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어제 창범이랑 통화하면서 들은 건데, 파리 생제르맹과 레알 마드리드 그리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도르트문트 등 네 팀이 도라익 선수 영입에 사활을 걸었다고 합니다."
오태범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김상현은 꼴 보기 싫은 마음에 그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마 첫 아이를 출산한 날에 장원 급제 소식을 들은 선비도 저처럼 기쁜 얼굴을 하긴 힘드리라.
'승리자는 나야.'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차 감독은 작년 협회장 경선에 나오지도 않았다. 도라익을 열심히 까 내린 공을 인정받아 용돈을 섭섭지 않게 받았고, 앞으로도 계속 떡고물을 받아먹을 수 있다.
그러나 애써 자신이 이긴 거라고 생각해도 오태범의 얼굴만 보면 열불이 터지고 배알이 꼴리며 기분이 더러웠다.
'근데 축협에서 키우는 애들은 왜 그리 하나같이 비실거리지?'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다. 실력보단 인맥으로, 잠재력보단 학연, 혈연, 지연으로, 좋은 선수를 키우기보단 정치질 용도로 선수를 뽑으니 그렇게 되는 거다.
김상현으로서도 황당했던 건, 협회의 높은 분들이 K리그 관객 수를 올리는 프로젝트라며 얼굴이 괜찮은 선수들에게 단체로 성형을 권고했던 사건이다.
"잠시만요. 오태범 평론께 전화가 왔는데 오창범 선수인 거 같습니다."
매니저나 코디가 늘 따라다니는 연예인과 달리 오태범은 녹화 중 전화를 맡길 사람이 마땅치 않다. 그래서 막내 FD한테 맡겼는데, 마침 녹화를 잠깐 쉬려는 타이밍에 전화가 왔다.
"아침에 금방 통화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람."
"핸즈프리 해주시죠."
녹화 방송이라 부적절한 내용이 있어도 편집하면 되기에 PD는 핸즈프리를 요청했고, 오창범이 자유로운 영혼이긴 해도 형한테는 말을 가려 하기에 오태범 역시 흔쾌히 수락했다.
- 형, 큰일이야. 방금 집에 왔는데 경찰이 출동해서 라익이 데려갔어. 그리고 처음 보는 여자도.
미처 녹화 중임을 알릴 겨를도 없이 오창범이 속사포 랩을 쏟아냈다. 딕션이 어찌나 좋은지 한 글자도 빠짐없이 귀에 팍팍 꽂혔다.
"별일 아닐 거야. 여성 팬이 무단침입했다거나 뭐 그런 거겠지?"
오태범은 눈치 없는 동생의 입을 실로 꿰매고 싶은 마음이지만, 애써 머리를 굴려 평소 동생한테 한 번도 안 써본 상냥한 말투를 사용했다. 뭔가 평소랑 다름을 알아채고 알아서 닥쳐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는데, 오창범은 그 정도로 영민하지 않았다.
- 무슨 소리야. 경찰 말로는 성추행 신고받고 출동했대.
"알았어. 바쁘니까 좀 있다 통화하자."
전화를 끈 오태범은 급변한 녹화장 분위기를 확인했다. PD는 국장한테 전화해서 당장 생방송을 하자고 조르고 있고, 스텝들은 이미 생방송 중계 장비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상태다.
막내 PD는 아나운서실에 전화해서 생방송을 진행할 사람을 물색하는 중이고, 작가들은 하나같이 검색에 열심이었다.
그리고 도둑놈 웃음을 지으며 몰래 문자를 보내는 김상현도 있었다.
'시발, 이게 무슨 일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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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도라익 성추행 고발로 영국 경찰에 연행.
자세한 내용은 잠시 후 추가합니다.
└ 내 이랄 줄 알았다.
└ 역시 남자는 입 아니면 고추가 사고를 쳐.
└ 얘 파산하는 거 아냐? 광고 여럿 찍었더만. 위자료 어마어마할 텐데.
└ 위자료 말고 위약금. 어디 광고랑 결혼한 사람 있어?
└ 일단 피카추 배 만집시다. 허무맹랑한 루머일 수도 있고, 꽃뱀에게 당했을 수도 있잖아요.
└ 배는 님이나 만지세요. 스토크시티 팬 사이트에도 같은 내용이 올라왔어요.
"최경호 씨. 어떻게 된 일입니까?"
- 저도 창범이 전화 받고 돌아가는 중입니다. 라익이 전화는 지금 창범이한테 있어서 자초지종을 알 수 없습니다.
"경찰에 아는 사람 없습니까?"
- 제가 경찰이랑 친할 일이 뭐 있겠습니까.
어느 정도 연식이 있고 규모가 되는 에이전시라면 당연히 광범위한 사회 관계망을 구축하여 이럴 때 정보를 쉽게 빼낸다. 그러나 고집과 자기 선수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 빼고는 평균 이하인 최경호는 경찰과 친분 따위를 쌓을 생각을 꿈에서조차 떠올린 적이 없다.
"창범이 전화 왔습니다. 새 소식 있으면 공유 부탁드립니다."
- 그러시죠.
오태범은 전화를 끊고 오창범의 전화를 받았다.
- 형, 큰일 났어. 녹취록이 있대.
흥분했는지 콧바람 소리가 크게 들렸다.
"무슨 녹취록?"
- 함정이었나 봐. 보아스라는 에이전트가 다녀간 다음 여자가 왔대. 보아스 비서라 그러고 보아스의 전화기가 사라졌는데 여기에 두고 간 것 같다고 했어. 그래서 집에 들였는데 지금 이 사달이 난 거지. 내가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전화할게.
전화를 끊은 오태범은 화들짝 놀라 주저앉았다. 언제 왔는지 김상현이 입술만 내밀면 뽀뽀해도 될 가까운 거리에서 귀를 쫑긋 세운 채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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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영국 경찰 도라익의 성추행 과정 녹취록 분석 중.
└ 아까 배 만지던 애 어디 갔어?
└ 위에 멍청한 놈. 녹취록 있다는 건 오히려 도라익이 무고하다는 뜻이잖아.
└ 작정하고 함정 판 거 같은데? 하지만 도라익이 무고죄를 주장하려면 상대가 함정이라는 걸 증명해야 하는데.
└ 방금 오태범 SNS에 새 소식 떴다. 여자가 보아스 비서래.
└ 보아스? 그건 또 뭐 하는 짜장인데?
└ 보아스 몰라? 주급 30만 유로 이상 받는 선수 중 세 명 빼고 다 보아스 고객이야.
└ 선수 한 명 이적시킬 때마다 보아스가 받는 커미션이 2천만 유로.
└ 우리 라익이 꼬시려다가 안 되니까 성추행으로 몰아가는 거네.
└ 의도가 중요한 게 아니야. 상대가 일부러 유도했다는 걸 증명하지 못하면 유죄야.
자정이 가까워져 오지만, 대한민국의 인터넷은 여느 때보다 활발하고 역동적이었다. 그리고 생방송 편성이 되자마자 분당 시청률 17%를 찍어버렸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생방송 진행을 맡은 아나운서 오연화입니다."
지적이고 차분한 인상의 아나운서였다. 예전에 도라익의 기부 사실이 밝혀진 생방송을 진행하던 두 MC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방금 우리 모두 놀라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미 기사도 났고 각종 게시판이나 소셜미디어에서 시끌벅적 논쟁 중이죠. 그럼 일단 확인한 팩트부터 체크하겠습니다."
급하게 편성한 바람에 아직 오는 길인 사람도 있다. 오연화는 차분한 말투로 적당히 느리게 진행하며 시간을 벌어야 한다.
"우선, '33-34시즌 프리미어리그 전망대 - 스토크시티 편' 녹화 중 스토크시티에서 23번 유니폼을 입고 뛰는 오창범 선수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도라익 선수가 성추행 신고로 현지 경찰에 연행되었다는 짧은 소식만 전하고 통화를 중단했는데요. 이 사실을 김상현 평론께서 기자들에게 알려 속보로 기사가 나갔습니다."
사람들 시선이 김상현에게 몰렸다. 예상치 못한 지적에 당황한 김상현은 급히 헛기침하며 표정을 관리하려 했으나, 잘 안 되었다.
"잠시 후, 김상현 평론께선 녹취록이 있다는 소식을 추가로 전했고, 역시 속보로 나갔습니다. 여기서 궁금한 점 하나. 김상현 평론께선 어찌 녹취록이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까?"
오연화가 괜히 김상현을 언급해 포커스를 맞춘 게 아니다. 도라익이 연행된 거야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녹취록 얘기는 김상현을 통해 기자들한테 나간 것밖에 없다.
"제가 알아낸 건 아니고, 우연히 오태범 평론이 동생과 통화하는 내용을 들었을 뿐이에요."
오연화는 바로 칼날을 오태범에게 돌렸다.
"오태범 평론께선 녹취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일부러 숨긴 겁니까?"
"자, 다들 진정하시고."
오태범은 물을 마시면서 시간을 벌었다.
"창범이가 내게 전한 소식은 두 갭니다. 여자가 보아스의 비서라는 것과 녹취록이 있다는 것. 여기서 제가 궁금한 건 김상현 평론께선 왜 여자가 보아스 비서라는 사실을 기자들에게 전하지 않았습니까?"
SNS에 여자가 보아스의 비서라는 정보만 올린 건 오태범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금 괘씸죄를 받는 건 약삭빠르게 기자들한테 정보를 넘겨 생방송 준비를 미흡하게 한 김상현이다.
"그러고 보니 저도 궁금하네요. 김상현 평론께선 왜 그리 도라익 선수를 싫어합니까?"
얼굴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차분한 오연화 아나운서다. 편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 고운 얼굴로 갑자기 돌직구를 날릴 줄 몰랐던 김상현은 사레가 들려 연신 콜록댔다.
'다들 나한테 왜 이러지?'
김상현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으나 알 바가 없었다.
현재 이 방송을 시청하는 사람 중 도라익을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안 좋은 일로 생방송이 편성되었기에 시청자들을 잡아둘 악역이 한 명 필요하다.
일명 라익까 수장으로 불리는 김상현한테 딱 맞는 역할이다.
당연히 경험이 풍부하고 시청률에 목을 매는 방송국 놈들은 어느 정도 사건이 전개될 때까지 김상현을 매질하며 시청자를 붙잡아 둘 요량이다.
- 오 아나운서. 게스트들 도착해서 분장하는 중이니까 슬슬 진행해.
PD의 지시를 받은 오연화는 바로 진행을 이어갔다.
"현재 밝혀진 사실은 여기 까집니다. 새로운 소식이 생기는 대로 즉시 전달해드릴 것을 약속드리며, 이번 사태에 관한 오태범 평론의 의견을 묻겠습니다."
"혹시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단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보아스는 축구와 야구 에이전시를 운영합니다. 축구는 물론 야구도 업계 1위이고, 둘을 합치면 모든 스포츠 에이전시 중 부동의 1위입니다. 그런 보아스가 직접 도라익 선수 집을 찾아갔습니다."
갤러리들이 술렁였다. 늦은 밤이어서 지칠 만도 한데 하나같이 사냥감을 주시하는 맹수처럼 눈빛을 반짝였다.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누구도 모릅니다. 그리고 보아스가 떠나고 약 8시간 뒤에 보아스의 비서가 찾아왔습니다. 보아스가 전화기를 분실했는데 여기에 두고 간 것 같다고 했답니다. 도라익은 여자를 안에 들였고, 얼마 뒤 성추행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경찰서를 찾아간 제 동생에게 담당 경찰이 녹취록 분석 중이니 결과 나올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리라고 해서 녹취록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 작가의말
최근 느낀 건데, 제가 댓글에 영향을 크게 받는 타입입니다. 그냥 읽는 건 괜찮지만, 답 댓글을 달려고 고민하는 과정에 생각이 많이 흔들립니다.
답 댓글을 일단 자제하기로 마음먹었고, 며칠 해보니 확실히 머리가 정리되고 글의 방향에 대한 고민이 줄었습니다.
현재 저에겐 답 댓글이 순기능보단 역기능이 큰 거 같아 계속 자제할 생각입니다. 오타나 오류 지적에 관해선 감사 댓글을 달 생각이지만, 남은 댓글은 감사히 읽기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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