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익의 요청
"그러니까 도우가 미드필더로 뛰고 싶다고 요청했다는 말이지요?"
비록 패배했지만, 스토크시티는 경기 내내 볼튼을 압도했다. 특히 도라익이 위치를 내린 후반전엔 한 명이 퇴장한 게 무색할 정도였다.
"그렇습니다. 도우 본인이 찾아와서 간곡히 요청했습니다."
"미스터 알론소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도우를 미드필더로 뛰게 하면 이번 시즌 최소 15점은 더 딸 수 있습니다."
알론소가 바로 대답했다.
구단주는 고민에 잠겼다.
스토크시티는 찰리 아담과 도라익을 품을 그릇이 안 된다. 현재 찰리에게 지급하는 12만 파운드 주급이 스토크시티의 한계다. 그렇기에 구단주는 둘을 최대한 비싸게 팔 궁리를 하고 있고, 영국 국적이어서 이미 능력치 이상 몸값을 책정받은 찰리 대신 도라익의 몸값을 끌어올려야 한다.
계약 당시 알론소에게 도라익을 시즌 20골 이상 넣는 공격수로 키우라고 주문한 것도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혹시 지난 시즌 유로파리그 우승을 하고 3일 동안 축제를 벌인 일을 압니까?"
"네. 당연히 압니다."
"그럼 축제 내내 도우가 무알콜 맥주조차 입에 댄 적 없고, 저녁 8시만 되면 집으로 돌아간 사실은요?"
"네?"
"내가 기자들을 단속해서 기사가 안 나가게 했습니다."
만약 도라익이 유로파리그 우승 축제에도 온전히 참여하지 않은 게 알려지면 언론이 온갖 소설을 써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도라익의 몸값이 떨어진다.
도라익의 성격이나 사교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든, 도라익과 스토크시티의 사이가 나쁘다고 판단하든. 어떤 경우도 구단주에겐 좋은 소식이 아니다.
구단주는 결국 공격수 몸값이 미드필더보다 비싸니 도라익을 계속 공격수로 뛰게 하라는 말을 빙빙 돌려서 한 것이고, 알론소는 그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러나 알론소 역시 고충이 있었다.
알론소의 스타일은 선수들에게 피로감을 크게 준다. 팀의 불만을 최대한 누르려면 도라익의 도움이 필수기에 간곡한 요청을 쉽게 뿌리칠 수 없다.
알론소 입장에선 구단주만 상전인 게 아닌 셈이다. 도라익도 반쯤은 상전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당분간만 도우를 미드필더로 쓰겠습니다. 10월까지 확실한 조합을 찾아낸 다음 다시 도우에게 공격수이자 게임메이커의 롤을 맡기겠습니다."
"미스터 알론소도 뭔가 생각한 게 있을 테니, 일단 그렇게 진행합시다."
도라익의 지난 시즌 득점은 10월 이후에 몰렸다. 그걸 떠올린 구단주는 괜히 선수와 감독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 고집을 부리지 않고 적당히 타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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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1일.
뉴 스카이 스타디움.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 어제 이혁신 선수의 멀티 골로 올림픽 축구팀이 첫 승을 올렸습니다.
- 오늘 도라익 선수까지 활약하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인데 말이죠.
- 아마 그럴 겁니다. 며칠 전 경기에서 후반전 내내 미드필더로 뛰며 엄청난 활약을 보였던 도라익 선수가 이번 경기에서도 미드필더로 뛴다고 합니다.
현대 축구에서 재능이 있는 선수 대부분이 공격수 혹은 윙의 자리를 선택한다. 그래서 극소수의 예외 선수를 빼면 공격수의 몸값이 다른 위치 선수들을 압도한다.
비록 알론소의 전술에 잘 따르고 있지만, 경험이나 축구 전반에 대한 이해는 조금 부족한 도라익이다. 극소수의 예외가 되기엔 아직 부족하니 구단주는 도라익이 공격수로 뛰면서 골을 많이 넣어 몸값이 쑥쑥 자라기를 바랐다.
그러나 선수의 의지와 감독의 지지 그리고 미드필더가 부족한 팀의 사정 등 복합적인 이유로 도라익은 당분간 미드필더로 뛰게 되었다.
- 지난 경기 후반전에 교체로 출전해 골을 획책한 오창범 선수가 선발로 출전했습니다. 그리고 미드필더는 산체스와 토미 그리고 도라익의 조합입니다.
- 공격수는 우디르 자카와 찰리 아담 선수가 출전했는데요. 알아본 바로 우디르 자카 선수는 양쪽 윙으로 뛰는 것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 원래 공격수를 뛸 때도 왼쪽을 선호하던 선수였죠.
- 그리고 토미 선수와 도라익 선수도 윙으로 뛸 수 있습니다.
- 다양한 공격 루트가 기대되는데요. 도라익 선수가 어떤 역할을 할지 궁금합니다.
5만 명이 넘은 스토크시티 팬이 경기장을 꽉 채웠다. 인구가 30만 명을 겨우 넘은 지역인 걸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만, 리버풀을 비롯해 다른 프리미어 구단을 살피면 또 그렇게 경악할 일도 아니었다.
- 경기 시작합니다.
아스톤 빌라는 신중하게 공을 돌리며 공격에 급급하지 않았다. 스토크시티 역시 라인을 내리고 섣불리 상대를 압박하지 않았다.
- 미켈이 정확한 킥으로 도라익 선수를 찾습니다.
공을 잡은 도라익은 드리블로 선수 세 명을 연속 제쳤다. 비록 들어서 알고 있지만, 아스톤 빌라 선수들은 왼발과 오른발로 번갈아 드리블하는 도라익 상대로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
- 도라익 선수 스루패스!
- 골! 우디르 골! 골입니다!
경기가 시작하고 채 3분도 안 되어 중앙선 근처에서 공을 잡은 도라익이 연속 세 명의 선수를 드리블로 제친 다음 오른발로 공을 곧게 찔렀다.
사선으로 달린 우디르는 굳이 조절할 필요도 없이 바로 슛을 때렸고, 키퍼는 예상했던 것보다 반 박자 빠른 슈팅에 반응하지 못했다.
- 스토크시티의 공격 태세가 만만치 않습니다. 센터백까지 적극적으로 상대 페널티킥 박스에 들어가 헤딩에 참여합니다.
- 그러나 무턱대고 라인을 올리자니 방금 도라익 선수의 스루패스와 우디르 선수의 슈팅 모두 완벽했습니다. 침투할 공간을 줘선 안 되겠죠.
- 유일한 방법은 상대가 좋은 크로스를 못 올리게 방해하는 건데, 그것도 힘들어 보입니다.
두 윙백을 단단히 잡아두면 미드필더들이 라인으로 가서 크로스를 돕는다. 헤딩할 선수가 넉넉하기에 가끔은 우디르도 왼쪽 윙처럼 뛰면서 크로스를 올렸다.
그러나 아스톤 빌라에 진정으로 절망적인 건 공격이었다. 개인 수비는 부족하지만, 활동량과 속도 그리고 공중볼 경합 등이 출중한 도라익이 높은 공을 다 따내며 아스톤빌라의 속공을 방해했다.
- 마르코 렌테 선수는 속도가 느린 편입니다. 특히 돌파당했을 때 몸을 돌려 쫓는 게 무척이나 느린데요. 그러한 약점을 레체르트와 톰 미켈이 잘 보완해줍니다.
- 게다가 도라익 선수도 있죠. 30미터 이내에선 누구보다 빠른 선수 아닙니까.
- 대부분 수비수는 왼발 선수에 약합니다. 가끔 오른발에 약한 경우도 있구요. 그런데 도라익 선수는 상대가 왼발을 쓰든 오른발을 쓰든 가리지 않고 잘 수비합니다.
두 번째 골은 21분에 터졌다. 맥자넷의 다소 느린 크로스를 찰리 아담이 뒤로 보냈고, 토미 맥클린이 오는 공을 때리지 않고 오른발로 패스했다.
조금 느린 공은 아스톤 빌라 수비수가 먼저 건드렸다. 그러나 조급한 나머지 너무 강하게 찬 바람에 공이 빗맞아 라인을 올린 레체르트 발밑에 갔다.
갑자기 생긴 공에 당황한 레체르트가 그냥 슛을 때렸고, 놀랍게도 무회전 슛이 나와 몸을 날린 키퍼의 손을 스치며 골이 되었다.
- 오늘 스토크시티가 되는 날인가 봅니다.
- 최선의 수비는 공격이라고 하지요. 마찬가지로 잘하는 수비는 공격에도 도움이 됩니다.
- 탄탄한 수비 때문에 아스톤 빌라 선수들이 서두른다는 말이군요.
- 맞습니다. 좀처럼 반격 기회가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보니 아스톤 빌라 선수가 도라익과 레체르트가 없는 틈을 노리려고 성급하게 공을 찼습니다. 그러다 보니 실수가 생겼고, 아스톤 빌라의 실수가 스토크시티의 기회가 되었죠.
스토크시티는 공격 상황에 수비수를 두 명 남겼다. 그러나 늘 같은 조합을 남기는 게 아니었다.
전술상 도라익이나 레체르트 중 한 명이 반드시 남아야 하지만, 가끔 경기 흐름에 휘말려 둘 다 앞으로 나가고 산체스와 마르코 렌테가 남는 때도 있다.
방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는데, 어렵게 온 기회에 서두르다 보니 실수하여 실점했다.
스토크시티의 탄탄한 수비가 무형의 압박이 되어 상대가 공격을 서두르게 했고, 서두른 공격은 정확도가 부실해 스토크시티가 더 쉽게 수비했다.
이런 순환이 반복하며 스토크시티는 점점 기세를 탔고 아스톤 빌라는 숨 막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 역시 걱정이라면 체력입니다.
그렇다고 아스톤 빌라가 아예 중앙선을 못 넘는 것도 아니다. 그럴 때마다 스토크시티는 찰리를 뺀 모두가 수비 위치로 돌아갔다.
설마 골이 나겠어 따위의 안일한 생각으로 수비를 등한시하는 건 프로라면 절대 보여선 안 되는 모습이기에, 누구도 실점 가능성이 작다고 슬렁슬렁 뛰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스토크시티는 경기 35분에 한 골 추가해 우위를 3골로 늘였다.
- 아담 선수가 긴 다리를 쭉 뻗어 흘러나온 공을 골대로 밀어 넣습니다.
- 속도는 느리지만, 순간적인 판단이 정확하고 슈팅 동작이 빠른 선숩니다. 다들 그저 힘세고 헤딩 잘하는 선수로 아는데, 그런 선수라면 잉글랜드 팀에서 주전 경쟁을 못 하죠.
달리기는 느리지만, 발 뻗는 속도는 엄청 빠른 찰리 아담이다. 이번에도 난전 중에 흘러나온 공을 재빨리 건드려 골을 만들었다.
기세가 오른 스토크시티가 상대 골문을 연신 두드렸지만, 전반전은 3:0에 그쳤다.
"이대로 후반전까지 뛰면 우린 아마 7:0으로 이길지도 모르겠군."
알론소의 농담에 선수들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런데 우리 체력이 받쳐주지 못한다는 걸 누구나 알지. 그리고 체력 소진으로 교체해야 할 선수가 3명뿐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보통 수비수들은 90분을 뛰어도 체력에 여유가 있다. 그러나 알론소의 전술에서 세 수비수 역시 종종 공격에 참여한다.
특히 수비 능력이 가장 부족한 리엄이 공격에 가담하는 경우가 잦다.
"그래서, 우린 후반전 전술을 바꾼다."
알론소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자기 전술을 설명했다.
"저들은 아마 우리가 후반전에 라인을 낮추고 도우와 우디르의 속도로 반격할 거로 예측할 거야. 우선 그 장단에 맞춘다."
오창범을 라미스로 교체할 거고 찰리 아담 역시 줄리엔으로 교체할 예정이다. 도라익과 우디르가 공격수 위치로 가고 찰리를 교체한 줄리엔은 수비수로 뛴다.
"공격 상황에서 우린 천천히 밀고 올라가고, 공을 돌려 점유율을 높인다. 크로스나 스루패스 모두 자제하며 시간을 소모한다."
아스톤 빌라는 찰리를 내리고 줄리엔을 올려 센터백을 넷으로 늘린 스토크시티를 상대로 헤딩 잘하는 선수 두 명과 중거리 슛에 능한 선수 한 명을 올렸다. 밀집 방어를 깨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후반 75분, 알론소는 산체스를 내리고 제임스를 올렸다.
- 융단 폭격이 이런 건가 싶습니다.
도라익, 레체르트, 줄리엔, 리엄이 상대 페널티 박스로 비집고 들어가 제임스와 맥자넷 그리고 우디르 자카와 토미가 올리는 크로스를 헤딩했다.
수비는 오창범을 교체한 라미스와 속도는 느리지만 개인 수비 역량이 출중한 마르코가 맡았다.
아스톤 빌라의 교체로 올라온 세 선수 모두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않고 심지어 도라익 등의 헤딩을 수비하느라 자신의 페널티 박스를 못 벗어나고 있다.
그리고 속도가 괜찮은 두 윙은 수비로 지쳐서 오래 드리블할 상황이 아니었다. 활동 범위가 넓은 톰 미켈이 뒤에 버티고 있어 공을 길게 치고 달리는 것도 안 되기에 아스톤 빌라는 사실상 뒤집을 능력이 전혀 없는 상황이다.
- 지난 경기보다 더 극단적인 전술 운용입니다.
- 그렇죠. 지난 경기 전반전에 세 센터백은 패스에만 참여하고 페널티 박스로 진입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 그런데 훨씬 안정적입니다. 도라익 선수가 미드필더로 뛰면서 허리가 튼튼해진 덕분이죠.
두 해설의 말대로 도라익이 잘해준 것도 있다. 그러나 도라익을 공격수로 뛰게 하라던 구단주의 요청이 잠시 철회된 덕분에 알론소의 전술 구상에 제한이 사라진 것이 더 큰 지분을 차지했다.
- 작가의말
앞부분 수정 사항이 있습니다. 올림픽에서 점수 계산할 때 단체 종목은 2점으로 쳐준다는 거, 틀린 정보였습니다.
96년부터 상식으로 알던 거여서 개인적으로 좀 충격이네요. 돌다리를 왜 두드리고 건너나 했는데, 조상님들이 다 선견지명이 있으셨습니다.오류를 지적해주신 들리니 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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