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킥
선제골로 주도권을 잡은 덕분에 도라익은 운신의 폭이 훨씬 커졌다. 덕분에 크로스로 찰리의 득점을 하나 돕고 페널터킥을 만들어 찰리에게 양보하기도 했다.
1골 2도움을 기록한 도라익은 후반 60분에 우디르로 교체되었고, 찰리 역시 78분에 줄리엔으로 교체되었다.
아직 9경기만 진행했기에 큰 의미는 없지만, 도라익은 6도움으로 도움왕이고 찰리는 8득점으로 득점왕이다. 팀 역시 선덜랜드를 이기며 얻은 3점으로 순위가 11위로 급상승했다.
그러나 이러한 호사에도 스토크시티의 감독과 코치진은 걱정에 잠겼다.
"팀에 문제가 생겼다."
오후 훈련이 끝난 후 감독이 전체회의를 소집했다.
"이번 시즌 슈팅 기록을 보면 도우와 찰리 그리고 페어린던이 95% 차지했다."
찰리가 약 55%이고 도라익은 30% 정도 된다. 페어린던이 인사이드로 컷하여 한 슛이 약 10%다.
"제임스와 산체스는 슈팅을 적절히 늘려. 공격 코치가 득점 가능성이 높은 포인트에서 슈팅을 때릴 기회가 생기도록 전술 몇 개 짤 거야."
"그리고 맥자넷. 자넨 수비도 공격도 아주 안정적으로 잘하고 있어. 그러나 가끔은 오른발이든 왼발이든 과감하게 슛을 때렸으면 좋겠어. 지금쯤은 자네 성향이 다 파악되어 모든 팀이 패스만 염두에 둘 거야. 그들한테 혼란을 안겨줘야지 않겠어?"
아홉 경기를 뛰는 동안 스토크시티는 11골을 넣었다. 그중 세 경기에 3골씩 넣었고 1골을 넣은 두 경기는 무승부와 패배를 기록했다.
공격 수단은 다양하지만 결국 득점하는 사람이 정해지다시피 하여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탓이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린 지금까지 코너킥이나 프리킥 득점이 전혀 없다. 이 역시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때 타이먼이 수줍게 손을 들었다.
"오른발 프리킥 및 코너킥은 자신 있습니다."
"코너킥은 계속 페어린던과 맥자넷이 맡는 거로 하지. 전술 코치는 타이먼의 프리킥을 확인하고 프리킥 전술 몇 개 짜도록."
"그럼 저도 왼발 프리킥에 도전해 보겠습니다."
도라익이 씩씩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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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은 일 있어?"
최경호의 질문에 도라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내가 팀의 왼발 프리킥 키거야. 직접 슈팅을 노리기엔 부족하지만, 크로스 올리는 건 합격이래."
페어린던의 크로스는 너무 빠르다. 오프사이드를 조심해야 하는 프리킥 전술에는 적합하지 않다. 반대로 맥자넷의 크로스는 조금 느리다.
언제 어디서 올릴지 모르는 필드 상황의 크로스와 달리 프리킥은 공을 정해진 곳에 두고 차야 한다. 공의 위치에서 대충 어떤 크로스가 나올지 유추할 수 있기에 조금 느린 맥자넷의 크로스는 키퍼가 처리하기 편하다.
도라익의 크로스는 속도와 높이 그리고 정확도 모두 합격이다. 특히 공에 회전이 많이 걸리지 않는 장점이 있어 간접 프리킥 키커로 낙점받았다.
직접 프리킥은 여전히 경기 전에 컨디션을 확인해 정하기로 했지만, 도라익은 자신이 적임자라고 확신했다.
"근데 형은 왜 여기까지 따라왔어?"
현재 둘은 로마 공항에 있다. 유로파리그 마지막 상대 SSD 팔레르모는 시칠리아섬에 있는 팀이다. 2시간 전에 로마 공항에 도착한 스토크시티는 시칠리아섬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하려고 대기하는 중이다.
"너 까마귀 고기 먹었어? 네 동생들 입을 옷 고르러 온다고 했잖아."
도라익과 평면광고 계약을 맺은 패션 브랜드가 이탈리아에 있었다.
"아. 그래서 나보고 어머니랑 동생들 옷 사이즈 알아 오라고 했구나."
"너 요즘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 거야?"
뻘쭘해진 도라익은 화제를 전환했다.
"근데 형. 형은 여자한테 수십 번 차였잖아."
"수십 번 아니야. 아직 서른 번 안 됐어."
"여자한테 차이면 슬퍼?"
"당연히 슬프지."
"근데 차였다는 기준이 뭐야?"
"내가 좋아한다고 확실히 전달했고 상대가 확실히 거부 의사를 밝히면 차인 거지. 상대가 내 번호를 차단했다거나 내 톡을 지우면 확인사살이고. 만회할 여지도 없어."
"형은 고백하자마자 차이고 웃어본 적 있어?"
"내가 또라이야? 좋아하는 사람한테 차였는데 웃게?"
'확실히 이상한 여자야.'
자신의 거절을 듣고도 깔깔 웃던 엘이 생각났다.
"나 비행기 시간 됐다. 먼저 간다."
최경호는 돈을 아끼려고 밀라노 직항 말고 로마를 경유하는 비행기 편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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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르모는 아름다운 도시다.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보트를 타고 수려한 풍광을 구경하며 그간 쌓인 정신적 피로를 풀었다. 아쉽게도 팔레르모에는 건의를 받아줄 만한 국제기구가 없어 새 에피소드를 만들지 못했다.
그리고 23일 오후. 스토크시티와 팔레르모의 경기가 빗속에서 진행됐다.
"쟤넨 자괴감이 안 들까?"
팔레르모의 유니폼은 연한 분홍색이었다. 상하의는 물론 양말까지.
"왜? 이쁜데."
타이먼이 말했다.
"그럼 내가 찬다?"
"얘기가 왜 그렇게 돼?"
"넌 팔레르모에 호감을 느끼고 있어. 그래서 좋은 슈팅을 때리기 어려울 거야."
도라익이 억지를 부렸다. 어차피 왼발로 차기 편한 위치기에 타이먼도 굳이 언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럼 나 페이크 할게."
타이먼은 공 가까이에 왼발을 댄 다음 성큼성큼 뒷걸음질했다. 그렇게 대부분 선수가 타이먼이 언제 멈추는지에 집중하고 있을 때, 짧게 세 걸음 달린 도라익이 왼발로 슈팅을 때렸다.
왼발 발등에 잘 맞은 공이 수비수들이 세운 벽을 넘어 골대로 정확하게 날아갔다.
- 골입니다. 도라익 선수 스토크시티 유니폼을 입은 후 첫 직접 프리킥 득점입니다.
- 스토크시티의 올해 첫 직접프리킥 득점이기도 하죠. 간접 프리킥 득점도 고작 2개밖에 없습니다.
- 옛날 프리킥 득점이 흔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약 20년 전부터 한 시즌에 팀 전체 프리킥 득점이 10개를 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 온갖 컵대회에 참가하여 일 년에 70경기 이상 뛰는 강팀들도 직접 프리킥을 5개 넣기 힘들어요.
타이먼의 페이크가 도움이 됐고 비가 내려 바닥이 미끄러운 덕도 봤다. 도라익의 프리킥 슈팅은 아주 빠르지도 않고 키퍼가 건드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궤적이 까다롭지 않았다.
키퍼가 조금만 빨랐거나 바닥이 덜 미끄러웠다면 골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홈에서도 라인을 대폭 낮추고 수비에 전념하며 소극적으로 경기를 운영하던 팔레르모는 실점한 후 라인을 올려 공격적으로 나왔다.
- 도라익 선수 단독 찬스입니다.
침투할 공간이 커지자 도라익이 살아났다. 경기 내내 내리는 비와 움츠린 상대 때문에 순발력을 이용한 돌파가 어려웠는데 이젠 마음껏 날뛸 수 있는 너른 공간이 생겼다.
- 키퍼가 나옵니다.
- 도라익 선수 속도를 늦추네요.
공도 신발도 방수 코팅이 되어 있다곤 해도 비가 안 내릴 때와 똑같을 순 없다. 칩슛은 힘 조절도 중요하고 슈팅할 때 터치 위치도 중요하기에 비가 안 왔어도 빠르게 달리며 차기엔 부담된다.
도라익은 확실한 슈팅을 하기 위해 속도를 늦추며 보폭을 조절했다.
- 기회예요. 키퍼가 넘어졌어요.
도라익이 속도를 늦추자 키퍼도 급히 멈추려 했다. 그러나 너무 서두른 바람에 미끄러워 넘어지고 말았다.
도라익은 이게 웬 떡이냐 싶어서 바로 슈팅을 때렸다.
- 도라익 선수, 오른발 슈팅입니다.
- 인사이드로 감아서 찬 공이 정확히 골대로 들어갔습니다.
골을 넣은 도라익은 세리머니를 하려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팔레르모 선수들이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못마땅한 얼굴로 키퍼에게 무언의 질책을 보내고 있었다.
도라익은 세리머니를 포기하고 엎드려서 골대만 멍하니 바라보는 키퍼한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키퍼가 내민 손을 잡자 힘줘 일으킨 뒤 포옹하고 어깨를 두드려줬다.
- 도라익 선수 훌륭한 모습입니다.
- 지난 시즌 팔레르모 키퍼가 현재 유벤투스 주전으로 뛰고 있죠. 그리고 며칠 전 주전 키퍼가 부상자 명단에 오르는 바람에 오늘 데뷔전을 치르게 된 19세 어린 선수입니다.
일부 팔레르모 팬들도 키퍼의 이름을 연호하며 격려의 뜻을 전했다.
- 경기 재개합니다. 팔레르모가 더욱더 공격적으로 나옵니다.
후반 75분. 우디르가 팔다리를 쭉쭉 늘이며 출전 준비를 했다. 그리고 스토크시티는 아까 프리킥 득점을 한 위치와 가까운 곳에서 프리킥 기회를 얻었다.
"3번 어때?"
도라익의 말에 타이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라익은 양손을 높이 들어 비둘기를 만들었다. 도라익의 신호를 받은 스토크시티의 꺽다리들이 한데 몰려 열심히 움직였다.
그리고 공 주변에는 세 명의 선수가 섰다. 왼발로 직접 슈팅이 가능한 도라익, 오른발 슈팅이 가능한 타이먼, 그리고 오른발로 크로스를 올릴 산체스.
타이먼은 공하고 불과 세 걸음 떨어진 곳에 섰다. 휘슬이 울리자 먼저 도라익이 도움닫기를 하며 공을 향해 달려갔다.
- 페이큽니다.
도라익은 슈팅하는 척 공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바로 타이먼이 움직였다.
- 또 페이큽니다.
타이먼은 공을 건드려서 뒤로 보냈다.
- 산체스가 공을 띄웁니다.
타이먼이 굴린 공은 산체스가 칩킥으로 차서 곱게 띄웠다. 수비벽을 넘은 공은 어느새 침투한 도라익이 왼발 발리슛으로 골대에 들여보냈다.
키퍼는 연이은 페이크에 속아서 시종 움직이지 못했다. 수비벽 역시 도라익과 타이먼이 슈팅할 것처럼 할 때마다 점프하느라 침투에 대비하지 못했다.
VAR이 개입했고 온사이드 판정을 내렸다.
"땡큐."
교체되는 도라익에게 다가간 팔레르모 키퍼가 딱딱한 영어로 고마움을 표했다.
"유 웰컴."
키퍼와 한 번 포옹한 도라익은 빠르게 달려 그라운드를 벗어났다. 차 감독이 점수가 앞선 상황에서 교체할 때 시간을 끌라고 했지만, 왠지 그러기 싫었다.
팔레르모 키퍼한테도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출전 시간 1분이 간절한 우디르한테도 실례인 것 같았다.
수십 명 팔레르모 팬이 교체되는 도라익에게 박수를 보내며 뭐라고 외쳤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나쁜 말은 아니겠지 생각한 도라익은 손은 흔들어 고마움을 표했다.
"도우. 너 이번 시즌 해트트릭 벌써 세 개야."
"진짜?"
"유로파리그에서만 세 번 했어. 기네스북에 오를지도 몰라."
"그거 연금 나와?"
스토크시티 벤치가 빵 터졌다.
- 작가의말
이 글은 지난해 6월에 89화까지 쓰고 다른 글을 올리느라 멈췄습니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 보니까 댓글에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2시즌이 지루하고 중구난방인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내용 아니면 확 줄이기로 했습니다. 이번 편 역시 2편을 합쳐 하나로 만든 겁니다. 합치고도 스토리 진행에 별 영향이 없는 걸 보면 줄이기 잘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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