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체스터
받은 공을 안전하게 클루카스한테 넘긴 제임스는 자신한테 다가오는 맨유 선수를 피해 비어있는 곳으로 달리며 고민했다.
'나도 제임스인데 왜 맨유의 제임스처럼 유명하지 않을까?'
제임스 가너. 제임스와 마찬가지로 중앙 미드필더다. 키는 184cm고 몸무게는 자신과 비슷하다.
'내가 더 젊고 훨씬 잘생겼는데.'
키는 제임스 가너가 자신보다 크고 국가대표 주전이기도 하다는 부분은 애써 무시했다.
클루카스의 공을 받은 앨런이 마킹을 벗겨낸 제임스한테 패스했다. 공을 잡은 제임스는 머리를 들어 앞을 봤다.
흥분했는지 시야가 평소와 다르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시야에 들어온 선수들이 어떤 방향으로 뛰려는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도우!"
발이 먼저 나가고 그다음 외침이 터졌다. 제임스는 아주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질 경로로 공을 찔렀다.
'발이 절로 나갔어.'
제임스의 느린 시야에 도라익이 달리는 모습만 보였다. 껑충껑충 달려 공을 잡은 도라익이 느리게 헛다리 하나 짚었다. 제임스라면 도라익 발밑에서 공을 뺏었다 돌려줬다가 또 뺏을 수 있는 긴 시간이다.
헛다리로 수비수의 접근을 막은 도라익이 왼발로 플립플랩을 펼쳤다. 누가 봐도 왼발 아웃사이드로 공을 밀어 공간을 낸 다음 슈팅하려는 것이지만, 제임스 눈엔 진실이 보였다.
과연, 제임스의 짐작대로 도라익은 공을 왼쪽으로 보내는 척하며 오른쪽으로 보냈다. 페이크에 속아 무게중심을 오른손 편으로 움직이던 센터백이 굳어버렸다. 머리로 내린 판단과 어긋나는 상황에 사고 회로가 잠시 멈춘 것이다.
그제야 도라익은 오른발 인사이드로 공을 왼쪽에 보내 슈팅 각을 만들었다. 그러나 골키퍼가 이미 나와 가까운 포스트로 향하는 슈팅 경로를 몸으로 막았다.
'어!'
놀랍게도 도라익이 왼발 발끝으로 공을 끌어왔다. 직접 보면서도 제임스는 도라익이 한 짓이 믿기지 않았다.
왼발로 공을 끌어온 도라익은 오른발 아웃사이드로 공을 밀었다. 굳었던 센터백이 다시 몸을 움직였다.
'플립플랩이야.'
도라익은 오른발로 플립플랩을 펼쳐 공을 다시 왼쪽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왼발을 휘둘러 슈팅했다.
센터백과 키퍼 사이의 작은 틈을 노린 강슛은 다급히 흔든 키퍼의 팔을 용케 피해 골대로 들어갔다. 도라익의 몸이 조금씩 커졌다.
화악. 시야가 회복하며 세상이 다시 빨라졌다.
어느새 달려온 도라익이 제임스의 허리를 안고 높이 들어 올렸다.
"방금 우리 뭐한 거지?"
채 2천 명도 안 되는 원정 팬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보며 제임스가 중얼거렸다. 마치 꿈 같은 일이었다.
"마음이 통한 거야."
도라익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제임스는 도라익과 어깨동무를 한 채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자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제임스는 흥분하면 집중력이 높아진다. 그래서 빈틈도 잘 보고 상대 패스도 가끔 가로챈다. 문제라면 대부분 경우에 몸이 따라가지 못해 수비에 실패해 큰 실책을 저지르고, 공격 상황에선 기본기가 부족해 패스를 정확히 찌르지 못한다.
방금은 원하는 속도로 원하는 경로를 따라 원하는 공간에 공을 정확히 보냈다. 본인이 한 짓이지만, 본인 능력으로 가능한 일인지 본인이 가장 의심했다.
- 방금 장면은 아무리 봐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임스 선수가 패스하자 세 명의 선수가 공을 피합니다. 그중 두 명은 맨유 선수인데요. 아무리 봐도 모르겠네요.
- 느린 화면으로 봐서 그렇게 느끼는 겁니다. 이미 움직임이 시작된 상태였고 제임스 선수의 패스가 너무 의외여서 반응하지 못한 겁니다. 쉽게 말하면 세 선수 모두 역동작에 걸렸습니다.
- 그런데 도라익 선수는 반응했죠.
- 제임스는 스토크시티의 오창범으로 불리는 선숩니다. 개인적으로 도라익 선수와 가장 친하고, 훈련용 축구화를 비롯해 선물도 많이 한 선수죠.
- 국내 팬들이 초코파이로 혼내고 싶은 선수 1위죠. 다시 경기로 돌아와서, 방금 노리고 한 플레이일까요?
두 해설은 5초 정도 침묵했다.
- 경기 끝나고 두 선수 인터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패스 경로를 보면 분명히 실수인 것 같은데, 제임스 선수가 정확히 도라익 선수를 외쳤습니다. 도라익 선수도 미리 알았다는 듯이 달려가 공을 잡았고, 그 뒤에 이어진 동작들도 미리 연습한 것처럼 어색함이 없었죠.
주심의 휘슬 소리가 울리고 양 팀이 경기를 재개했다. 맨유는 경기 초반처럼 수비 라인을 중앙선까지 올려 스토크시티를 압박했다. 전반전 마감까지 채 10분도 안 남았지만, 전혀 급해 하는 기색 없이 빠른 패스로 흔들며 틈을 만들었다.
그러나 0:0 상황과 달라진 게 있었다. 맨유 선수들이 체력 소모와 함께 집중력도 하락했기에 패스에 실수가 조금씩 생겼다.
그리고 흥분한 제임스 체스터가 패스 경로에 자주 나타나며 맨유 선수들이 패스를 조심하게 윽박질렀다.
게다가 도라익은 물론 찰리까지 감독 지시로 수비에 가담했다.
비기기만 해도 되는 스토크시티고, 전반전을 1:1로 끝내는 게 아주 의미가 크다. 윌슨 감독은 일단 지키기로 했다.
47분에 주심이 휘슬을 울렸다.
- 전반전 경기는 1:1로 끝났습니다.
- 광고 시작 전에 빠르게 다른 구장 상황을 훑겠습니다.
- 첼시는 2:0으로 전반전을 끝냈습니다. 실시간 순위에선 1위로 상승했죠. 맨유는 1:1로 전반전을 끝내며 2위가 되었습니다.
- 뒷심의 리버풀이 3위입니다. 현재 0:0 무승부입니다.
- 아스널이 2:0으로 앞섰는데요. 그럼에도 리버풀과 동점이죠. 골 득실로 아스널은 여전히 4위입니다.
- 5위는 토트넘입니다. 한때 11위까지 추락했는데 막판에 힘냈죠. 홈에서 맨시티를 2:0으로 앞서고 있습니다.
- 맨시티는 6위입니다. 패배해도 6위 자리는 지킬 거고 무승부만 내도 5위입니다.
- 위건과 셰필드는 1:1인데요. 현재 상태로는 위건의 강등입니다.
- 그럼 광고 보고 오겠습니다.
"도우. 나 천잰 거 같아."
감독 지시가 끝나고 수분을 섭취하고 칼로리를 보충하며 쉬는 시간. 제임스는 쉬지 않고 떠들었다.
"오늘 처음이라며?"
도라익이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꾸했다.
"예전부터 그랬어. 뉴캐슬이랑 할 때 내가 키퍼 왼손이 다쳤다고 했잖아. 난 흥분하면 평소 눈에 안 보이는 게 보여."
"그래. 믿어줄게. 그런데 나보고 어쩌라고."
도라익은 정신 사납게 떠드는 제임스가 귀찮았다.
"근데 넌 어떻게 내 패스를 이해한 거지? 설마 너도 천재야? 동시대에 두 명 나오기 힘들 텐데."
그때 수석 코치가 다가와 제임스의 귀를 당겼다.
"요가 음악이나 들으며 흥분 가라앉혀."
도라익은 몰랐지만, 제임스는 스트레스가 심한 상태에서 흥분하면 말을 많이 한다. 후반기엔 원하는 중앙 미드필더 위치로 가서 공격형 미드필더 롤을 수행하며 스트레스를 덜 받았기에 잘 보여주지 않던 모습이다.
오늘은 강등 상황이 주는 압박에 홈팬들이 주는 압박이 겹쳐 스트레스가 컸다.
제임스가 떠나자 산체스가 다가왔다.
"도우. 그 패스를 어떻게 잡은 거지?"
"무슨 뜻이야?"
"그곳에 패스할 상황도 아니고 패스가 성공할 상황도 아니었어."
"글쎄. 그냥 제임스가 패스하니까 달린 건데."
졸음이 오면 하품하고, 하품하면 눈물이 고인다. 당연한 건데 자꾸 사람들이 캐물으니 도라익도 슬슬 성질이 났다.
15분이 흘러 후반전이 되었다.
- 15분의 휴식을 끝내고 경기를 재개했습니다.
- 양 팀 모두 교체가 없는 상황입니다.
- 도라익 선수와 제임스 선수의 움직임이 놀랍습니다. 전반전에는 맨유의 패스에 휘둘려서 낭패한 모습이었는데요. 지금은 공을 잡은 맨유 선수들이 오히려 쩔쩔매죠.
- 고작 45분 만에 맨유의 패스를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건 무리겠죠?
- 그럼 남은 18팀 선수와 스텝은 다 축구 그만둬야죠. 45분으로 이해할 수 있는 패스면 맨유에 1위 자리를 내준 첼시도 반성해야 하고요.
전반전의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패스에 맨유 선수들이 흔들렸다. 우리가 최고의 팀이고 우리가 최고의 선수라는 믿음이 살짝 무너진 것이다.
그만큼 제임스의 패스는 충격이었다.
- 제임스! 제임스가 제임스의 패스를 차단합니다.
- 체스터가 가더의 패스를 가로챈 후 찰리한테 땅볼로 패스합니다.
- 공을 잡은 찰리가 센터백을 등친 채 공을 지킵니다. 산체스 선수가 접근하죠.
- 찰리가 산체스 대신 제임스한테 패스합니다.
- 제임스가 도라익한테 줍니다.
도라익은 제임스의 공을 받으며 오늘따라 패스가 편하다고 느꼈다. 멈추거나 템포를 조절할 필요 없이 그냥 달리는 앞에 공이 배달되었다.
마치 예전에 산체스의 택배 크로스를 받았던 그때 느낌이었다.
도라익이 공을 앞으로 툭 치자 센터백은 공을 쫓지 않고 도라익을 막았다. 주심이 달려와 센터백에게 옐로카드를 제시했다.
직접 프리킥이 선언되었다. 왼발의 샘 앨런과 오른발의 샘 클루카스가 프리킥 키커다.
"샘, 내가 차도 되지?"
제임스가 흥분한 얼굴로 둘에게 사정했다.
"슈팅할 거야?"
"아니, 패스할 거야."
"누구한테?"
"말 안 해도 다 알지 않나?"
당연히 키퍼 포함 최고 신장인 찰리한테 패스하는 게 최선이다. 앨런과 클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임스한테 양보했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몸싸움하는 선수들을 바라보던 제임스는 휘슬이 울리기 무섭게 공을 찼다.
- 작가의말
제임스는 빨간 화살표가 하늘을 가리킨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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