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
구단의 배려로 잭은 아빠와 함께 구단 버스에 탑승했다.
"너 이름이 마이클인데 왜 잭이야?"
"동화책에 나오는 잭을 좋아하거든."
"우리 우승했으니까 너도 곧 나을 거지?"
"아닌데. 난 리그 우승을 원해."
잭의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다 나았습니다. 지금은 회복 치료를 받는 중이죠. 애가 모르고 한 말 때문에 걱정 많이 하셨죠?"
해적처럼 생긴 잭의 아버지는 놀랍게도 대학교수였다. 그것도 시를 가르치는 사람이란다.
수염 가득한 얼굴과 거친 목소리로 사랑의 시를 학생들에게 읊어주는 모습을 상상한 도라익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웃음을 겨우 참아냈다.
"그리고 아이 이름을 잭으로 개명하기로 했습니다. 미들네임은 한국 이름 '잭'으로 정했고요."
Jack·잭·Berkeley
잭의 새 이름이었다.
차가 막혀 버스가 멈춘 사이, 선수들은 도라익의 18번 유니폼과 축구공에 단체로 사인해서 잭에게 선물했다.
잭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샘 앨런의 유니폼과 버틀랜드의 장갑을 원했고, 단체 사진도 요구했다.
"도우. 난 약속 지켰으니까 너도 꼭 지켜야 해. 리그 우승 꼭 해야 해."
런던을 벗어나기 전에 잭과 잭의 부친이 차에서 내렸다. 선수들은 암과 싸워 이긴 꼬마 영웅을 열렬한 환호와 박수로 배웅했다.
"다들 눈 좀 붙여. 지금 스토크시티에선 퍼레이드 차가 우릴 기다리고 있어. 시장을 비롯해 30만 스토크시티 주민이 우리랑 밤새워 놀려고 기다린다고."
170년 가까운 역사에서 두 번째로 얻은 우승컵에 흥분한 스토크시티 주민들이 이미 자발적으로 모였다고 한다.
경기로 피곤했던 대부분 선수는 바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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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일어난 도라익은 최경호를 깨워 아침을 간단히 먹은 후 훈련장으로 갔다. 도라익을 훈련장까지 태워준 최경호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 다시 꿀잠에 빠졌다.
관리인 할아버지한테 가서 공 다섯 개를 빌려 나온 도라익은 준비운동으로 관절을 풀고 달리기로 몸을 덥혔다.
혼자 슈팅 훈련을 하다 보니 어느새 산체스가 나타나 느리게 달렸다. 시계를 확인하니 정확히 집합 30분 전이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산체스는 30분 내내 달리지 않고 집합 10분 전에 멈춰 말을 걸었다.
"도우. 어젠 왜 일찍 빠진 거야?"
늦은 밤이기에 퍼레이드는 간단하게 치러졌다. 구단 버스에서 퍼레이드 차 석 대로 나눠 탄 감독과 선수들은 시청 광장까지 갔고, 거기에서 시장과 구단주가 연설하고 음악을 틀어 무도회를 벌였다.
불꽃놀이는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린 탓에 조금 늦은 시간에 했다.
도라익은 시청에 도착하자마자 직원의 도움을 받아 뒷문으로 먼저 귀가했다.
"일찍 자야 일찍 깨지."
산체스도 페이스가 확실한 사람이다. 부끄러움이 많아 잘 나서지 않을 뿐, 자기 주견이 확고한 편이다.
그러나 도라익처럼 잠잘 시간이라고 구단 행사를 빠지는 건 상상해본 적조차 없다.
남미에서부터 세면 이미 프로 생활이 7년이나 된다. 그러나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이어서 도라익에게 뭔가 조언을 건넬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넌 늦게 잤는데도 평소랑 똑같이 나왔네?"
"응. 언제 자든 깨어나는 시간은 똑같아."
"그럼 준비운동 좀 더 해. 몸이 평소랑 다를 텐데 똑같이 움직이면 안 돼."
"고마워."
집합 시간에 맞춰 온 대부분 선수가 여전히 우승의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회복 훈련은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훈련이 끝난 후 버틀랜드가 종이 한 장 들고 와서 선수들한테 서명을 요구했다.
"이거 뭐야?"
"응. 리그컵 우승 상금 30만 파운드를 소아암 환자를 위해 기부한다는 서명이야. 70%는 치료비로 쓰일 거고 30%는 가정 형편이 곤란한 환자의 생활비로 쓰일 거야."
"우승 상금이 고작 30만 파운드야?"
"10년 전엔 10만 파운드밖에 안 했어."
도라익을 비롯해 모든 선수가 종이에 서명했다. 감독과 코치들도 서명을 완성하자 버틀랜드는 구단주 사무실로 찾아갔다.
버틀랜드의 설명을 들은 구단주가 개인 돈 30만 파운드를 추가하여 기부 금액을 60만 파운드로 올렸다.
"뭐지? 구단주가 갑자기 왜 이럴까?"
수전노 구단주의 기행은 바로 뉴스가 되었고, 오후가 되자 스토크시티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될 정도로 널리 퍼졌다.
그리고 갓 깬 아침의 한국에서도 포털 사이트들이 기부 관련 뉴스로 도배됐다.
[도라익이 쏴 올린 작은 공, 커다란 눈덩이가 되어 돌아오다.]
[도라익의 스토크시티가 리그컵 결승을 이 악물고 뛴 이유는?]
[소아암과 사투 벌이는 소년 잭과 도라익의 사연.]
[스토크시티 구단, 리그컵 우승 상금을 소아암 환자 위해 전액 기부.]
[통 큰 구단주의 기부. 우승 상금 묻고 더블로 가.]
[도라익 : 난 우승할 테니 넌 암을 이기거라.]
[도라익의 첫 옐로카드에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
[달라진 도라익과 스토크시티, 그 이유는 잭.]
보름이 조금 넘은 기간 도라익을 난폭하게 비판하고 비난하던 언론들이 태세를 바꿨다. 리그컵 우승을 찬양하고 도라익의 플레이를 칭송하고, 특히 잭과 관련한 미담을 대서특필했다.
최경호는 아마 머리에 꽃 꽂은 여자의 죽 끓듯 한 변덕도 언론이 얼굴 바꾸는 속도를 따르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스토크시티 구단이 공격적인 아시아 마케팅을 개시했다. 오늘부터 인터넷으로 구단 굿즈 및 선수 유니폼 직구가 가능하다. 3월 주문에 한해 국제 배송비를 면제한다."
한국 뉴스를 읽은 최경호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구단주와 비교하면 자신은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는 애송이뿐이라는 생각에 강한 자괴감이 들었다.
"이 좋은 기회를 왜 이용할 생각 안 했을까? 나 같은 놈은 그냥 죽는 게 나아."
샤워를 마치고 나온 도라익이 최경호에게 질문했다.
"형. 혼자서 뭘 그리 중얼거려?"
"이번 기부 때문에 한국이 시끌벅적해. 구단주는 30만 파운드 기부해서 명예도 챙기고 실익도 챙겼어. 근데 난 아무것도 못 했어."
"매일 훈련장까지 태워다 주고 맛있는 음식도 해주고. 그럼 된 거지."
"아니야. 이제부터 난 달라질 거야. 축구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널 세심하게 케어할 거야."
머리를 문지르던 수건을 빨래통에 던진 도라익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형은 요리할 때와 운전할 때가 제일 듬직해."
최경호는 입술을 쭉 내밀어 불퉁한 얼굴을 하고 대화를 거부했다. 도라익은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며 쇠렌센 등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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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1년 3월 4일. 더 스카이 스타디움.
경기장 분위기는 드물게 화기애애했다. 원정 온 토트넘 팬들이 아스널을 이겨줘서 고맙다고 플래카드를 걸었다.
화가 유독 많은 스토크시티의 마초들도 곧 170년 되는 구단 역사상 두 번째 우승컵으로 성질이 말랑말랑해졌다. 거기에 수전노 구단주가 리그컵 우승 상금에 30만 파운드를 추가해 기부한 덕분에 분위기가 나쁠 수 없었다.
뭔가 달라졌고, 달라지고 있고, 달라질 거라는 희망이 움텄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하고 고작 10분. 분위기가 뒤집혔다. 토트넘은 빠르고 간단한 패스와 양쪽 윙의 개인 돌파로 스토크시티의 수비 라인을 깨고 연속 2골을 넣었다.
"우린 몸은 지쳤으나 정신이 고양됐다. 그래서 몸이 생각처럼 안 움직이는 거다. 이젠 흥분도 가라앉았으니 제대로 뛸 수 있을 거야. 우선 골 하나 넣는 것부터 생각하자."
샘 클루카스의 말에 선수들이 안정을 찾았다. 리그컵 우승을 하면서 들뜬 탓에 다들 마음만 앞섰다. 머리로는 분명히 될 것 같은 일들을 몸이 해내지 못하자 아주 싱겁게 2실점을 한 것이다.
클루카스의 말대로 흥분이 가라앉은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자세도 낮아지고 발을 뻗을 때 한결 신중했다. 2골을 앞선 토트넘마저 노련하게 템포를 늦춘 바람에 경기가 지루해졌다.
'분위기를 살려야 한다.'
도라익은 세 명의 토트넘 선수한테 둘러싸인 제임스 쪽으로 접근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여기!"
제임스는 페이크를 섞어가며 패스했다. 공이 토트넘 선수의 다리에 맞아 살짝 굴절되긴 했지만, 결국 도라익의 발밑으로 왔다.
공을 잡은 도라익은 바로 수비수를 등진 찰리한테 패스하고 앞으로 뛰었다. 찰리는 공을 안정적으로 받은 후 도라익이 달리는 경로로 리턴 패스했다.
토트넘의 센터백은 도라익이 왼쪽으로 갈 수밖에 없도록 절묘한 위치를 잡았다. 도라익이 오른쪽으로 향한다면 찰리를 마킹하는 센터백이 달려와서 공을 처리할 가능성이 크다.
도라익은 모험 대신 안전하게 왼쪽을 선택했다. 센터백은 함부로 발을 뻗지 않고 도라익의 속도에 맞춰 달렸다.
도라익은 페널티 박스 근처에서 급정지했다. 바로 반응한 토트넘의 센터백 역시 멈췄다. 도라익은 오른발 인사이드로 공을 다시 골라인 쪽으로 밀면서 상체 중심을 원래 뛰던 방향으로 움직였다.
도라익을 따라 급정지한 센터백은 판단을 보류하고 도라익의 다음 움직임을 기다렸다. 수비수가 페이크에 안 넘어가자 도라익은 어쩔 수 없이 공을 다시 뒤로 당겼다.
"여기!"
어느새 달려온 제임스가 외쳤다. 이미 멈춘 도라익은 드리블을 포기하고 중간으로 패스했다. 수비수가 발을 쉽게 못 내밀게 상체 페이크를 준 덕분에 공이 원하는 대로 굴러갔다.
제임스가 달리는 기세를 그대로 살려 구르는 공을 힘껏 때렸다.
- 작가의말
너 이름이 마이클인데 왜 잭이야?
장래 희망이 잭 리퍼야.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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