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진개진
경기는 갑갑하고 묵직한 분위기에서 시작됐다.
경기 주도권을 먼저 잡은 건 맨유였다. 대부분 위치에서 맨유 선수의 실력이 압도하기에 스토크시티가 밀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경기 전에 동료들의 나약함에 분노했던 도라익이건만, 너무 큰 압박에 평소처럼 빠르게 경기에 몰입하지 못했다.
상대가 맨유다. 지더라도 크게 원통한 일이 아니다. 다른 때라면 도라익도 평정심을 쉽게 유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지면 팀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커다란 압박감을 불러왔고, 자신을 뺀 모든 선수가 제대로 된 컨디션이 아닌 걸 확인하니 어깨도 더없이 무거웠다.
도라익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팀의 움직임을 다시 확인했다.
'뭉치지 못하고 있어.'
전술에 따라 움직이고 있긴 한데, 다른 선수를 지원하는 타이밍이 빠르거나 느렸다.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화들짝 놀라 너무 일찍 지원하러 가거나 주저주저하다가 마지못해 달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맨유에 헤딩 잘하는 선수가 없어서 양쪽 측면이 연신 뚫리는 데도 실점 없이 골대를 잘 지켜냈다.
맨유가 또 한 차례 공격을 펼쳤다. 공격이 끝나자 베르딩요가 윙에게 크로스를 제대로 올리라고 불평했다.
기술과 센스가 출중한 베르딩요에겐 낮고 빠른 크로스가 오히려 낫다. 대부분 선수는 운에 맡기지만, 베르딩요는 실력으로 낮은 크로스를 골로 만든다.
'많이 바뀌었네?'
맨유 선수 대부분이 낯설었다. 세대교체를 진행하며 도라익에게 익숙하던 얼굴들이 그라운드는 물론 벤치에도 없었다.
"도우!"
공을 잡은 토미가 패스하며 외쳤다. 도라익은 재빨리 달려 공을 잡고 누가 자신을 수비하는지 확인했다.
선수에 따라 어떤 기술로 돌파할지, 얼마나 신중하게 돌파할지 분류를 해야 하기에 경기 초반엔 상대 선수를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
간단한 페이크 2번을 준 도라익은 바로 공을 툭 치고 순발력으로 돌파했다.
'긴장했어.'
맨유 선수도 긴장해서 평소 컨디션이 아니었다.
도라익은 선수 두 명을 더 제치고 바로 슈팅했다. 득점하기 좋은 위치는 아니지만, 더 끌면 경기 리듬을 망칠 뿐이다.
맨유 키퍼가 도라익의 슛을 손으로 때렸다. 맨유 키퍼의 손바닥에 맞은 공은 잔디와 한 번 충돌하고 난 뒤에 다시 잡혔다.
'키퍼도 긴장했어.'
각도도 평범하고 실린 힘도 그다지 강하지 않은 슛이었다. 바로 양손으로 잡아도 전혀 문제가 없는 공이었다.
도라익은 수비 위치로 달리면서 맨유 선수들 얼굴을 확인했다. 스토크시티와 별반 다르지 않은 딱딱한 얼굴이었다.
어깨와 가슴을 누르던 무거운 느낌이 슬슬 사라지며 숨통이 활짝 트였다.
'부담이 큰 건 우리랑 똑같구나.'
베르딩요를 영입하며 세대교체를 미룬 탓에 지금의 맨유는 몇 년 전보다 훨씬 약하다. 지금 순위가 높은 건 오히려 세대교체를 하며 젊은 선수가 많아서 유럽컵과 남미컵의 영향을 덜 받은 덕분이었다.
객관적 실력은 맨시티나 리버풀은 물론, 아스널과 토트넘에도 못 미치는 게 지금 맨유다.
"쟤네 쫀 거 같아."
스로인 상황에 도라익이 토미에게 속삭였다.
"진짜?"
"키퍼의 킥이 다른 때보다 느려."
맨유 키퍼는 킥을 할 때 평소보다 몇 박자 느렸다. 물론, 페데리치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다.
"방금 공도 터치라인 나가기 전에 잡을 수 있었어. 그런데 그냥 내보내고 스로인을 하잖아."
도라익과 토미는 진영 오른쪽에서 공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오창범과 산체스 그리고 루이스가 백 보라면, 맨유 선수들도 오십 보는 되는 모습이었다.
부담에 짓눌리는 건 스토크시티뿐이 아니었다.
"우리만 긴장한 게 아니었구나."
토미의 구부정하던 등이 쭉 펴졌다.
"맥자넷한테 전해. 난 루이스랑 말할게."
맨유의 뻣뻣한 움직임을 확인한 스토크시티 선수들의 몸이 점점 유연해졌다.
그러나 스토크시티의 긴장한 모습에 자신감을 얻은 건 맨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도권을 잡고도 좋은 기회를 창출하지 못했던 맨유가 위협적인 공격으로 스토크시티 문전을 종종 위협했다.
물론, 덩달아 컨디션이 올라간 스토크시티도 호락호락 점수를 내주진 않았다.
'선빵을 날려야 해.'
도라익은 제임스와 발제르에게 수비 열심히 하라고 당부한 뒤 하프라인으로 갔다. 경기 초반에 실점할까 봐 걱정되어 위치를 내렸던 탓에 반격 기회가 생겨도 뭘 하지 못했다.
- 오창범 선수, 차단에 성공합니다.
과감히 내민 발에 공이 맞았다. 맨유의 왼쪽 윙 역시 날렵한 선수라 바로 반응했다.
공은 오창범의 오른발과 맨유 윙의 왼발 사이에서 몇 번이나 오가다가 엉뚱한 방향으로 튕겼다.
오창범이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척하며 앞으로 엎드렸다. 몸을 돌려 공을 향해 달리려던 맨유 윙은 오창범에게 진로를 방해받았다.
오창범도 왜소한 편이지만, 맨유 윙도 건장한 체격은 아니었다. 오창범의 잔꾀가 성공했다.
오창범은 상대 윙이 휘청하는 사이 네발로 달려서 공을 잡았다. 그리고 확인도 안 하고 앞으로 강하게 찼다.
도라익은 오창범의 킥을 잘 알기에 수비수보다 먼저 위치를 잡았다. 가슴 푸시로 도라익을 밀려던 맨유 수비수는 꿈쩍도 안 하는 도라익의 단단한 등에 깜짝 놀랐다.
그러는 사이 도라익은 가슴으로 공을 트래핑한 다음, 몸까지 돌렸다.
- 플리플랩!
강철민이 외쳤을 때 도라익은 이미 수비수 한 명을 제친 뒤였다. 예전과 달리 플리플랩을 한 번만 펼치고 상대 반응을 확인하지 않은 채 미리 정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돌파 성공률은 조금 낮아졌지만, 성공 시 훨씬 위협적이고 체력 소모도 획기적으로 줄었다.
두 번째로 만난 수비수는 첫 번째 수비수보다 더 못한 대우를 받았다. 도라익은 어떤 기술도 안 쓰고 가랑이를 뺀 다음, 진로를 방해하는 상대 팔을 무정한 손으로 치우고 곧장 달렸다.
파워가 장기인 두 번째 수비수는 도라익의 정면 돌파를 막지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졌다.
'좋았어.'
수비수 한 명이 사선으로 달리며 도라익이 먼 골대를 못 노리게 제한했다. 거기에 맞춰 키퍼도 앞으로 나오면서 각을 좁혔다.
축구 교본과 같은 모범 대처였다.
도라익은 공을 왼쪽으로 툭 치고 가속했다. 도라익이 오른쪽으로 돌파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했던 수비수는 바로 따라가지 못했다.
키퍼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오른손 편으로 움직이며 가까운 포스트로 향하는 슈팅 각을 완전히 죽였다.
도라익은 왼발 프런트 킥으로 먼 포스트를 노렸다.
정확한 일직선을 그리며 잔디 위를 구른 공은 포스트를 살짝 스치며 골이 되었다.
도라익은 검지를 살랑살랑 흔들며 세리머니를 펼치지 않았다.
골을 더 넣겠다는 예고 세리머니에 스토크시티 선수들의 기세가 타올랐다.
지거나 비겨서 1위를 못 할까 봐, 이겨서 1위를 할까 봐 두려웠던 부끄러운 기억이 장작이 되어 평소보다 훨씬 강한 투지를 태워 올렸다.
불행하게도 도라익의 도발성 예고는 맨유 선수들의 자존심에도 불을 지폈다. 스토크시티와 마찬가지로 실점한 맨유 역시 빠르게 최상의 컨디션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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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에서 맨유를 상대한 경기에서 스토크시티는 결국 실점하여 1:1 무승부를 냈다. 도라익은 예고 세리머니를 하고 추가 골을 못 넣은 것 때문에 며칠 기분이 꿀꿀했다.
그러나 팀 분위기는 점점 나아졌다. 이겼으면 더 좋을 뻔했지만, 실점 후 최상의 컨디션을 보인 맨유와 당당히 맞섰다는 사실만으로도 선수들의 멘탈이 단단해졌다.
15라운드 경기에서 도라익은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3:0 승리에 기여했다. 맨시티가 원정에서 미들즈브러에 0:2로 지는 바람에 리그 1위가 되었다.
16라운드의 마지막 경기에서 스토크시티는 첼시를 만났다. 먼저 진행한 경기에서 아스널이 승리하며 스토크시티는 2위가 되었다.
지난 시즌 말 도라익이 복귀하면서부터 컨디션이 급락한 마이콩은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했다. 체력이나 기술은 그대로인데, 경기 중에 틀린 판단을 자주 내려 팀의 실점을 종종 초래했다.
- 도라익 선수, 상표가 없는 신발을 신었습니다.
- 강철민 해설은 거의 사생팬 수준이네요.
- 경기와 무관한 다른 소식도 있는데, 도라익 선수의 부인 엘이 쌍둥이 임신했답니다.
신발 회사는 도라익이 신었던 축구화와 평소 신는 신발을 분석해 몇 가지 모델을 만들었다. 도라익이 마음에 꼭 드는 신발을 신고 나왔는데, 아직 정식 계약 전이어서 상표가 없었다.
'39그램이라니.'
도라익이 신은 신발은 고작 39그램이었다. 가장 가벼운 축구화는 아니지만, 도라익의 급가속과 급정지를 잘 버티면서도 이렇게 가벼운 건 대단한 일이다.
- 17골 24실점의 첼시입니다.
- 지난 시즌 말에 컨디션이 나빴던 마이콩이지만, 친선 경기 때는 또 훌륭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식으로 시즌이 시작하고 다시 엉망인 모습을 보였죠.
- 24실점 중에 마이콩의 실수로 생긴 골이 6개나 됩니다.
첼시는 몇 경기 지켜보다가 마이콩을 선발에서 제외했다. 그러나 마이콩이 첼시에 의미하는 건 그저 수비 잘하는 수미 정도가 아니다.
팀의 주장이자 정신적 지주인 마이콩의 부재로 첼시의 실력이 한 단계 하락했다.
- 도라익 선수, 윙으로 뜁니다.
첼시는 측면이 강한 팀이다. 도라익은 윙으로 뛰면서 맞불을 놓았다.
- 돌파에 성공합니다.
도라익은 왼쪽과 오른쪽에서 돌파와 컷인을 반복하며 첼시의 양 측면을 괴롭혔다.
첼시의 두 풀백은 수비도 잘하지만, 공격이 장기다. 수비 시에는 보통 수미나 센터백의 도움을 받는데, 도라익의 간결하고도 효율적인 돌파는 그런 도움이 무색하게 했다.
- 슛!
- 아쉽습니다.
스토크시티의 홈이고, 스토크시티는 현재 리그 2위로 기세가 좋다. 거기에 도라익의 활약까지 겹쳐 두 풀백은 경기에 보수적으로 임했다.
두 측면이 제압당하자 첼시는 날개가 꺾인 매가 되었다. 부리는 여전히 날카롭지만, 날개의 도움이 없어 제자리에서 쪼기만 하는 거론 별 위협이 되지 않았다.
- 리그 2위와 리그 14위의 경기답게, 일방적입니다.
양쪽 측면을 제압한 스토크시티는 라인을 올리고 줄리엔을 공격진으로 푸시했다.
도라익은 오히려 미드필드로 라인을 내려 첼시의 반격을 수비하는 역할을 맡았다.
전반전은 0:0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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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은 안 났지만, 첼시가 완패한 전반전이었다. 아이들 싸움으로 치면 코피만 안 났을 뿐 상대한테 깔려서 쉼 없이 두들겨 맞은 45분이었다.
"색깔이 이쁘네?"
제임스가 뜬금없이 도라익의 신발에 관심을 보였다.
"화학식으로 조합한 게 아니라 자연에서 추출한 물감이래."
축구화는 편한 게 최고다. 괜히 물감 때문에 피부 반응이라도 일으키면 큰일이기에 화학 물감은 사용하지 않았다.
"후반전에 나한테 공 집중해줄 수 있어?"
제임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느낌이 왔거든."
도라익은 산체스와 토미 그리고 루이스를 불러 공격 상황에 제임스한테 공을 몰아주라고 당부했다.
후반전이 시작하고 첼시가 반전을 꾀했다. 그러나 도라익의 전반전과 다르지 않은 활약에 첼시는 또 바닥에 쓰러져 양손으로 얼굴만 막고 얻어맞는 상황이 됐다.
- 여전히 일방적인 경기입니다.
줄리엔과 함께 페널티 박스에 진입한 도라익은 제임스가 공을 잡을 때마다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 어!
제임스의 말도 안 되는 패스에 해설도 짧은 탄성만 질렀다.
- 골! 도라익 선수 골입니다.
- 속 시원한 골입니다.
중계진이 제임스와 손바닥을 복잡하게 부딪치며 기쁘게 웃는 도라익과 벤치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땅만 바라보는 마이콩의 모습을 대조해 화면에 내보냈다.
경기장 중앙의 대형 화면에서 비교 샷을 본 첼시 선수들의 사기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 골 장면 다시 보겠습니다.
- 객관적으로 이 골은 제임스가 90% 했습니다.
- 만약 패스한 사람이 도라익이라면 우린 도라익 선수가 99.99%를 했다고 말했을 겁니다.
제임스의 패스는 첼시 선수 세 명의 가랑이를 뚫었다. 대형 화면으로 리플레이를 확인한 도라익은 제임스의 순간 집중 능력이 너무 부러웠다.
도라익과 발제르도 순간 집중력이 좋은 편이긴 한데, 제임스가 가끔 보여주는 집중력에 한껏 못 미쳤다.
- 첼시, 선수 교체합니다.
- 마이콩이 출전하나요?
아쉽게도 도라익이 한 골 추가로 넣고 88분에 교체로 내려갈 때까지 마이콩은 출전하지 않았다.
첼시를 2:1로 이긴 스토크시티는 몇 시간 전에 아스널에 양보했던 1위 자리를 탈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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