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전술
"왜 내가 제임스랑 자리를 바꿔야 합니까?"
"그건 훈련 전에 이미 설명했을 텐데."
"철회하십시오."
톰 인스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톰 인스는 한때 영국 대표팀 주전이었다. 제2의 제라드로 불리며 언론이 자주 리버풀과 연결시키던 선수로, 한 번의 큰 부상으로 커리어가 무너질 뻔했다.
다행히 잘 극복하여 그라운드에 복귀했고, 예전보다는 못해도 어떤 팀에서나 주전을 경쟁할 만한 선수다.
"팀을 위한 결정이야. 톰이 이해하게."
화가 잔뜩 치민 인스는 인사도 없이 감독 사무실을 떠났다. 팀을 위한 희생을 강조하는 윌슨과 자신의 기량을 증명하기에 급급한 인스는 첫 만남부터 사이가 나빴다. 그래도 지나치며 인사를 주고받을 정도는 되었는데, 이젠 둘 사이에 단단한 벽이 세워졌다.
주차장으로 걷던 인스는 심호흡으로 화를 가라앉힌 후 에이전트한테 전화했다.
- 내가 이적을 원한다고 소문을 내줘.
채 2시간도 안 걸려 지역지를 포함한 몇 개 인터넷 신문에 인스의 이적 루머가 떠올랐다.
- 네, 맞습니다. 인스 본인이 이적을 원하더군요. 프리미어리그도 좋고 라리가도 좋다고 합니다.
기자가 걸어온 전화에 윌슨 감독은 차분하게 대응했다.
- 톰 인스 본인이 직접 그렇게 얘기했습니까?
- 아니요. 에이전트가 저한테 전화를 걸어 한 얘깁니다.
보통 구단은 선수가 이적 의지가 없다고 언플하며 몸값을 높인다. 선수 본인도 주급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기에 구단의 언플에 협조한다.
그러나 윌슨은 대놓고 에이전트가 전화로 한 얘기를 그대로 까발렸다.
순식간에 스토크시티 팬들이 모인 커뮤니티가 끓어올랐다. 톰 인스는 강등 시 계약해지 옵션이 없기에 아직 프리미어리그를 뛰는 지금이 제대로 된 몸값을 받을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다.
구단도 이적료를 제대로 챙길 수 있고, 톰 인스도 주급을 확실히 챙길 수 있는 윈윈의 기회라 다들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 부상만 아니었으면 지금은 리버풀 주전으로 뛰고 있었을 텐데.
└ 잭 버틀랜드한테 주장 완장 뺏기고 사이가 몹시 나빠졌다더라.
└ 솔직히 버틀랜드가 더 주장에 어울리지.
└ 선수들이 잘 따르는 사람은 톰이야.
└ 그러나 선수들을 더 프로답게 이끄는 건 버틀랜드지. 톰은 함께 놀러 다니는 거나 잘하고.
└ 톰 인스가 이적하면 미드필드에 사람이 없는데.
└ 수전노 구단주가 톰 인스보다 나은 선수를 못 데려온다에 내 월급을 걸지.
└ 부상 이후 폼이 떨어진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톰 인스만 한 미드필더를 구하기 힘들어.
톰 인스를 좋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나쁘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톰 인스를 내보내면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그렇게 작은 소란이 연일 이는 가운데, 리그컵 4강전 2라운드가 시작됐다.
- 0:3 스코어로 시작하는 경기. 왠지 익숙하지 않습니까?
- 채팅창에 언제까지 한일전 0:3 역전승을 울궈먹을 거냐고 하는데, 고작 17일 전 상황임을 알려드립니다.
- 도라익 선수의 리그컵 데뷔를 축하드립니다. 아쉽게도 15세 선수가 리그컵에 출전한 기록이 있습니다.
- 그러나 4강전부터 따지면 도라익 선수가 최연소 기록입니다.
- 강 해설, 조금 추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 아쉬워서 그래요. 아쉬워서.
리그컵 4강전 2라운드는 스토크시티의 홈에서 진행됐다. 관객을 2만8천 명 정도 수용하는 더 스카이 스타디움의 대부분은 홈팬이 점령했다.
23라운드까지 겨우 12골을 넣으며 빌빌대던 팀이 갑자기 원정에서 유로파리그를 노리는 뉴캐슬과 5:5의 무승부를 이뤄내자 팬들의 사기가 엄청나게 올랐다.
그리고 도라익의 번호 18번을 마킹한 유니폼이 심심치 않게 목격됐다. 입단식 때 외면하며 냉대했던 게 무색할 만큼, 3골 1도움으로 스토크시티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도라익에 대한 사랑이 뜨거웠다.
'믿을 건 스피드뿐이다.'
키가 자신보다 크고 몸무게도 훨씬 나가는 중국 수비수들과 몸싸움을 해도 크게 밀리지 않았던 도라익이다. 그러나 단 한 경기지만 프리미어리그의 수비수 수준은 비교가 미안할 정도로 높았다.
더구나 오늘 상대인 포츠머스는 뉴캐슬보다 리그 순위도 높고 유로파리그가 거의 확실시되는 강팀이다.
고작 세 경기째 선발 출전이지만, 도라익은 이미 도열하여 그라운드에 진입하고 상대 선수와 악수하는 게 익숙해졌다.
- 선발 명단은 뉴캐슬 경기와 똑같습니다.
- 그러나 현지에서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톰 인스가 제임스와 자리를 바꿀 거라고 하더군요.
- 강 해설은 설마 국정원 출신입니까? 도대체 그런 정보는 어떻게 얻어냅니까?
- 스토크시티 팬클럽 임원의 SNS 계정에 글 하나 남겼죠. 도라익 선수에 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고요. 그렇게 대화하면서 친해지고 필요한 정보를 얻어냈습니다.
말은 쉽지만, 대부분 사람에겐 전혀 모르던 상대와 빠르게 친해지는 건 어려운 일이다. 박만호는 강철민의 불가사의한 친화력에 탄복했다.
- 스토크시티의 선축으로 경기 시작합니다. 강 해설 말씀대로 제임스와 톰 인스의 위치가 바뀐 것 같습니다.
톰 인스는 감독의 지시에 불만이 많았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괜히 감독이 싫은 일 시킨다고 그라운드에서 불만을 드러냈다간 자기 몸값만 깎인다.
'오늘 잘해야 한다.'
사실 에이전트는 줄곧 팀이 강등하기 전에 이적하라고 인스를 꼬드겼다. 그러나 팀의 사정상 자신을 놔줄 리 없는 걸 인스 본인이 가장 잘 알았다. 이적을 성사하려면 구단에 이적 의사를 강하게 비추는 동시에 훈련에 불참하는 등 행동으로 의지를 표현해야 한다.
팀에 애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어서 인스는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이적 소문을 낸 건 그저 감독을 압박하려는 의도였는데 구단도 감독도 말리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거기에 에이전트의 간곡한 설득이 먹혀 결국 인스도 이적을 결심하게 되었다.
- 포츠머스는 반격을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3:0으로 점수를 크게 앞선 데다가 원정인 포츠머스 선수들은 조급해하지 않고 경기 템포를 느리게 가져갔다.
반면 스토크시티는 도라익과 제임스가 처음부터 전속력으로 달리며 상대를 압박했다.
도라익은 감독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거고, 제임스는 갈망하던 공미 자리로 배치받아 흥분한 거였다.
거기에 경험이 풍부한 캠벨까지 가세하니 포츠머스 선수들의 패스가 점점 빨라지다가 급기야 키퍼가 공을 멀리 차 냈다.
풀백과 포츠머스 윙이 경합하며 흘린 공이 인스 발밑으로 굴러갔다. 인스는 공을 잡자마자 가운데로 드리블했다.
"패스해."
제임스와 캠벨이 양쪽으로 나뉘며 외쳤다. 제임스는 미처 올라오지 못한 샘 앨런을 대신하여 왼쪽으로 달렸고 캠벨은 인스가 비운 오른쪽으로 달렸다.
도라익은 고개만 돌려 인스의 드리블을 지켜보며 오프사이드 라인을 깰 준비를 했다.
인스는 누구한테도 패스하지 않고 드리블로 일관했다. 그러다 상대 수비가 촘촘해져서 더 나갈 틈이 사라지자 뒤로 패스했다.
공은 결국 샘 앨런 발밑으로 갔고, 샘 앨런이 드리블로 돌파하여 골라인 근처까지 가서 크로스를 올렸다.
어느새 가운데로 돌아간 제임스까지 가세했지만, 헤딩은 포츠머스 센터백의 몫이었다.
캠벨은 몸싸움이 되지만 키가 수비수보다 작았고, 제임스는 키가 180밖에 안 됐다. 유일하게 도라익이 키도 되고 점프력도 좋지만, 센터백과의 몸싸움에서 지는 바람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톰, 자기 자리를 지켜."
수석 코치가 일어서서 고함을 질렀다. 윌슨은 목청도 약하고 심장 수술 때문에 고함을 지르는 걸 자제해야 한다. 그래서 선수들에게 지시 사항이 있을 땐 수석 코치가 나섰다.
수석 코치의 외침에 인스는 좀 더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자꾸 중간으로 쏠리는 걸 주체하지 못했다.
컨디션에 따라 수비 수준이 들쑥날쑥한 제임스 때문에 인스를 오른쪽으로 보낸 것인데, 자꾸 본인 위치를 잃는 바람에 수비에 경보가 연신 울렸다. 그러나 이대로 제임스와 인스 위치를 바꾸면 윌슨 감독의 위신이 바닥에 떨어진다.
스토크시티 입장에선 해법이 없는 문제지를 받은 셈이다.
"급해 말게. 어차피 승패는 중요한 게 아니잖은가."
이번 경기는 도라익을 주공격수단이자 주득점원으로 사용해도 될지 검증하는 무대일 뿐이다. 어차피 지난 원정에서도 일방적인 패배를 당했기에 역전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다.
차라리 이번 경기가 원정이라면 로테이션을 크게 돌려 절반 정도 주전한테 휴식을 줬을 것이다.
"이럴 거면 그레고리가 나았습니다."
리 그레고리라면 최소 수비는 확실히 한다. 현재 인스는 오른쪽 미드필더 자리로 가서 수비도 못 하고 공격에서도 윙 역할을 전혀 해내지 못했다.
오른쪽이 눌리니 왼쪽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 팀의 라인 전체가 뒤로 물러났다. 캠벨마저 제임스를 도와 수비를 하느라 앞엔 도라익 혼자만 남았다.
그리고 전반 17분.
조금 느린 패스를 가로챈 제임스가 앞으로 공을 강하게 찔렀다. 도라익은 자신을 마킹하는 수비수를 팔로 밀어 접근을 막은 후 총알 같이 앞으로 달렸다.
도라익이 공을 거의 따라잡을 때 어느새 접근한 포츠머스 주장이 제임스가 찬 공을 향해 슬라이딩했다. 반격이 끝날 수도 있는 긴박한 상황에 도라익이 발을 빠르게 뻗어 먼저 공을 건드렸다.
덕분에 공은 수비수의 발에 안 걸리고 앞으로 나갔고, 도라익은 훌쩍 뛰어 슬라이딩하며 몸으로 길을 막은 상대 수비수를 넘으려 했다.
그때. 뭐에 홀렸는지 포츠머스 주장이 팔을 들어 자신을 뛰어넘는 도라익의 발목을 걸었다.
쿵 소리와 함께 도라익이 잔디에 얼굴을 세게 박았다.
- 작가의말
그렇게 실혼인이 된 도라익에게 마라도나(혹은 천마)의 영혼이 깃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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