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론소의 장점
8월 15일.
스토크시티는 시즌 첫 상대인 번리를 홈에서 맞이했다. 찰리가 이적했지만, 뉴 스카이 스타디움은 만석을 이뤘다.
도라익이 갓 왔을 땐 찰리가 훨씬 큰 사랑을 받는 선수였으나 시간이 흘러 둘의 위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비록 프로 데뷔는 스토크시티에서 했지만, 아스널 유스 출신인 찰리보다 첫 구단이 스토크시티인 도라익이 진정한 Own Boy다.
- 지난 시즌 후반기에 찰리와 루이스의 부재로 선발에 변화를 주지 않던 알론소 감독입니다. 그런데 지금 또 의외의 명단을 들고나왔죠?
키퍼는 톰 미켈로 변화가 없다. 그런데 센터백으로 레체르트와 마르코 그리고 줄리엔이 출전했다. 리엄 혹은 보크스를 언급했던 전문가들의 예측이 완전히 빗나가는 선택이었다.
왼쪽 윙백은 맥자넷이고 오른쪽 윙백은 오창범이다. 그러나 위치를 보면 윙백보단 측면 미드필더가 더 어울렸다.
수비형 미드필더로는 루이스가 출전했고, 중앙 미드필더로 제임스와 산체스가 합을 맞췄다. 공격수로는 도라익과 발제르가 출전했다.
- 오창범과 맥자넷 두 선수가 공격에 더 치중하는 전술인 거 같습니다. 산체스와 루이스 두 선수 모두 측면 수비를 잘 돕는 스타일이죠.
- 제임스 선수의 선발 출전은 조금 의외입니다. 왼쪽 수비를 돕는 것도 토미가 더 잘하고 드리블과 짧은 패스 역시 토미가 훨씬 잘하거든요.
- 2부 리그에서도 아주 좋은 모습이 아니었던 발제르 선수의 선발 출전 역시 의외입니다. 우디르가 도라익 선수의 교체 선수긴 한데, 그렇다고 같이 출전한 경기에서 합이 안 맞았던 건 아니거든요.
두 해설의 걱정 속에서 경기가 시작됐다. 스토크시티는 수비 라인을 중앙선까지 올리고 줄리엔이 도라익과 함께 페널티 박스로 들어가 공격에 전념했다.
- 레체르트, 마르코, 루이스, 제임스, 산체스가 중앙에서 공을 돌리다가 측면으로 보냅니다.
- 미켈 선수 역시 페널티 박스 밖으로 나와 마르코와 레체르트의 공을 간간이 받아주네요.
지난 시즌과 달리 도라익은 패스에 참여하지 않고 최전선에 대기했다. 도라익의 순발력을 경계한 번리는 수비 라인을 깊이 내릴 수밖에 없었다.
- 맥자넷 선수, 크로스!
센터백 한 명은 도라익을 수비하러 가까운 포스트 쪽으로 가고 한 명은 줄리엔을 수비하러 먼 포스트에 갔다.
가운데 선 발제르는 번리의 수미가 수비했다.
- 발제르 헤딩!
- 골! 골입니다.
경기 전에만 해도 발제르의 선발이 이해 안 된다던 강철민과 박만호였다. 그러나 현재 상황이 가장 믿기지 않는 건 다름 아닌 발제르 본인이었다.
"골이야?"
발제르는 멍청한 얼굴로 자신을 잡고 흔드는 줄리엔과 도라익에게 질문했다.
"그래. 그러니까 좀 기뻐하라고."
그제야 실감이 난 발제르는 미리 준비한 세리머니를 펼쳤다. 그러나 연습량이 부족한지 세리머니가 아주 어색했다.
"발제르, 너 촌놈 같아."
"맞아. 우리 집 시골이야."
2부 리그에서도 출중한 선수가 아니었던 발제르는 스토크시티에 온 지 한 달이 되는데도 선수들과 깊이 친해지지 못했다.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발제르가 보기엔 맨날 수비와 크로스가 부족하다고 투덜대는 오창범마저 자신보다 훌륭해 보였다.
"그래? 경기 끝나고 모임이 있는데 그때 네 얘기 좀 들려줘."
선제골을 넣은 스토크시티는 수비 라인을 조금만 내리고 번리에 대한 압박을 유지했다.
- 발제르 선수 수비 꽤 하는데요?
- 일단 제임스보단 확실히 낫고 산체스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아요.
수비 상황에선 발제르가 왼쪽 수비를 돕고 산체스가 오른쪽 수비를 도왔다. 제임스는 루이스 앞에 서서 반격 시 도라익을 지원하는 역할이었다.
도라익은 수비 상황에도 최전선에서 어슬렁거리며 상대가 라인을 마음껏 못 올리게 압박했다.
스토크시티엔 언제 치명적인 스루패스를 찌를지 모르는 산체스와 제임스가 있고, 오창범과 맥자넷 그리고 레체르트 모두 장거리 공격을 발동할 능력이 있다. 거기에 도라익의 순발력과 드리블 그리고 슈팅 능력까지 있으니 번리는 공격 상황에도 아주 조심스러웠다.
- 줄리엔 선수 달립니다.
공의 소유권을 얻은 스토크시티는 공격에 급급하지 않고 중앙에서 공을 돌렸다. 수비 라인이 중앙선에 이르자 줄리엔이 껑충껑충 뛰어 번리 페널티 박스로 헤딩하러 갔다.
'뒤로 빠지라고?'
맥자넷이 공을 잡고 크로스를 올리려 했다. 그때 도라익이 미리 약속한 수신호를 보냈다. 용케 수신호를 놓치지 않은 발제르는 앞으로 두 걸음 달리다가 급정지한 후 바로 뒤로 빠졌다.
발제르를 수비하던 선수는 맥자넷의 크로스에 집중하느라 뒤로 빠지는 발제르를 따라가지 않았다.
높이 점프한 도라익이 헤딩에 성공해 공을 뒤로 보냈다. 미리 뒤로 빠졌던 발제르는 낙구 지점을 향해 달려간 후 보폭 조절도 안 하고 편하게 슈팅했다.
- 아, 저걸 막네요.
번리 키퍼가 각이 예리한 발제르의 슛을 겨우 막아냈다. 오창범이 코너킥 올리러 달려갔다.
오창범의 수신호를 본 발제르는 고개를 돌려 도라익을 한 번 쳐다봤다. 발제르의 어색한 행동은 번리 선수들의 주의를 끌었다.
오창범이 크로스를 올렸다. 가까운 포스트에 선 줄리엔이 헤딩에 성공했으나 공이 조금 높았다.
발제르의 시선 처리는 페이크였다. 덕분에 키퍼도 먼 포스트 쪽으로 자리를 잡았고 수비 집중력도 도라익 쪽으로 집중됐다.
경기 집중력이 좋은 발제르는 새도우 스트라이커로서 자기 역할을 최대한도로 해냈다.
#
하프타임.
"발제르 네 덕분에 경기가 쉬웠어."
"왜 내 덕분이야?"
"저기 맥자넷 있잖아."
도라익이 즐거운 얼굴로 오창범과 대화하는 맥자넷을 가리켰다.
"본인 크로스가 마음에 안 든다고 바꾸려 했거든. 근데 마지막 순간에 발목을 비트는 습관이 있어서 낮고 빠른 크로스를 잘 못 올려. 그게 고민이었는데 네가 와서 자기 크로스 잘 받으니까 편해졌어."
"편해지면 뭐가 다른데?"
"편하니까 자기 리듬대로 크로스 올리잖아. 그러면 크로스 받는 입장에선 낙구 지점 판단하는 것도 쉽고 점프 시기를 정하는 것도 쉽지."
이상한 스핀이 걸려서 판단이 어렵다곤 하지만, 판단할 시간이 충분해서 낮고 빠른 크로스보단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크로스 올리기 전부터 판단을 끝내고 자리싸움을 하는 거랑 크로스를 보고 움직이는 건 큰 차이가 있다.
더구나 포물선이 큰 크로스여서 수비하는 쪽이나 공격하는 쪽이나 점프 시기를 가늠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맥자넷이 평소 훈련처럼 편하게 크로스를 올리면 스토크시티 선수들이 헤딩에 성공할 확률이 훨씬 커진다.
"맞다. 맥자넷이 나한테 도움 줬는데 뭘 선물해야지?"
"쟤 와인 좋아해. 근데 비싼 건 또 아까워서 못 마셔. 그러니까 백 파운드 정도 가격대의 달달한 와인이 적당할 거야."
"도우. 근데 나 뭐 고쳐야 할 부분이 없어?"
"헤딩할 때 있잖아. 점프 안 하는 건 어때?"
맥자넷의 크로스는 낙구 지점을 정확히 판단하고 몸싸움을 이기면 굳이 점프하지 않아도 헤딩할 수 있다.
"점프한 후 헤딩하면 배랑 허리의 힘만 전달되잖아. 점프 안 하면 허벅지랑 엉덩이 힘까지 헤딩에 가고. 맥자넷의 크로스는 느려서 키퍼를 피해 바깥으로 해야 하거든. 그러니까 헤딩에 힘을 실으려면 점프 안 하는 게 좋아."
발제르는 도라익과 줄리엔을 번갈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그런 크로스를 점프하면서도 강하게 헤딩하는 둘이 괴물처럼 보였다.
#
- 도라익 선수 단독 드리블.
흘러나온 공이 제임스 발밑에 갔다. 이쯤이면 운이 아닌 실력이다.
'오다 주섰다.'
제임스가 무심하게 공을 앞으로 툭 찔렀다.
도라익은 제임스의 패스에 맞춰 바로 속력을 올렸다. 뛰어난 순발력 덕분에 먼저 몸을 돌려 달린 수비수와 거리를 빠르게 벌렸다.
- 상체 페이크.
호나우두가 즐겨 써먹었던 기술이다. 도라익의 무게 중심이 순식간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다시 왼쪽으로 갔다.
그런데 도라익의 예상과 달리 키퍼는 오른발을 뻗어 공격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안 하고 손까지 써서 네발걸음으로 뒤로 달렸다.
그 바람에 도라익은 왼쪽으로 공을 한 번 더 쳐서 슈팅 각도를 만들어야 했다.
'내 단독 드리블에 대비해 수비 전술을 짰구나.'
돌파하는 사이 수비수 한 명이 골대에 거의 접근했다.
'맞아. 예전에 맨유가 이런 식으로 날 수비했었지.'
그날 도라익은 왼쪽 돌파만 고집하다가 상대가 지친 틈에 오른쪽으로 돌파하는 거로 틈을 만들어 골에 성공했었다.
생각이 긴 것 같지만, 사실 눈 한 번 깜짝할 새도 안 걸렸다.
도라익은 마르세유 턴을 펼쳤다. 키퍼는 이미 돌파했고 수비수도 골대를 막는 데 급급해 도라익에게 전혀 위협이 안 되는 상황이다.
도라익이 마르세유 턴을 펼친 건 몸을 돌려 각을 만들기 위해서다.
마르세유 턴으로 골대를 왼손 방향에 둔 도라익이 왼발로 공을 부드럽게 밀었다. 어느새 달려온 발제르가 오른발로 공을 골대에 편하게 밀어 넣었다.
"도우, 넌 뭘 좋아해?"
"감사 인사는 천천히 하고, 세리머니부터 해야지."
발제르가 전반전에 보여줬던 그 어색한 세리머니를 또 펼쳤다. 실전 한 번이 연습 백 번보다 낫다고 하건만, 발제르의 세리머니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난 팀의 주장이야. 동료를 돕는 건 내 책무지. 그러니까 선물 안 해도 돼. 그저 팀을 위해 열심히 뛰면 되는 거야."
- 주급 1만2천 파운드의 선수가 데뷔전에서 멀티 골을 넣었습니다.
- 알론소 감독 참 대단한데요.
- 이건 전술이 훌륭하다는 이유로 설명이 되는 상황이 아니에요. 다른 감독은 뭐 허수아비도 아니고.
두 해설과 달리 발제르는 뭐가 달라졌는지 알 것 같았다.
'여기선 축구하는 게 편해.'
공격 상황엔 패스에 참여하지 않고 골이 들어갈 만한 공간만 찾아다니면 된다. 수비 상황엔 명확한 수비 롤이 있고, 본인이 잘 수행하지 못해도 제임스나 루이스의 도움이 있다.
맥자넷의 크로스나 도라익의 백 패스 모두 편하고, 오창범의 크로스 역시 2부 리그에서 받던 것보다 훨씬 편하다.
알론소는 단순히 선수의 능력에 맞춰 전술을 짜는 게 아니다. 선수의 성격까지 고려해 전술을 짜고 출전 명단을 고민한다.
경기 80분, 2:0으로 앞선 가운데 발제르가 우디르로 교체되었다. 홈 팬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그라운드를 떠난 발제르는 알론소와 깊은 포옹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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