 감독 웃습니다. 본인 예상대로 경기가 흐르고 있다는 말이죠.
- 저 웃음 때문에 사막여우라는 별명을 얻었죠.
상대가 라인을 올린 데는 도라익의 공이 적지 않았다. 도라익은 계속 수미처럼 뛰며 상대가 방심하게 유도했다.
"11번!"
도라익의 선창에 선수들이 후창했다.
"야, 넌 저기 가야지.","양쪽을 비우는 전술 맞지?"
한국은 두 풀백에게 양 측면을 맡기고 중앙 수비를 강화했다. 중앙에서 공을 돌리는 게 어려워지자 상대는 어쩔 수 없이 공을 측면으로 돌렸다.
- 조영호 선수 선방.
키가 2미터에 육박하는 조영호다. 발도 빠른 편이어서 웬만한 크로스는 어렵지 않게 잡아냈다.
그러나 다른 옵션이 없는 상대는 여전히 측면을 공략했다. 대신 낮은 크로스나 얼리 크로스 등 다양한 시도로 조영호의 약점을 찾으려 했다.
그러는 사이, 도라익과 변경태가 슬그머니 위치를 바꿨다.
- 오, 힘이 장사네요.
공을 잡은 조영호가 성큼성큼 달리다가 공을 던졌다. 팔로 던진 공은 하프라인을 가볍게 넘었다.
도라익을 쫓던 수비수는 카드를 각오하고 백태클을 날렸다. 그런데 도라익이 가속하는 바람에 건드리지도 못했다.
주심이 대기심에게 수신호를 보내 백태클을 한 선수 번호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번 공격이 끝나면 위험한 반칙을 시도한 선수한테 옐로카드 한 장 줘야 한다.
23세 이하 선수로 이뤄졌고 평화를 주제로 삼는 올림픽이기에 월드컵이나 리그보다 반칙에 훨씬 엄격했다.
- 파넨카 킥!
- 골입니다!
달려 나오며 슈팅 각을 좁히는 키퍼 상대로 도라익은 대형 파넨카 킥을 때렸다. 느리나 정확했던 슛은 황급히 몸을 돌린 키퍼가 도착하기 전에 골대 안에 안착했다.
도라익은 변경태를 비롯한 몇 명의 선수와 함께 칼군무를 선보였다.
최근 에밀리아의 추천으로 엘이 입덕한 신인 그룹의 포인트 안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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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으로 승리한 한국은 이어진 두 경기도 1:0과 3:0으로 승리하면서 조 1위로 8강에 진출했다.
도라익은 3경기 3골 1도움을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
"김상현 평론은 장 안 지지나요?"
오태범이 아픈 데를 찔렀다.
"오태범 평론은 관용구가 뭔지 모르시나 보네요."
안 받아주고 싶었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만 바라보는 바람에 김상현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도라익 선수가 하늘을 날면 제가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습니다. 어때요? 관용구 제대로 사용한 거 맞습니까?"
소소한 복수를 한 오태범이 즐겁게 웃었다.
프로가 되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막냇동생이 예상과 달리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고 있다. 달리 오라는 데가 없는 비인기 선수긴 하지만, 절반 이상 경기를 주전으로 뛰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조상이 덕을 쌓았는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친동생처럼 여기던 도라익이 보란 듯이 복귀했고, 차 감독이 차 회장으로 신분을 바꿨다.
아직 초반이지만, 수많은 현실적인 개혁 방안이 토론되고 있어 대한민국 축구의 밝은 미래가 기대되었다.
"자, 그만 주제로 들어가죠. 신임 감독의 전술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저는 도라익 전술이라고 이름 짓고 싶습니다."
오태범이 치고 나왔다.
"리베로 전술은 사실상 사장된 거나 마찬가집니다. 효율을 중요시하고 빠른 리듬을 자랑하는 현대 축구에서 센터백이 공격에 자주 가담하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스리백 전술이어도 마찬가지죠."
"도라익 선수의 움직임이 전술에 따른 거란 말씀입니까?"
화면에 도라익의 핫 존이 표시되었다.
"몇 군데 비었네요."
말 그대로 몇 군데만 빼고 경기장 곳곳에 도라익의 체취가 남았다.
"솔직히 저희가 보기엔 도라익 선수가 그저 열심히 뛴 거 같은데요. 전문가 소견으론 사실상 계획된 움직임이란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제가 분석한 바론 도라익 선수의 위치에 따른 13개 전술이 있습니다."
오태범의 말에 화면이 바뀌었다.
"수비 상황에서 도라익 선수는 공격수, 미드필더, 수미, 센터백 역할을 맡습니다. 드물지만, 풀백 자리에 간 적도 있죠. 공격 상황엔 양쪽 윙, 공격수, 공미, 미드필더 역할을 맡은 적 있습니다. 상대를 가두고 측면 크로스로 폭격할 땐 센터백처럼 마지막에 남아 수비한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전술을 사용하는 이유가 뭔가요?"
진행자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인데, 역발상입니다."
"역발상이요?"
"차 감독님은 팀 전체가 도라익 선수를 서포트해서 도라익 선수가 본인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는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거기에 한계를 느끼고 후계 양성으로 뜻을 돌려 협회로 갔죠."
김상현은 몰래 이를 갈았다. 협회가 대대적으로 물갈이되는 바람에 용돈이 말랐다. 아파트와 차 대출금을 상환하기 위해 최근 안정적인 일자리를 알아보는 중이다.
"알론소 감독은 반대입니다. 도라익 선수를 이용해 팀 실력이 최상이 되게 하는 방식입니다."
도라익이 수비 시 가장 약한 고리를 차지해 팀 전체의 수비 능력을 강화한다. 도라익이 공격 시 가장 약한 고리를 차지해 팀 전체의 공격 능력을 강화한다.
도라익의 힘, 체력, 제공 능력, 스피드, 순발력 등등을 하나가 아닌 여럿으로 분해했다. 힘센 도라익에게 위치 하나 주고, 체력 좋은 도라익에게 위치 하나 주고, 헤딩 잘하는 도라익에게 위치 하나 주고, 빠른 도라익에게 위치 하나 주고.
"이런 전술 덕분에 도라익 선수가 이방인이 아닌 팀의 일원이 됐습니다. 도라익 선수 때문에 다른 선수들의 롤이 줄 거나 바뀌는 일이 없고, 오히려 도라익 선수 덕분에 자신의 롤을 더 잘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도라익의 팀이 아닌 도라익을 보유한 팀이 된 거죠."
"뭔지 잘 모르겠지만, 되게 좋은 소식 들은 기분이네요."
"그럼요. 되게 좋은 소식이죠. 왜냐면 알론소 감독이 대표팀 감독이잖아요. 젊은 선수를 대량으로 발탁해 2년간 연마하면 괜찮은 팀이 나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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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최. 내 에이전트를 해줬으면 합니다."
"왜요?"
최경호는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스테판이라는 이탈리아 선수를 멍한 얼굴로 바라봤다.
"저 예전에 팔레르모 골키퍼입니다. 도우한테 해트트릭 당한."
"아, 그렇군요."
"골키퍼로는 재능이 부족한 거 같아서 센터백이 되었습니다. 지금 계약이 만료되어 자유의 몸입니다."
"그래서요?"
"스토크시티에서 도우랑 같이 뛰고 싶습니다. 당신이 구단주랑 친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에이전트가 돼주십시오. 저는 주급 10만 유로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을 하며 스테판이 종이 몇 장을 건넸다.
"이탈리아 대표팀 선수?"
주전은 아니지만, 스테판은 대표팀 선수였다. 게다가 세리에 A에서도 51경기나 뛰었다.
"골도 3개 넣었네요?"
경기 평점도 평균 7.2로 상당히 높았다.
"왜 굳이 스토크시티에서 뛰려는 겁니까?"
"저 이탈리아 사람이지만, 혈통은 보다시피 북유럽 쪽입니다."
"혈통이 왜?"
"당신은 독일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이탈리아 역시 인종 차별이 독일 못지않은 거 아시죠?"
최경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축구는 좋은데 이탈리아가 싫습니다. 고민하다가 도우가 복귀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때부터 스토크시티에서 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스토크시티는 제게 5만 파운드밖에 못 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당신을 찾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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