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또라이커
[인생 2회차. 팀 승리 위해 해트트릭 포기한 도라익.]
[윌슨 감독 왈 - 도라익의 멘탈은 이미 월드 클래스.]
[논란이 있었나요? 축구에만 전념하려 인터넷 끊은 도라익.]
[도라익의 페널티킥 양보. 현지에서도 칭찬이 자자.]
[유럽인의 시각으로 보는 도라익의 해트트릭 포기.]
[우린 도라익을 몰랐다.]
[도라익의 유럽 축구 적응의 비결. 피지컬과 테크닉보단 멘탈.]
[도라익의 페널티킥 양보에 레전드들 칭찬 잇달아.]
어느 호프집의 음침한 구석 자리에 세 남자와 두 여자가 모였다. 이들은 각자 스크랩한 기사를 공유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자, 그럼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떠들썩했던 페널티킥 쟁탈 논란에 비추어 볼 때, 화력을 보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 어렵게 하네요. 그냥 하나로 합치자고 하면 될걸."
안경을 쓴 여자가 맥주를 홀짝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현재 도라익 선수 팬카페 중 가장 큰 우리가 합치면 작은 카페들은 자연스럽게 딸려올 겁니다. 다음에 또 논란 따위가 일어나면 보다 큰 목소리로 도라익 선수를 위해 외칠 수 있습니다."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열변을 토했다.
"그런데 두 가지 선제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카페를 새로 파서 회원들을 옮긴 후 원 카페는 폐쇄할 것. 또 하나는 새로 이름을 지어야 합니다. 기존 다섯 카페 어디도 생각나지 않는 그런 이름으로요."
"왜요?"
중학생, 잘해야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애가 발끈했다.
"텃세 따위로 내분이 일어나면 안 되니까."
안경 쓴 여자가 어린애 달래는 말투로 여자애를 설득했다.
"우리 카페 이름은 이쁜데요."
여자애가 만든 카페는 회원이 3천 명이나 된다. 다섯 카페 중 회원이 2번째로 많기 때문에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 못 한다.
"도라익은 꽃이 되어 우리한테 왔다."
머리를 짧게 기른 남자가 말했다. 카페를 잘 관리하는 걸 보면 현역은 아니고 갓 제대한 듯하다.
"너무 여성적이네요. 축구 팬은 남자가 다수라는 걸 잊지 마세요."
"왜요? 남자는 여성적인 감성이 있으면 안 돼요?"
여자애가 발끈하자 안경 쓴 여자는 머리 짧은 남자한테 눈총을 쐈다. 우열을 겨루려는 게 아니고 통합을 위한 자린데 이런 지적질은 현명하지 못하다.
"그게 아니고. 최대한 도라익 선수를 좋아하고 응원하는 사람이 많아야 하니까 이름도 최대한 그 방향으로 지어야 한다는 말이지."
"난 우리 카페 이름이 괜찮다고 보는데."
이십 대와 삼십 대의 경계로 보이는 외모의 남자가 말했다.
"신속의 도라익. 무슨 배달 광고 같네요."
짧은 머리의 남자가 또 태클을 걸었다.
"제가 말한 두 가지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전 빠지겠습니다. 마음에 안 들면 본진 돌아간다고 분탕 치는 종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고, 우리가 원조라고 깝죽대며 단결 해치는 종자가 꼭 있습니다."
카페 이름을 새로 짓자고 주장한 남자가 말했다. 오늘 만나자고 쪽지를 돌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제가 남돌 여돌은 물론 야구 선수 덕질까지 해봤습니다. 덕력은 15년이 넘었고요. 수많은 팬클럽이 어떻게 무너지고 팬카페가 어떤 과정을 거쳐 황폐해지는지 15년 지켜봤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왔던 네 남녀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카페 이전과 폐쇄는 저도 동의합니다."
"동의해요."
"동의할게요."
머리를 짧게 기른 남자도 고개를 끄덕여 동참했다.
"그럼 새 카페 이름인데, 생각나는 거 있으면 그냥 말해보세요."
여자애가 가장 열성적이었다.
꽃보다 도라익. 꽃보다 향기로운 도라익. 꽃은 져도 도라익은 영원하리.
"주스 마시면서 조금 쉬고 있어. 다른 사람 의견을 듣다 보면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를 거야."
안경 여자가 달달한 오렌지 주스로 여중생 입을 막아버렸다.
"광속의 사나이. 어떻습니까?"
머리 짧은 남자가 말했다.
"신속의 도라익은 배달 광고 같다면서요. 광속의 사나이는 모바일 광고 같네요."
다섯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가 시비를 걸었다.
"여러분. 이제 21세기도 3분의 1이 지났습니다. 좀 더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이름으로 합시다. 도라익 선수를 다른 스타와 구분되게 잘 표현하면서도 친근한, 그리고 한국적인 그런 이름 말입니다."
그때 여중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친구한테 물어볼게요."
"친구한테는 왜?"
"라익 오빠 동생들이랑 친하거든요. 집에도 자주 놀러 갔어요."
그제야 남은 네 사람은 저런 철부지가 어떻게 3천 명이나 되는 팬카페를 이끌었는지 알 수 있었다. 다른 카페보다 정보가 빠르고 상당히 구체적이었던 이유도 깨달았다.
여중생은 귀여운 액세서리가 달린 분홍색 커버의 전화기를 꺼내 통화했다.
- 여보세요.
"스피커로 해주세요."
- 응. 선희야. 서울 잘 도착했어?
- 응. 라연아. 넌 뭐해?
- 라진이 공부 가르치고 있어.
- 나 지금 오빠 팬클럽 운영하는 사람들이랑 만났는데, 큰 카페 하나 만들기로 했어.
- 에구. 그 또라이가 뭐가 좋다고 카페까지 만들어.
- 안녕하세요. 도라익 선수 동생분. 우린 도라익 선수 팬카페 운영자들입니다.
안경 쓴 여자가 통화에 끼어들었다.
- 안녕하세요.
- 도라익만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이름이 없을까 해서 고민하고 있는데요. 도라익 선수가 친구들 사이에서 불리는 별명 같은 거 알려주실 수 있나요?
- 별명 딱 하난데요. 또라이.
- 좀 더 귀여운 별명은 없을까요?
- 할아버지 친구들은 오빠를 꼴통이라고 불러요.
그때 전화기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 라연아, 너 누구랑 통화하니?
- 오빠 팬클럽 임원들. 팬클럽 이름 짓겠대.
- 그럼 형 닉네임으로 하면 되잖아.
- 오빠가 닉네임이 있어?
뜻밖의 정보에 다섯 운영자도 반색했다.
- 그게 뭔가요?
- 스또라이커요.
쾅.
머리 짧게 기른 남자가 테이블을 치며 벌떡 일어섰다.
"바로 이겁니다. 내가 도라익 선수를 좋아했던 건 도쿄에서 '독도는 우리 땅'을 부른 패기와 결승전 이후 10억 중국인이 보는 인터뷰에서 '우린 팀이었고 상대는 11명이었다'와 같은 뼈 때리는 발언 때문이었습니다. 스또라이커, 뭔가 거침없이 황야를 달리는 고독한 카우보이의 느낌이 나지 않습니까?"
'저거 또라이구나. 거리 둬야겠다.'
'길에서 마주치면 못 본 척 피해야지.'
"동의합니다. 스트라이커와 도라익의 결합. 정말 찰떡입니다. 게다가 스또라이커라고 하면 뭔가 귀엽고 풋풋한 느낌도 있습니다."
"저도 괜찮다고 봅니다. 작은 실수를 해도 '또라이잖아' 이러면서 사람들이 트집 안 걸 거고요. 그러면서도 느껴지는 이미지가 부정적이지 않아요."
"젊은 층에 확실히 어필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잠시만요. 이런 건 검증부터 해야죠."
전화를 끊은 김선희는 아무 사이트나 로그인한 후 닉네임 변경을 시도했다. 닉네임을 스또라이커로 변경하려고 하자 이미 선점됐다고 팝업이 떴다.
"오빠가 통합인증도 해놨어요. 사칭도 있을 수 없네요."
닉네임 통합인증.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유명인과 비슷하거나 같은 닉네임을 만들어 분탕 치는 걸 방지하려는 의도로 만든 정책이다.
통합인증을 거친 닉네임은 인터넷진흥위원회 산하 관리기구에 등록되며, 인터넷진흥위원회에 등록된 모든 사이트에서 다른 사람이 해당 닉네임을 사용할 수 없다.
닉네임을 통합 등록하는 절차가 간단하지 않고 수정도 어렵기에 웬만하면 귀찮아서 안 하는데, 도라익은 스또라이커라는 닉네임이 엔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카페 개설은 누가 하죠?"
"제가 하겠습니다. 덕질 오래 하다 보니 카페 관리하는 포탈 직원이랑 친분이 좀 있습니다. 그간 활동 이력을 인정받아 바로 3급 카페를 개설할 수 있고요."
"카페 디자인은 제가 하죠. 디자인 학과고요. 3D 그래픽 가능합니다."
놀랍게도 머리를 짧게 기른 남자는 군인이 아니었다. 머리를 자른 건 군대 때문이거나 사회에 불만이 있는 게 아니고 열이 센 체질이어서 머리가 덥수룩하면 땀이 많이 나서라고 한다.
"저는 지역 상가번영회 부회장입니다. 카페 활동에 필요한 물건을 제작 혹은 구매할 때 내부 가격으로 싸게 얻을 수 있습니다. 인터넷 최저가보다 더 낮을 겁니다. 배달은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이십 대와 삼십 대 경계로 보이는 남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가업을 이어받았다. 덕분에 아직 젊은 나이에도 인맥이 상당했다.
"저는 커피 하우스 운영합니다. 남는 게 시간이거든요. 카페 관리는 제게 맡겨주세요."
안경 쓴 여자가 말했다.
"카페 개설은 지금 바로 할게요. 그런데 회원 모집은 어떻게 하죠? 회비 받으면 다들 싫어할 텐데."
카페를 크게 키우려면 지하철 혹은 버스 정류장 광고가 필수다. 팬카페를 하나로 통일하려는 것이기에 초반부터 확실히 치고 나가야 한다. 그러나 광고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제게 맡겨주세요."
자신만만하게 말한 김선희가 다시 전화했다.
- 응. 라연아. 오빠 언제 한국에 와?
- 안 와. 영국에서 훈련하겠대.
- 왜?
- 또라이잖아.
개인 친분을 이용하려던 계획이 물거품 됐다.
그때 안경 쓴 여자가 끼어들었다.
- 사인 유니폼 몇 개만 부탁해도 될까요? 구매랑 배송 비용은 저희가 부담할게요.
- 집에 남는 게 몇 개 있으니 그냥 드릴게요.
- 작가의말
팬카페 스또라이커 정식 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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