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
38라운드 홈 경기는 스토크시티엔 축제였다. 경기가 30라운드까지 진행됐을 무렵만 해도 19점으로 리그 꼴찌였고, 19위와도 점수 차이가 6점이나 됐다.
그런데 기적과 같은 7연승으로 리그 잔류가 확정됐고, 도라익마저 복귀했다.
반면, QPR에겐 지옥과 같은 하루였다. 어렵게 승격한 프리미어리그인데 첫 시즌에 강등하고 말았다. 어쩌면 대부분 선수에게 오늘 경기가 인생의 마지막 프리미어리그 경기일지도 모른다.
- 화면에 잡힌 아기가 도라익 선수 아들인가요?
- 네, 맞습니다. 이름은 도민호고 태명은 무지라고 합니다.
- 좋은 태명이네요.
엘은 커다란 선글라스로 눈을 가렸다. 걱정으로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눈이 부은 탓이다.
엘 곁에는 최경호와 잭이 앉았다. 무지는 잭의 허리까지 흘러내린 머리에 홀려 경기장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 경기 시작합니다.
- 양 팀 선발 소개하겠습니다.
도라익이 선발로 출전했기에 강철민과 박만호의 목소리에 힘이 흘러넘쳤다.
- 도라익 선수 오늘 공격수로 출전했습니다.
- 우디르가 왼쪽 윙으로 출전했고 산체스 선수가 오른쪽 윙입니다.
- 키퍼는 데이비스입니다. 페데리치 선수는 부상으로 출전 명단에 제외되었습니다.
- 마찬가지로 토미 선수 역시 작은 부상으로 결전했습니다.
- 미드필더는 제임스와 루이스 그리고 발제르가 출전했습니다.
- 오창범과 맥자넷이 풀백으로 출전했고, 센터백은 네이선과 보크스입니다.
정면 수비가 부족하지만, 안정감이 있고 헤딩이 특출나며 공격 공헌도가 높은 줄리엔은 다음 시즌 주전 자리를 예약한 거나 마찬가지다.
이미 기간 2년짜리 계약에 사인한 테일러는 다음 시즌 구상을 위해 네이선과 보크스를 선발로 올렸다.
네이선은 헤딩을 잘하고 남은 스텟도 고르지만, 낮은 크로스를 흘리는 약점이 있다. 보크스는 대인 수비가 장점이고 정면 수비도 잘하지만, 실책을 범하면 급격히 무너지는 문제점이 있다.
큰돈을 들여 우수한 센터백을 영입할 형편이 안 되는 스토크시티기에 테일러는 최대한 두 선수의 장단점을 알아내 적절히 써먹어야 한다.
- 도라익 선수, 공을 잡습니다.
도라익은 드리블을 조금 하다가 왼쪽 윙으로 출전한 우디르에게 패스했다.
공을 받은 우디르는 도라익의 엄호를 받으며 상대 선수 두 명을 연신 제쳤다. 도라익 때문에 우디르에게 수비를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QPR 선수들의 경기 집중력이 떨어진 탓이 훨씬 컸다.
- 크로스!
도라익과 체인지해서 가장 앞으로 갔던 발제르가 높이 점프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공을 건드리기만 했다.
발제르의 머리에 살짝 맞은 공은 반대편으로 흘렀다.
오버래핑한 오창범이 공을 잡았다. 공을 잡은 오창범은 고개를 들어 산체스의 위치를 확인했다.
'가까워.'
공을 띄우기엔 너무 가깝다. 땅볼로 패스하기엔 중간에 장애가 있다.
오창범은 안으로 패스하는 척 페이크를 준 다음, 수비수의 가랑이를 빼고 안으로 침투했다. 집중력이 부족했던 QPR 수비수는 속절없이 돌파당했다.
달리며 고개를 들어 안의 상황을 확인한 오창범은 크로스를 올렸다. 도라익은 물론 우디르까지 페널티 박스 안으로 들어왔고, 발제르 역시 괜찮은 위치를 잡고 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 아, 높습니다.
돌파당한 수비수가 속도를 죽이고 크로스를 올리는 오창범을 손으로 당겼다. 살짝 몸이 흔들린 오창범은 예상보다 높은 크로스를 올렸다.
'이건 어렵겠는데.'
점프하면서도 도라익은 자신이 없었다. 오창범이 휘청이는 걸 보고 있는 힘껏 뛰긴 했으나 공에 못 닿을 것 같았다.
'어?'
놀랍게도 머리 윗부분에 느낌이 있었다.
'내가 공을 건드렸다고?'
젖 먹던 힘까지 꺼낸 탓에 도라익은 착지에 실패해 넘어졌다.
'뭐지?'
발제르가 웃는 얼굴로 달려왔다. 오창범 역시 양손 번쩍 들고 만세 자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도라익은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런데 어느새 달려 온 우디르가 뒤에서 껴안으며 시야를 방해했다.
"뭔데?"
"골이야. 골이 됐어."
마치 데뷔전에 일본에 넣은 첫 골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도 꽤 오랜 기간 골이 들어간 줄 모르고 굳어 있었다.
몸을 일으킨 도라익은 세리머니도 생략하고 대형 화면을 확인했다. 도라익이 대형 화면을 바라보자 생중계 감독이 재치있게 골 장면을 바로 재생했다.
"내가 저렇게 높이 뛰었어?"
도라익의 머리 상단에 맞은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골대에 들어갔다. 만약 키퍼가 도라익이 흘린 공을 잡으려고 골대를 비우지 않았으면 절대 골이 되지 않았을 느린 공이었다.
운이 좋았다.
- 도라익 선수, 점프가 예전보다 나아진 거 같은데요.
- 다친 적 없는 사람처럼 돌아온 게 아니라 업그레이드해서 돌아왔습니다.
- 괜히 도라익 선수가 뼈를 금속으로 교체하고 인공 관절을 했다는 소문이 돈 게 아니죠.
'즐기고 집중하니까 저렇게 높이 뛴 거야.'
사실 마음먹는다고 바로 경기를 즐길 수 있는 게 아니고, 점프하면서 못 건드릴 것 같다고 잡생각을 했다.
그러나 도라익은 알론소의 조언대로 즐기고 집중한 덕분이라고 여겼다.
알론소의 말대로 많은 일엔 정답이 없다. 답을 고민하는 과정이 중요하고, 어떤 답을 선택하는지가 중요하다.
그간 치열하게 고민했기에 도라익의 의구심이 줄었고, 덕분에 긍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강등이 확실하다고 전문가들이 입을 모으는 상황에 잔류를 결정지었고, 도라익이 어마어마한 점프로 골을 넣은 스트크시티의 기세가 하늘을 쑤셨다.
반대로 8라운드 전까지만 해도 리그 18위로 잔류 희망이 컸던 QPR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경기는 스토크시티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흘렀다.
- 네이선 선수, 헤딩으로 득점합니다.
프리킥 상황에 네이선이 득점하며 점수를 2:0으로 바꿨다.
- 도라익 선수, 웃습니다.
- 즐겁게 웃어요. 예전처럼 해맑습니다.
도라익은 포워드로 뛰다가 발제르와 위치를 바꿔 미드필더처럼 뛰기도 했다. 가끔은 우디르와 자리를 바꿔 윙으로 뛰기도 했고, 드물게 오른쪽 윙 자리로 가서 오창범과 패스를 주고받기도 했다.
경기가 진행됨에 따라 도라익의 근심과 걱정들이 훨훨 날아갔다.
- 산체스 슛!
도라익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홀가분한 마음이 되었다. 덕분에 평소와 달리 좀 더 과감한 플레이를 펼쳤다.
돌파를 즐기지 않던 산체스가 컷 인하여 왼발로 슛을 때렸다.
QPR 키퍼가 몸을 날려 산체스의 슛을 쳐냈다.
- 루이스 슛!
집중력이 저하한 QPR 선수들은 수비 진형도 제대로 못 갖췄다. 그 탓에 흘러나온 공을 편하게 잡은 루이스가 슛을 때렸다.
또 키퍼가 몸을 날려 공을 막아냈다.
- 도라익 슛!
흘러나온 공은 도라익이 잡았다. 도라익은 강하게 차지 않고 발등으로 공을 밀어 땅볼로 슛했다.
- 골! 도라익 선수 멀티 골입니다.
- 정말 편한 슛이었습니다.
분명히 첫 골의 점프력이 훨씬 놀랍다. 그러나 산책하듯 편하게 한 두 번째 슈팅이 훨씬 마력이 있었다.
- 슈팅 장면 계속 보고 싶네요.
- 고수는 멋지고 화려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거라고 했습니다. 도라익 선수의 슈팅이 바로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 보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뭐랄까, 도라익 선수의 온몸이 하나로 조화된 것 같습니다.
여전히 고민이 남고 트라우마가 남고 마음에 찌꺼기가 남았다. 그러나 그간 치열하게 고민하고 답을 찾은 게 쓸데없는 짓은 아니어서 도라익의 마음은 어느 정도 평온을 찾았다.
자신의 답이 틀렸다고 느끼면 다시 혼란에 빠질 수도 있지만, 도라익은 사고 트라우마의 영향을 벗어나 그간 복귀를 위해 열심히 훈련한 성과를 만천하에 알리고 있었다.
- QPR 진형이 분열됐습니다.
3골을 먹은 QPR은 철저히 무너졌다. 공격형 선수들은 기왕 3골이나 먹은 거 한 골이라도 만회하겠다고 공격적인 태세를 갖췄고, 수비수들은 허물어진 수비 진형을 다듬느라 정신이 없었다.
덕분에 스토크시티 미드필더들이 완전히 살아났다. 공격수와 수비수의 지원을 제대로 못 받은 QPR 미드필더들은 스토크시티의 패스워크에 속수무책이었다.
- 제임스 패스!
- 도라익 선수 흘립니다.
포워드 위치를 잡고 있던 도라익이 뒤로 달리며 패스를 요구했다. 제임스가 오른발로 부드럽게 공을 굴려 도라익에게 줬다.
그런데 도라익은 공을 잡지 않고 가링이로 흘렸다.
- 발제르 침투!
도라익이 흘린 공을 잡은 발제르가 안으로 침투했다. 센터백 한 명이 도라익을 따라 밖으로 나온 탓에 공간이 꽤 컸다.
- 패스합니다!
예상과 달리 발제르는 슈팅 대신 패스했다. 발제르가 왼쪽으로 패스한 공은 속도가 빠른 우디르가 잡았다.
- 골! 우디르 골입니다.
제임스의 패스를 도라익이 흘렸고, 공을 잡은 발제르가 공간에 침투했다. 순간, 우디르를 수비하던 센터백이 발제르를 향해 달렸다.
발제르는 슈팅해도 되지만, 확실한 골을 위해 왼쪽으로 비스듬히 패스했고, 우디르가 공을 잡아 키퍼 가랑이 사이로 밀어 골을 넣었다.
- 선수들이 기계처럼 움직이네요.
산체스가 안으로 좁히며 제임스의 패스를 받으려 했고, 오창범 역시 오버래핑해서 QPR 풀백을 잡아뒀다.
우디르의 골은 여섯 선수의 유기적인 움직임이 만들어낸 필연의 결과였다.
- 홈팬들 난리 났습니다.
팀의 잔류, 도라익의 복귀, 8연승. 팬들이 기뻐할 이유는 많았다.
- 도라익 선수를 언급한 플래카드가 많이 보이네요.
- 고맙다는 인사가 많고, 다른 데 가지 말고 남아달라는 요청도 많습니다.
- 아, 어디 가든 건강하라는 응원도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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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전이 시작하자마자 골 하나 먹었지만, 스토크시티의 사기는 여전히 드높았다.
도라익이 공을 잡았다.
선수 한 명이 접근했다. 도라익은 가볍게 상대를 제친 후 가속했다.
돌파 후 가속은 부상을 방지하는 용도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가속한 도라익 때문에 상대 선수들이 통일된 반응을 보이지 못해 수비진에 틈이 생겼다.
도라익은 주저하지 않고 틈을 찔렀다.
패스를 받은 발제르가 앞으로 드리블했다. 수비수 두 명이 발제르의 앞을 막았다.
발제르는 확인도 안 하고 왼쪽으로 패스했다.
어느새 달려 온 도라익이 공을 앞으로 툭 치고 달렸다. 수비수가 도라익의 앞을 막으려 했지만, 너무 빨랐다.
키퍼가 얼굴을 찡그리고 앞으로 나와 각을 좁혔다.
도라익은 드리블 방향을 살짝 왼쪽으로 틀었다. 앞으로 나오던 키퍼가 뒤로 물러서며 자신의 오른손 편으로 움직였다.
도라익이 급정지하며 공을 오른발로 보내 먼 포스트를 노렸다. 가까운 포스트 쪽으로 움직이던 키퍼가 다리를 쭉 뻗어 막으려 했다.
페이크에 성공한 도라익은 다시 왼쪽으로 갔다. 슈팅 각이 생겼다.
도라익은 왼발로 부드럽게 공을 밀어 가까운 포스트를 스치는 골을 만들었다.
경기 65분. 도라익이 즐거운 얼굴로 테일러에게 교체를 요청했다.
- 작가의말
오늘 소위 악플을 받았습니다. 2019년에 완결한 글에 설명 더럽게 못 한다며, 다른 작가 글 읽고 좀 배우라고 하더군요.
저는 이과 출신입니다. 회사 다닐 때도 기술 문서만 다뤘습니다. 프로토콜이나 프로세스를 다루는 기술 문서는 정확히 설명하는 것과 읽는 사람이 오해 없도록 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제 초반 글이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오해 소지가 적은 정확한 전달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문체가 딱딱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어떻게든 고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설명 더럽게 못 한다는 말을 들으니 또 헷갈리네요. 2년 전에 완결한 글이지만, 문체를 부드럽게 하느라 내가 정확한 서술을 등한시했나 반성을 하게 되네요.
그러다 보니 정확한 설명이 과연 내 장점일지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시비조의 댓글이지만, 뭔가 고민하게 해줘서 한편 고맙게 생각합니다.
물론, 반말로 적은 댓글이어서 바로 신고했습니다. 댓글란 환경 문제는 쿨하고 펀하고 스윗하게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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