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의 색깔
전반전을 1:0으로 마친 스토크시티는 선수와 팬 모두 흥분에 가득 찼다. 점수가 앞서서가 아니라 전반전 상황을 보면 오늘 스토크시티가 질 수 없는 게임이다.
토트넘과 4:4 난타전을 벌인 경기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스널 선수들한테 확실한 데미지를 남긴 게 분명하다고 도라익은 생각했다.
'축구는 이런 장외의 변수가 너무 많단 말이야.'
공 차는 일은 이젠 편하지만, 축구는 여전히 어려웠다.
"후반전엔 손으로 하는 반칙 자제해. 그리고 아스널이 시비를 걸어올 가능성이 크니 알아서 피해. 동반 퇴장이면 우리가 오히려 불리해."
선수 능력치가 전반적으로 우위고 벤치도 두꺼운 아스널이기에 인원 교체나 전술 변화에서 주도권이 있다. 다행히 스토크시티가 골을 먼저 넣었기에 후반전에 잘 지키기만 하면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다.
화기애애하고 즐거운 15분이 지나고 후반전이 재개됐다. 후반전은 전반전을 복사한 듯, 스토크시티와 아스널 모두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선수 22명과 심판 3명이 직접 관여하고, 감독 2명과 심판 1명이 간접적으로 관여하며, 수만 명 팬이 영향을 주는 게 축구 경기다.
경기 75분.
22명 중에 강한 변수가 하나 나타났다.
- 아니, 심판 씨발 놈이.
강철민이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
"야, 심판. 너 제정신이야? 술 처먹었어? 이게 왜 옐로카드야? 뒤질래?"
도라익 역시 눈이 뒤집혔다.
양 팀 선수들도 뒤엉켜 서로 밀치락달치락거렸다. 두 부심이 경기장에 들어와 주심을 도와 상황을 정리했고, 알론소는 특유의 신경질적인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대기심에게 침을 튀기며 항의했다.
헐떡이며 달려간 팀 닥터가 사인을 주기도 전에 구호차가 그라운드에 진입했다.
- 방금 장면 다시 보겠습니다.
찰리가 아스널 센터백을 등지고 날아오는 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찰리를 도발했던 젊은 공격수가 달려오며 발을 높이 들어 공을 건드리려 했다.
그런데 아스널 센터백이 찰리의 등을 손으로 힘껏 밀었고, 예상치 못한 찰리가 앞으로 밀려났다.
공은 찰리의 머리에 맞았으나, 찰리는 공을 건드리려던 아스널 선수의 발에 가슴을 세게 차여 그대로 쓰러져서 신음도 못 내고 눈물만 줄줄 흘렸다.
찰리를 발로 찬 아스널 선수 역시 허리부터 떨어져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주심은 센터백과 공격수한테 옐로카드 한 장씩 줬다. 손으로 미는 게 카드까지 줄 일이 아니고 찰리를 걷어찬 선수도 일부러 폭력 행위를 한 건 아니긴 하지만, 통증으로 신음도 못 내고 두 눈을 부릅뜬 채 눈물을 줄줄 흘리는 찰리의 모습을 보면 옐로카드가 너무 가벼워 보였다.
- 아직 VAR이 있습니다.
박만호가 희망을 담아 말했다.
하지만, VAR 역시 주심의 편을 들어줬다. 엄중한 반칙이 아니어서 레드카드가 아니라는 문구가 경기장의 대형 화면에 명확히 떴다.
스토크시티 팬들이 심판을 향해 거친 욕설을 뱉었다.
- 아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주심이 욕설을 퍼부은 도라익에게 옐로카드를 제시했다. 관객들의 욕설이 커졌다.
그때. 도라익이 카드를 받고 몇 초 안 지나 쓰러져서 고통을 호소하던 아스널 선수가 벌떡 일어나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유니폼을 툭툭 털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릴 것 같은 정적이 생겼다. 그러나 정적은 짧았다. 쓰나미 같은 욕설이 그라운드를 덮쳤다.
"당신 오늘 판정 평생 후회할 거야."
화가 나고 기가 막혀 입을 다문 도라익 대신 루이스가 주심한테 악쓰며 외쳤다. 주심은 도라익한테 갓 옐로카드를 준 상황이기에 루이스의 악담을 그저 무시했다.
앰뷸런스에 실려 간 찰리 대신 쇠렌센이 투입됐다. 스토크시티는 모든 선수가 1점 앞선 점수를 지키려고 이 악물고 뛰었지만, 찰리의 부상으로 반격 전술이 단조로워진 홈팀 상대로 아스널은 점점 리그 4위의 위용을 회복했다.
그러나.
상수는 늘 상수지만, 변수는 변수를 불러온다.
시뻘건 눈을 부릅뜬 루이스가 자기 수비 위치를 버리고 오른쪽으로 가서 슬라이딩 태클로 찰리를 다치게 한 공격수의 발목을 걷어찼다.
라미스와 일대일 대결에 몰두하던 아스널 공격수는 피할 겨를도 없이 양 발목을 걷어차여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반칙을 범한 루이스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알아서 터치라인 밖으로 걸었다.
화가 잔뜩 난 아스널 선수들이 몰려왔지만, 스토크시티 역시 벤치 선수들까지 달려와서 루이스를 보호했다. 루이스는 멍한 얼굴로 뒤도 안 보고 천천히 걸었고, 그 뒤에서 아스널 선수와 스토크시티 선수들이 서로 엉켜서 말다툼을 벌였다.
그리고 구호차가 또 그라운드에 들어와 발목을 잡고 고통을 호소하는 아스널 선수를 실어 내갔다. 다행히 찰리를 이송한 앰뷸런스가 떠나고 바로 새 앰뷸런스가 빈자리를 보충했기에 지체 없이 병원으로 갈 수 있었다.
도라익은 이 모든 장면을 멍한 얼굴로 지켜보며 자신이 전반전에 레인보우 킥으로 도발한 게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라고 자책했다.
시발점은 아스널 선수가 찰리를 도발한 것이긴 하지만, 어차피 부모 욕을 하는 질 나쁜 선수도 가끔 만나는 게 프로의 일이다. 그냥 정상적으로 골을 넣었으면 일이 이 지경까지 안 왔을 것 같다는 생각에 도라익은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주장, 정신 차려. 루이스 역할을 네가 맡아야 해."
쇠렌센은 도라익을 도우라고 부르지 않고 주장으로 호칭했다. 과연, 예상대로 주장의 직책을 상기한 도라익이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미안해. 스토크시티의 주장으로서 부상 선수와 너희 팀 그리고 팬에게 사과한다."
도라익은 먼저 아스널 주장을 찾아가 사과의 뜻을 전했다. 찰리의 부상에 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던 아스널 주장이 얼굴을 붉히며 사과를 받아들였다.
덕분에 아스널 선수들의 분노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도발을 먼저 한 것도 아스널이고 선수를 앰뷸런스에 태운 것도 아스널이 먼저다. 도라익의 사과가 진심이건 아니건 아스널은 이 일을 더 물고 늘어질 명분이 없다.
사과로 소란을 진정시킨 도라익은 선수들을 모아 놓고 짧게 말했다.
"오늘 무조건 이긴다."
"주장의 뜻대로."
찰리가 부상으로 그라운드를 떠난 뒤 서서히 기울던 판세가 루이스의 퇴장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스토크시티는 반격 따위를 염두에도 못 둔 채 웅크리고 수비에만 전념했다.
- 아, 결국 실점합니다.
경기 88분. 아스널이 동점 골을 뽑아냈다.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쓸쓸하고 허무한 눈으로 미친 듯이 득점을 축하하는 아스널 선수들을 바라봤다.
"이 씨발 놈들아. 뒈질래!"
스토크시티 팬들이 불같이 화냈다. 일부 아스널 선수는 스토크시티의 벤치 앞에서 세리머니를 펼쳤고, 심지어 두 선수는 홈팀 관객석 앞에서 탭댄스로 도발했다.
"정신 차려. 경기 안 끝났어!"
도라익이 평소처럼 힘있게 외쳤으나, 넓은 경기장에 공허하게 울리기만 했다.
- 스토크시티 교체합니다.
경기 92분, 아스널이 코너킥을 얻은 상황에 알론소는 두 명의 선수를 교체했다. 경미한 다리 부상으로 점프가 어려운 라미스와 리엄 대신 오창범과 줄리엔을 투입했다.
키가 작고 헤딩도 별로인 오창범은 앞에서 반격 포인트가 되고 줄리엔은 코너킥 수비에 투입됐다.
도라익 역시 득점을 안 생각하고 공을 머리에 맞추기만 하는 거라면 자신이 있기에 페널티 박스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맡아 수비했다.
아스널이 코너킥을 찼다. 꽤 정교한 크로스지만, 헤딩 하나만큼은 찰리보다 나은 줄리엔이 공을 먼저 머리에 맞혔다.
"버텨!"
줄리엔의 공은 정확하게 오창범을 찾았다. 그러나 피지컬이 아시아 레벨에서도 뛰어난 축에 못 드는 오창범은 아스널 수비수를 등친 채 힘겹게 버티며 몸을 돌릴 엄두도 못 냈다.
상황을 누구보다 먼저 파악한 도라익이 크게 외치며 앞으로 달렸다.
오창범을 수비하던 아스널 선수는 도라익이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오자 급한 마음에 손으로 오창범의 허리를 감아 쓰러뜨렸다. 마치 씨름 선수와도 같은 아주 뛰어난 기술이었다.
"너 뭐야!"
도라익이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린 채 달려갔다. 도라익의 기세에 겁먹은 아스널 선수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형, 빨리 앞으로 차."
예상과 달리 도라익은 아스널 선수를 무시한 채 오창범을 일으켜 세우자마자 빠르게 앞으로 달렸다. 오창범은 길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공을 앞으로 찼다.
- 도라익 선수 드리블.
앞엔 수비수 한 명과 키퍼 한 명만 있다. 둘만 무너뜨리면 득점이고, 승점 3점이다.
경기 내내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서 힘들었지만, 도라익은 단전 깊은 곳에 저장한 젖 먹던 힘까지 끌어 올렸다.
- 위험한 태클!
- 저거 이따 공격 끝나고 옐로카드 한 장 줘야 합니다.
강철민이 욱한 마음에 아스널 선수를 저거로 호칭했다.
도라익은 순간 가속으로 상대의 태클을 피했다. 레드카드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도라익을 멈추려던 아스널 선수지만, 도라익의 생각은 달랐다.
어떻게든 골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상대가 레드카드를 받을 절호의 기회를 무자비하게 박탈했다.
아스널 키퍼는 경기가 곧 끝나는 마당에 페널티킥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공격은 꼭 막자는 생각을 머리에 가득 채운 채, 전에 없이 집중하여 반칙까지 염두에 두고 위치를 잡았다.
페널티 박스에 진입한 도라익은 또 왼발을 공 앞에 갖다 놨다. 전반전에 치욕적인 실점을 경험한 아스널 키퍼는 저도 모르게 작게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레인보우 킥으로 하는 슈팅에 대비했다.
그러나 이번에 도라익이 한 선택은 리보나 킥이었다. 왼발로 버틴 채 오른발을 X자로 꼬아 왼 다리 뒤로 보낸 다음, 발등으로 공을 정확히 맞혔다.
빠르지는 않으나 의외성이 강한 공이어서 키퍼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느리나 정확하게 구른 공은 포스트도 스치지 않고 골대에 정확히 들어갔다.
경기장이 흔들렸다.
스토크시티 선수들이 불주사를 맞은 들소처럼 도라익을 향해 뛰었다. 벤치 역시 튀김가루를 가득 묻힌 치킨을 던진 기름처럼 들끓었다.
스토크시티 팬들도 억눌렸던 울분을 한꺼번에 토하려는 듯이 일제히 발을 구르며 욕설이 30%를 차지하는 응원가를 높이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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