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2034년 6월 11일.
이집트 월드컵 개막전이 수도 카이로에서 열렸다. 주최국인 이집트가 폴란드를 2:1로 이기면서 좋은 시작을 끊었다.
이집트의 승리로 현지인들이 월드컵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이 늘어 다른 경기 티켓들도 잘 팔렸다.
특히 E조의 두 번째 경기 티켓이 암표가 돌 정도로 호황이었다. 대결하는 두 팀에 도라익과 바르사의 10번 그리고 맨시티의 3번 등 스타 선수가 있기 때문이다.
"도우, 바르사의 10번이 한국팀과 상대하는 경기에서 최소 3골로 대승할 거라고 장담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차 감독과 도라익 그리고 오창범이 경기 전 인터뷰에 응했다. 도라익이야 대표팀 최고의 스타니 당연히 참석해야 하고, 오창범은 관종 기질이 있어 인터뷰 나간다고 경기 컨디션이 하락할 걱정이 전혀 없기에 둘이 당첨됐다.
"메시는 은퇴한 게 아니었나요?"
도라익의 대답에 기자들이 빵 터졌다.
"멕시코의 자타 선수를 말하는 겁니다. 재작년 챔피언스리그에서 대결한 적도 있잖아요."
"미안합니다. 그땐 제 앞가림하기도 바빠서 상대 선수들 이름까지 살피지 못했습니다."
진심이 가득 담긴 표정과 말투에 기자들은 도라익이 자타를 먹이는 건지 진짜 모르는 건지 헷갈렸다.
"자타를 모른다는 건 바르사로 이적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인가요?"
"내일 에이전트랑 만나서 이적 진행을 듣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이적 관련해선 다음에 물으시죠."
"멕시코엔 바르사의 10번 자타뿐이 아니라 맨시티의 콘카도 있습니다."
"3번 센터백 말씀하시는 거죠? 알아요."
키 176으로 몸이 짱돌처럼 단단하고 스피드가 출중한 센터백이다.
"리그에서 몇 번 대결했는데, 승패가 어떻게 되었나요?"
"축구는 팀 스포츠입니다. 전술이 다르고 수행하는 롤이 다르기에 리그 데이터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33살로 노장에 드는 김춘호도 긴장으로 한 시간에 화장실 세 번씩 찾는다. 그래서 도라익은 대표팀 선배들의 긴장을 가중하지 않으려고 인터뷰 내내 조심에 조심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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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국민 해설 강철민이 드디어 월드컵에 왔습니다.
- 안녕하십니까. 일 년 내내 말실수 한 번 안 하나 징계는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많이 받는 박만호입니다.
- 내가 평소 밥 자주 사잖아요.
- 채팅에 용돈 월 30 주는데 무슨 돈으로 밥 샀냐고 질문하는데요?
- 여보. 아니야. 사실 만호가 샀어.
"으이구, 대학 선배만 아니었으면 옛날에 잘랐을 텐데."
최 PD가 흐뭇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욱하는 성격과 짧은 생각으로 징계가 잦은 강철민 때문에 본인 역시 벌금을 많이 물긴 했지만, 덕분에 쟁쟁한 선배들을 꺾고 드디어 월드컵 생중계의 메가폰을 잡았다.
- 경기 전 인터뷰에서 약간 신경전이 있었죠?
- 제가 아는 도라익 선수라면 진짜 자타 선수를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 그건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도라익을 0 슈팅으로 묶겠다고 장담한 콘카 선수 그리고 3골로 이긴다던 말을 본인이 해트트릭하겠다고 바꾼 자타 선수를 말하는 겁니다.
- 일부러 도발한 건 아니지만, 도라익 선수 덕분에 두 가지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콘카 선수가 도라익 선수를 주로 마킹할 거란 정보구요. 하나는 자타 선수가 팀의 마무리라는 거죠.
- 스토크시티나 대표팀에서 모든 골을 도라익 선수가 넣는 게 아닙니다. 경기 전 훈련에서 컨디션이 특별히 좋은 선수가 그날 경기의 마무리가 되는 겁니다. 자타 선수가 마무리라는 정보는 꽤 가치가 큽니다.
- 오늘 경기의 관건은 도라익 선수가 콘카 선수를 언제 뚫는지, 한국팀이 바르사와 멕시코의 10번을 얼마나 잘 막는지가 관건이겠네요.
마침 양 팀 선수들의 몸풀기가 시작됐다. 가끔 도라익 쪽을 바라보는 자타와 콘카와 달리, 도라익은 멕시코 쪽으로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 도라익 선수 컨디션이 좋아 보입니다.
- 몸이 가볍고 얼굴도 편합니다.
롱 패스와 삼각 패스 등으로 몸풀기를 하고 단체로 걸으면서 잔디 상황을 체크한 후, 양 팀은 경기 준비하러 선수 대기실로 돌아갔다.
- 역사 전적은 멕시코가 우위입니다. 그러나 별 의미가 없죠.
- 정식 경기에서 멕시코가 4승 1무 3패로 1경기 앞섭니다. 친선경기에선 5승 1무 2패로 많이 앞섰습니다.
- 그러나 친선 경기는 말 그대로 친선 경기죠. 멕시코의 선수 비축이 한국보다 낫다는 뜻이지 멕시코가 한국보다 강하다는 뜻은 아니거든요.
- 상대는 자타와 콘카가 있다지만, 우리도 혼자서 열 사람 몫을 거뜬하게 하는 도라익이 있습니다.
두 번째 월드컵이지만, 차 감독은 첫 월드컵과 똑같이 떨렸다. 도라익이 있어 기대치가 크기에 오히려 더 떨리는 느낌도 없잖아 있었다.
'라익이가 있고 혁신이도 있고, 창범이도 많이 성장했다. 창식이 역시 어디서 꿀리는 실력이 아니고.'
미드필드가 약한 약점은 도라익의 활동량으로 메꾸면 된다.
'축협에 가서 인재양성에 힘써야 해.'
미드필드가 약한 탓에 도라익이 많이 뛸 수밖에 없고, 아마 3경기나 4경기면 완전히 퍼질 것이다. 미드필드가 일본 정도만 돼도 16강을 넘어 8강까지 넘볼 수 있을 것 같아 너무 안타까웠다.
"알다시피 콩고는 실력이 월드컵에 어울리지 않는 팀이다."
같은 조의 2팀이 내전을 이유로 중도에 빠진 덕분에 어부지리로 월드컵에 진출한 콩고다.
"16강에 가려면 멕시코를 이기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다. 오늘 못 이기면 다음 경기에 스페인을 이겨야 하니까. 둘 다 못 이기면 마지막 경기에 콩고를 이기고 스페인과 멕시코의 결과에 우리 운명을 맡겨야 한다."
멕시코와 스페인 둘 다 못 이기면 마지막 경기 전에 축구 전문가가 아닌 수학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난 운이 별로 좋은 사람도 아니고, 그딴 식으로 16강 진출하고 싶지 않다."
차 감독은 말을 멈추고 김춘호와 눈을 맞췄다.
"춘호야. 저쪽에 이름이 메시가 아닌 10번이 해트트릭하겠단다."
"경기 끝날 즈음에 울면서 자기 골대로 슛하게 만들겠습니다."
김춘호의 재치 넘치는 대답에 선수들이 웃었다.
"라익아. 저쪽 3번이 널 슈팅도 못 하게 한다던데?"
"정 어렵다 싶으면 우리 골대로 슛하겠습니다."
딱딱하던 분위기가 완전히 풀어졌다.
"팀의 주장은 여전히 명준이랑 춘호다. 그러나 월드컵 동안만 경기장에서 주장 완장을 라익이가 찬다. 의견 있어?"
"없습니다!"
오창범이 우렁차게 외쳤다.
고명준이 한결 편한 얼굴로 주장 완장을 도라익의 왼팔에 달아줬다. 완장을 보낸 고명준은 커다란 혹을 뗀 듯 시원한 느낌이었다.
"임시 주장. 한 말씀 해야지."
도라익은 오감을 총동원해 분위기를 느끼며 어떤 스탠스를 보여야 팀의 전력을 최고치로 뽑아낼 수 있을지 잠깐 고민했다.
"선배님들."
생각을 마친 도라익이 입을 열었다.
"오늘 해트트릭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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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에스코트를 맡은 여자애가 질문했다.
"응. 나 아직 스무 살 안 됐어."
"오빠 아직 젊은 나이잖아요. 진짜 그 얼굴이 하얀 여자랑 결혼할 거예요?"
"응. 월드컵 끝나면 바로 할 건데."
"좀 더 생각해 보세요. 오빠 아직 젊어요. 결혼은 경솔하게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
"경솔하게 결정한 거 아니야."
"엄마가 없을 때 아빠가 맥주 마시면서 늘 그래요. 결혼해서 좋은 건 너 만난 거밖에 없다고. 오빠도 괜히 일찍 결혼해서 후회하지 말고 한 십 년만 더 기다려 봐요."
"뭘 기다려?"
"십 년이면 저도 19살이 되거든요. 그때 저를 보고 다시 결정해도 안 늦어요."
그때 도라익 바로 뒤에 섰던 이혁신이 끼어들었다.
"난 어때? 난 아직 여친도 없는데."
"아저씬 너무 늙었어요."
"응? 나 라익이보다 세 살 많은데."
"내 스타일도 아니에요."
도라익 이전에 대표팀의 여성 팬 지분 99%를 차지했던 이혁신이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때서? 라익이하고만 비교하지 말고, 다른 아저씨들 얼굴도 봐."
"느끼한 남자 싫어해요."
이혁신이 세상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자외선 차단제를 바른 탓에 본인이 생각해도 조금 느끼해 보이긴 했다.
그때 콘카가 다가와서 도라익에게 악수를 청했다.
"잘 잤어?"
"아니. 멕시코 팀 약점을 찾느라 밤샜어."
도라익의 대답에 콘카가 킥 웃었다.
"그렇게 찾기 힘들었어?"
"아니. 너무 많아서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
멕시코 선수 대부분은 영어를 모른다. 그래서 도라익과 콘카가 친분이 있어서 다정하게 대화하는 줄로 오해했다.
"우리도 한국팀 분석하는 데 석 달이 걸렸어. 선수 개인뿐만 아니라 팀 전술에도 문제점이 많더라. 특히 미드필드가 참 가관이던데."
도라익은 인터뷰 때 아꼈던 필살기를 꺼냈다.
"하긴. 맨시티처럼 완벽한 팀에서 맨날 우승만 하다 보니 우리 팀 같은 건 눈에도 안 차겠지."
과디올라가 떠난 후 '무관의 제왕' 소리만 듣던 맨시티다.
"자타, 돌아가서 마음을 다스려."
우승과 거리가 먼 건 바르사 역시 마찬가지다. 바르사나 레알이나 고위층이 허튼짓을 한 건 마찬가지지만, 메시의 은퇴와 맞물려 바르사가 받은 타격이 훨씬 컸다.
괜히 도라익을 도발하려다간 자타의 멘탈이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
기세등등하여 참전하려던 자타를 돌려보낸 콘카가 단단한 얼굴로 말했다.
"클럽 성적이랑 대표팀 성적이랑 관계가 없다고 말한 건 너잖아. 나도 그 말에 동의해."
"좋아. 각자 열심히 해서 좋은 경기 펼치자."
대화를 마친 도라익은 콘카의 은근한 도발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을 마주해야 했다. 도라익의 손을 꼭 잡은 에스코트 어린이가 십년지약에 대한 도라익의 대답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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