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의 세계
"형, 나 번호 바꿀까 봐."
"왜?"
"자꾸 이상한 문자랑 전화가 와."
도라익은 에이전트를 바꾸고 싶은 생각이 없냐는 문자를 확인하며 툴툴거렸다.
처음에는 꼬박꼬박 답장도 보내고 했는데 이젠 귀찮아졌다.
"다 네 탓이잖아. 어떻게 축구선수가 골든 보이를 몰라."
최고의 축구 유망주를 일컫는 골든 보이. 지난 시즌 유망주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프로선수를 망라해도 최고 수준의 데이터를 쌓은 도라익이다.
그런 도라익이 투표에서 겨우 7위를 받은 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작 주변에서 도라익한테 골든 보이 관련한 화제를 꺼낸 사람은 없었다. 팀의 주장이자 득점원이며 공격의 핵심인 도라익이 흔들리는 걸 누구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라익은 시상식에서 질문을 받기 전까지 골드 보이가 뭔지 까맣게 몰랐다.
"그거 다 형 탓이라잖아."
도라익의 '무식'이 만천하에 드러난 후 수많은 에이전시 회사 혹은 개인 에이전트가 도라익한테 연락을 취했다.
최경호가 만만하게 보인 탓이다.
덕분에 며칠 안 되는 사이에 도라익의 개인 전화에 문자와 통화 기록이 급격히 쌓였다.
"이래서 미인이랑 결혼하면 피곤하다는 거야. 조금 틈을 보이니까 난봉꾼이 막 비집고 들어오잖아."
최경호가 된장국 간이 맞는지 확인하며 말했다.
"근데 형 이건 진짜 반성해야 해. 페어린던이 이적하는지 미리 체크했어야지."
"알았어. 다음부터 주의할게."
페어린던은 1월 4일 리버풀로 이적했다. 이적료가 무려 4천3백만 파운드로 이번 이적시장 최고 금액이 될 소지가 다분하다.
이런 팀에 영향을 끼칠 만한 정보는 에이전트가 미리 물어오고 그래야 한다. 그러나 뚝심이 최고 장점인 최경호는 아무것도 안 했다.
도라익 역시 자신을 설득하는 전화 혹은 문자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다.
"형 이대로면 다른 선수랑 계약 못 해."
"당장은 너 하나 돌보는 것도 벅차."
도라익은 에이전트 관련으로 전화나 문자를 보낸 번호들을 일일이 블랙리스트에 넣었다.
"형. 사람들은 왜 이리 복잡하고 치열하게 살까?"
"어른은 뭔가를 책임져야 하니까. 아이는 자신조차 책임지지 않아도 되지만, 어른은 최소 자신은 책임져야 해."
시상식을 기점으로 갑자기 어른들 세상으로 들어온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자기들끼리 치열하게 살 거지 왜 나까지 끌어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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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적당히 하지 그랬어."
보아스가 혀를 찼다. 골든 보이 투표에 수작을 부린 걸 알았는지 상대는 통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M&P는 보아스가 맨손으로 일군 회사다. 축구 에이전트 부동의 1위이고 야구 에이전트도 1위다. 그리고 둘을 합치면 전 세계 에이전트 회사 중 으뜸이다.
"16살에 공격 포인트를 60개 이상 올린 선수가 7위라니. 말이 돼? 아무리 장래성을 더 본다고 해도 저 정도 퍼포먼스면 최소 3위 안에 들어야지."
보아스의 수하들은 골든 보이 투표권이 있는 자들에게 광범위한 로비를 벌였다. 투표권자에게 골프장 회원권을 무료로 대여한다든가, 출장 나갈 때 호텔 방으로 비싼 와인과 콜걸을 보낸다든가.
평소 그런 식으로 로비하고 투표가 임박했을 때 슬쩍 원하는 선수 이름을 티 안 나게 귀띔한다.
"설마."
경솔하게 입을 열었던 임원이 눈치를 보며 말을 잇지 않았다.
"말해."
"도우의 에이전트가 로비를 전혀 안 한 게 아닐까요?"
보아스의 회사가 부동의 1위라고 해서 다른 에이전시가 모두 무능한 건 아니다. 이들 역시 자신과 계약한 젊은 선수의 몸값을 높이려고 광범위한 로비를 한다.
로비하는 자가 많기에 모든 표가 M&P의 선수한테 몰리진 않는다. 그렇기에 골든보이 3위까지는 보통 공정해 보인다.
"골 때리는 놈이 나타났군."
전혀 이해가 안 되지만, 수하가 말한 가능성을 빼고 다른 이유를 찾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올해 골든 보이 관련해서 로비를 최소한으로 하고, 누구에게 투표하라고 언질을 주지 마. 그리고 큰 회사들에만 우리 결정을 조용히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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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백 영입은 여전히 진전이 없습니까?"
"페어린던의 이적이 생각보다 빨랐습니다. 그간 협상 중이던 선수 에이전트가 갑자기 주급을 더 부르고 조건도 몇 개 덧붙였습니다."
계약서에 감독이 동의하지 않으면 이적을 진행할 수 없다고 명확히 적었다. 그러나 합리적인 미국 사람 윌슨은 4천3백만 파운드라는 금액에 페어린던을 팔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새 풀백을 영입하는 작업이 생각보다 느려서 페어린던의 이적 협상이 먼저 끝났다. 페어린던의 이적 소식이 발표되자 상대방은 터무니없는 조건을 부르며 몸값을 올리려 했다.
"선수가 팀에 온다고 바로 경기를 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협상을 최대한 서둘러 주십시오."
리버풀이 서두른 것도 페어린던을 빨리 경기에 투입하기 위해서다. 도라익처럼 계약하자마자 주전으로 경기를 뛰는 일은 드물다.
도라익이 뉴캐슬 경기에 선발로 출전할 수 있었던 건 계약에 출전 보장 조항이 있고 스토크시티에 쓸 만한 공격수라곤 캠벨밖에 없는 상황이며, 강등에 대비하여 구단이 도라익을 키울 생각을 품었기에 가능했다.
1월 5일의 FA컵 경기에서 리버풀은 리저브 선수 위주로 짠 스쿼드에 페어린던을 포함하여 팀 전술과 분위기에 익숙해질 기회를 줬다.
리버풀로 이적한 페어린던이 2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에 기여한 반면, 1월 5일 FA컵에서 맨시티를 만난 스토크시티는 0:0 무승부 경기를 치렀다.
스토크시티가 잘한 게 아니라 상대가 완전히 엉망인 모습을 보인 덕이다. 맨시티의 수비는 그나마 탄탄했지만, 공격은 무질서 그 자체였다.
그리고 1월 8일. 프리킥 상황에 도라익이 밀어준 공으로 슈팅한 타이먼이 득점에 성공하며 1:0으로 버밍엄을 이겼다.
간접 프리킥이어서 직접 슈팅할 수 없기에 공을 밀어준 것뿐인데 생각지도 못한 도움 하나를 기록했다.
"지금 다들 간과하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팀은 29점으로 리그 10위를 차지하고 유로파리그 추첨도 약팀을 뽑았다. 16일에 맨시티와 재대결해야 하지만, 어차피 FA컵은 포기하기로 했기에 부담도 없다.
그러나 윌슨은 전에 없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도우의 징계가 풀렸습니다. 2월부터 국가대표 경기를 뛰어야 합니다."
찰리한테 휴식을 준 이유기도 하다. 둘이 동시에 퍼지면 팀 자체가 망가지기에 어떻게든 하나라도 살리려는 의도였다.
"3월에 월드컵 예선 경기가 2개 있군요."
"아시아에는 국가가 너무 많아서 문제입니다. 예선이 3라운드까지 있거든요."
1라운드는 순위가 낮은 팀들끼리 경기한다. 2라운드부터 한국팀이 참가하는데, 현재 한국은 4승 2패로 1위를 지키고 있지만, 마지막 2경기를 조 2위와 3위하고 벌인다.
한국이 두 경기 다 지고 2위와 3위가 마지막 2경기 다 이기면 이론상 한국은 3위로 월드컵 진출에 실패한다.
이론상으로만 가능하고 실제로 벌어질 확률은 거의 없는 일이지만, 현재 가장 훌륭한 폼을 보여주는 도라익이 대표팀에 차출되고 주전으로 뛰게 될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대표팀 감독하고 상의해서 도우를 혹사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안 그래도 그쪽 축협에서 먼저 연락이 왔습니다. 올림픽에 차출하는 걸 동의하면 3월에 도우를 대표팀으로 안 부르겠다고 합니다."
올림픽 축구는 FIFA 주관이 아니다. A매치 데이에는 대표팀의 차출에 거부할 권리가 없지만, 올림픽 차출은 구단의 동의를 반드시 얻어야 한다.
"토마스. 이번 여름에 도우와 재계약에 성공할 자신 있어?"
구단주가 토마스한테 질문했다.
"초상권 문제에서 양보하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른 구단을 보면 초상권을 구단에서 40% 이상 가져갑니다. 우리가 30%로 낮추면 재계약 가능성이 커집니다."
어차피 초상권을 통한 상업 활동이 저조한 스토크시티다. 레알 마드리드나 바이에른 뮌헨과 같은 팀의 10%는 아주 크지만, 스토크시티의 10%는 웃으며 양보할 수 있는 수치다.
"그 심리학 박사 누구지? 그 박사와 계약을 맺고 계속 도우와 상담을 하게 해줘. 다른 선수들도 가능하면 상담을 받게 하고. 그리고 도우가 경기 이외의 일로 신경 안 쓰도록 최대한 주의해."
구단주는 바보가 아니다. 스토크시티가 도라익을 영원히 품을 수 없음을 누구보다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구단주는 도라익을 최대한 오래 잡아두고 이적시킬 때 최대한 많은 이적료를 받아내는 게 목표다. 도라익이 스토크시티에 오래 머물수록 이후 이적할 때 받는 보상금이 많다.
도라익이 A팀으로 이적한 후, A팀에서 B팀으로 이적할 때 A팀이 받는 이적료의 일부를 스토크시티에 줘야 한다. 도라익이 이적을 빈번하게 할수록 스토크시티의 수익이 늘어나는데, 도라익이 스토크시티에 몇 년 있었는지에 따라 퍼센티지가 달라진다.
"재계약이 안 되더라도 계약 기한이 1년 남을 때까지 도우를 팀에 남겨야 합니다."
윌슨은 도라익이 없는 스토크시티를 상상하기 두려웠다. 전술적인 움직임은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보이지만, 그걸 상쇄하고도 남을 득점력과 열정을 보유했다.
도라익의 열정이 팀에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은 득점력과 비등하다.
"그렇다면 한국 축구협회와 딜을 할 필요가 없겠군요. 차라리 A매치에 보내고 올림픽 출전을 거부하는 게 좋겠습니다."
구단주는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선수가 출전을 원할 수도 있잖습니까. 베이징 올림픽에도 구단이 거부했지만 메시 본인이 고집을 부려 참가했죠."
웬만한 선수면 팀에서 징계를 내렸겠지만, 무려 메시였기에 조용히 넘어갔다. 그리고 도라익이 현재 스토크시티에서 갖는 위상은 메시 이상이다.
"갑자기 골치 아픈 일들이 몰려오네요."
"동양에 그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행운과 불행은 쌍둥이여서 혼자 다니지 않는다고."
도라익을 영입하며 스토크시티는 수많은 이익을 얻었다.
도라익을 영입함으로써 전술 변경을 결심했고, 전술을 바꾸기 위해 톰 인스를 팔았다. 그때 영입한 페어린던이 훌륭한 모습을 보여 리버풀로 이적하며 거액의 이적료를 안겨줬다.
상상도 못 했던 리그컵 우승도 하고 팔자에도 없던 유로파리그에 진출하여 토너먼트까지 갔다.
거기에서 5경기 연속 해트트릭을 하며 스토크시티의 팬이 급증했다. 도라익의 유니폼과 굿즈 판매로 얻은 2031년 수익이 지난 10년 마케팅 수익의 2배에 조금 못 미친다.
이러한 좋은 일이 가득해서 즐거운 동시에 스토크시티는 도라익 때문에 예전엔 없었던 일들로 골머리를 앓기도 했다.
"이런 고민을 하는 자체가 행복한 일이죠. 매년 같은 일만 반복하는 것보다는 훨씬 의미 있지 않겠습니까."
노화가 심한 스토크시티는 도라익 덕분에 세대교체도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다. 맨유와 같은 강팀도 세대교체로 진통을 겪는데 스토크시티는 오히려 세대교체로 강해졌다.
"행복한 만큼 불안하기도 하죠."
구단주는 도라익 덕분에 좋은 카드를 들고 어떻게 베팅을 유도할지 고민하는 겜블러의 고충을 이해하게 되었다.
- 작가의말
아무것도 안 하는 거로 유럽 축구계의 질서를 깨버린 에이전트계의 찬란한 신성 최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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