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익이는 무결점임
한국팀은 반격 상황에서 도라익을 찾았다. 이혁신은 몸싸움이 별로여서 높은 공을 따지 못한다.
도라익이 공을 잡자 수비수가 몸을 바싹 붙였다. 도라익은 몸을 돌리지 못하고 시간을 끌다가 지원하러 온 고명준에게 패스했다.
- 전반전부터 지금까지 도라익 선수는 공을 잡은 후 거의 백 패스만 했습니다.
- 그래도 몇 번 안 되는 돌파로 골 기회 하나 만들고 본인이 직접 넣었죠.
- 우레이 감독이 말한 도라익 선수의 약점이 저건가 봅니다.
중앙수비수가 붙으면 무조건 백패스였고 풀백과 경합할 때 가끔 돌파에 성공한 적 있다. 비록 실점하긴 했으나 중국팀은 도라익을 잘 상대하고 있던 셈이다.
- 추가 골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 한국팀 문전 상황이 위태롭습니다.
- 귀화 선수들의 개인 능력이 너무 출중합니다. 4강전에서 호주가 0:4로 진 게 우연이 아니었네요.
호주가 예전보다 못하고 중국이 예전보다 강해졌다곤 하지만, 4골의 차이는 너무했다. 네 수비수와 두 미드필더가 수비만 하고 네 공격수가 공격해서 낸 성과다.
20세기 중반의 낙후한 전술 같지만, 전술 이해가 떨어지고 체력이 부족한 중국팀엔 딱 알맞은 방식이다. 게다가 귀화 선수들의 개인 능력이 아시아 레벨에선 이런 전술을 써도 될 정도로 출중하다.
후반 60분.
차 감독이 먼저 교체 카드를 꺼냈다.
"도라익, 일루 와."
도라익은 차 감독의 손짓을 받고 달려갔다. 이혁신은 반대로 두 중앙수비수 사이로 걸어갔다.
"이제부터 두 가지만 명심해. 중국팀 수비라인하고 미드필더의 거리가 멀면 그사이 공간을 차지해. 거리가 가까우면 수비라인과 수평을 맞춰."
자신이 교체인 줄 알고 달려왔던 도라익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혁신이 하는 거 잘 봐."
교체로 나가는 선수는 도라익이 아닌 이혁신이었다. 심판이 교체 신호를 보내자 이혁신은 반대편 터치라인으로 느리게 걷다가 몸을 돌려 벤치가 있는 터치라인으로 걸었다.
심판이 양손을 위로 올리며 달리라고 재촉하자 걷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뛰는 시늉을 했다.
참다못해 중국 수비수가 다가가 이혁신의 등을 밀었다. 이혁신은 몸을 홱 돌려 자신을 민 중국 선수를 째려봤다.
중국 선수가 한 번 더 밀자 아예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시비를 걸었다. 심판이 달려와 중국 선수와 이혁신에게 옐로카드 한 장씩 적립했다.
옐로카드를 받은 이혁신은 다시 걷는 속도로 달려 터치라인까지 왔다.
"봤지? 점수를 앞선 상황에 교체될 때 혁신이처럼 해. 내가 부른다고 방금처럼 그렇게 막 달려오면 안 된다."
이혁신 대신 출전한 선수는 중앙수비수와 수미 둘 다 가능한 멀티 자원이었다. 이혁신 말고 다른 윙은 거의 수비용이기에 한국팀은 도라익 빼고 전원 수비 자원인 셈이다.
소속팀에서 공격형 미드필더 롤을 수행하는 고명준이 반격 시 도라익을 지원하기로 하고 한국은 수비 라인을 대폭 내렸다.
이혁신이 내려가자 중국팀도 수비수 세 명씩 남겨둘 필요가 사라졌다. 도라익의 속도를 경계하여 중앙수비수 한 명이 남고 두 풀백이 번갈아 도라익을 마킹했다.
'마킹 당할 때는 어떻게 해야지?'
차 감독 지시 사항엔 없는 상황이다.
다행히 마킹하는 풀백뿐 아니라 중앙수비수도 늘 도라익과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아 위치선정의 고민을 덜어줬다.
- 이번 대회 한국팀 MVP는 김춘호 선수입니다.
- 8강전과 4강전에서 슈퍼 세이브가 따로 하이라이트 편집을 해도 될 정도로 많았죠.
- 경기가 이대로 흐르면 어렵습니다. 뭔가 변화가 없으면 골문이 언제든 뚫립니다. 차 감독한테 다른 복안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후반 70분. 왼쪽 풀백이 쥐가 올라왔다. 거의 수비만 하는 오른쪽과 달리 왼쪽은 오늘 경기는 아니지만 공격에도 자주 가담했었다. 조별 경기부터 피로가 누적된 데다가 귀화 선수와 몸싸움을 자주 벌이다 보니 체력이 일찍 소진되었다.
- 수비가 공격보다 체력 소모가 50% 정도 더 많습니다. 게다가 코투는 개인기가 훌륭하고 피지컬도 어마어마한 선숩니다.
차 감독은 클럽팀에서 중앙수비수를 보는 선수를 왼쪽 풀백으로 올려보냈다. 백업 풀백이 있긴 한데 체격이 왜소해 코투와 붙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뻔하다.
그리고 중국팀이 첫 교체를 했다. 중앙수비수 한 명을 빼고 공격형 미드필더 한 명을 넣었다.
"라익아. 내가 공 잡으면 무조건 뛰어."
중국팀의 교체가 진행될 때 고명준이 도라익한테 말했다.
"어디로 뛸까요?"
"그냥 뛰어. 알아서 패스할게."
경기가 재개되고 얼마 안 지나 고명준이 공을 잡았다. 도라익은 바로 앞으로 달렸다.
관객들이 와 함성을 지르자 도라익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고명준이 찬 공이 도라익이 달리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도라익은 속도를 살짝 늦춰 공이 잔디에 떨어지는 타이밍에 도착했다.
풀백이 뒤에서 쫓고 중앙수비수는 도라익의 오른쪽에서 달리며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막았다. 그리고 키가 2m나 되는 중국 골키퍼가 나와서 슈팅 각도를 깔끔하게 없앴다.
앞과 뒤와 오른쪽이 막힌 도라익에겐 왼쪽으로 가는 선택밖에 안 남은 듯했다.
도라익은 급정지하며 발바닥으로 튕기는 공을 세웠다. 골키퍼는 칩슛을 경계하며 뒷걸음쳤고 중앙수비수는 도라익을 따라 속도를 늦췄다.
도라익은 중앙수비수가 멈추자 다시 골라인 쪽으로 돌진하려는 것처럼 상체를 움직였다. 급히 몸을 멈추느라 무리했던 중앙수비수는 도라익의 상체 페이크에 속아서 균형을 잃었다. 도라익은 곧 공을 뒤로 뺐다.
중앙수비수는 중심을 잃었고 풀백은 도라익이 공을 멈추는 사이 앞질러 갔다. 덕분에 도라익은 아무 방해도 안 받고 중앙으로 치고 나갈 수 있었다.
원래는 키퍼와 두 수비수가 앞과 옆과 뒤를 포위한 형국이었는데, 급정거와 방향 전환을 통해 풀백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골키퍼와 중앙수비수 둘 다 급히 움직이며 도라익의 슈팅 각도를 제한했다.
오른발을 들어 슈팅 페이크를 준 도라익은 플립플랩으로 다시 오른쪽으로 갔다. 슈팅 페이크에 한 번 속고, 플립플랩으로 도라익이 왼쪽으로 가려는 줄 알고 또 한 번 속은 중앙수비수는 도라익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불굴의 풀백이 어느새 달려와 도라익 앞을 막았고, 중국팀 선수 셋이 수비에 가담하러 달려왔다.
한국팀은 고작 고명준 한 명만 뛰고 남은 선수들은 라인을 맞춰 중앙선까지만 올라왔다.
도라익이 또 한 번 플립플랩을 펼쳤다.
이번엔 오른쪽으로 가는 척하며 왼쪽으로 꺾었다. 도라익 앞을 막으려고 급하게 달려온 풀백은 아주 쉽게 속았다.
풀백까지 벗겨낸 도라익은 뒤에 중앙수비수를 두고 오른쪽에 풀백을 두고 앞에 골키퍼를 뒀다.
아까와 비슷하게 포위된 상황으로 볼 수 있지만, 중앙수비수와 풀백은 도라익을 전혀 방해할 수 없는 위치다.
도라익은 무심하게 공을 왼쪽으로 툭 치고 달렸다. 키가 2m나 되는 중국팀 골키퍼가 황급히 오른쪽으로 체중을 이동했지만, 도라익의 스피드를 따라가지 못했다.
두 번의 터치로 골키퍼까지 제친 도라익은 활짝 열린 골대로 공을 부드럽게 굴려 넣었다.
"야. 너 여친 있냐?"
벤치에서 달려온 이혁신이 또 공을 배에 넣고 젖병 세리머니를 하는 도라익에게 질문했다. 입에서 왼손 엄지를 뺀 도라익이 대답했다.
"엄마가 여섯째 임신했거든요. 5월이면 태어날 거래요."
그제야 시름을 놓은 선수들이 도라익을 에워싸고 아기를 안고 흔드는 '요람 세리머니'를 했다. 브라질의 베베토 선수가 가장 먼저 시작한 세리머니인데, 그날 태어난 아들도 축구 선수가 되어 한때 화제였다.
- 이번엔 VAR 볼 이유가 없겠죠?
- 우레이 감독이 말한 약점이 혹시 드리블과 돌파였나요? 확실히 월드 클래스와 기량 차이가 조금 나긴 합니다. 시급히 보완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오랜만에 국대에 무결점 스트라이커가 나온 것 같아 기쁩니다. 아직 미숙한 면이 있지만, 피지컬과 기술은 이미 완성된 거나 마찬가지로 보이네요.
한일전 당시 도라익은 물론이고 차 감독도 도라익의 출전을 예상하지 못했다. 후반전에 출전한 도라익은 경험 부족으로 수비수를 상대할 때 꽤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감독이 시킨 일은 합격점 이상으로 해냈지만,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에선 판단이 느리거나 틀린 선택을 했다.
우레이 감독이 도라익의 드리블과 돌파를 오해한 이유다.
지금도 여전히 미숙하지만, 훌륭한 피지컬과 십 년 가까이 홀로 연마한 기본기 덕분에 수비수 두 명과 골키퍼를 벗겨내고 골을 만들었다.
일본은 도라익을 과대평가하는 바람에 전술적 실수를 저질렀고, 중국은 도라익을 과소평가하는 바람에 실점했다.
"삼촌, 패스 고마워요."
세리머니를 마친 한국팀 선수들이 돌아가자 경기가 재개됐다. 도라익은 중앙선을 타고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왕복하며 두 수비수를 괴롭혔다.
'중앙수비수를 하나 빼면서 선수들 위치가 조금 변했어. 그 틈을 찌른 거야.'
차 감독이 박창식의 부상 후에도 똑같은 포메이션과 전술을 고집한 이유다. 중국팀의 우레이 감독은 포메이션을 너무 극단적으로 바꿔버리는 실수를 범했다.
경험이 풍부한 고명준은 우레이 감독의 실책을 빠르게 알아채고 도라익과 합작하여 골을 만들었다.
'축구.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밌는데.'
새로운 세상을 맛본 도라익의 심장은 흥분으로 세차게 뛰었다.
- 작가의말
부족한 게 많은데 골은 잘 넣는 도라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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