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과 사회에 불만이 생기다
10월 16일.
"야, 너 밥상에 불만 있어?"
최경호가 드물게 시뻘겋게 단 얼굴로 화냈다.
"무슨 소리야? 솔직히 형이 우리 엄마보다 밥 더 잘해."
도라익이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라익아. 너 혹시 사회에 불만 있냐?"
오창범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무슨 소리야?"
도라익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되물었다.
"삭발 왜 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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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게 굳이 방송에서 토론할 일입니까?"
현재는 아니지만, 한때 입담으로 수많은 예능을 섭렵했던 배우 출신 출연자가 툴툴거렸다.
"우리야 돈 받고 원하는 말을 해주면 되지. 방송국 놈들이 시청률 때문에 이러는 거 하루 이틀이야?"
라디오를 끝내고 귀가하려다가 게스트 한 명이 일이 생겨서 못 오게 됐다고 '땜빵'하러 온 가수 출신 출연자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녹화장 분위기는 둘의 태도와 사뭇 달랐다. 다른 출연자들은 어떻게든 시청자한테 눈도장을 찍어 이름 알리려고 인터넷을 검색하며 필살의 멘트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투덜거리던 둘도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자마자 진지한 얼굴로 녹화에 집중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방송 진행을 맡게 된 MC 최만수입니다. 핫 이슈 오브 더 윅은 정해진 주제가 없이 그때그때 이슈가 되는 사건 혹은 인물에 관해 토론하고 탐구하는 프로그램인데요. 오늘은 핫 이슈 오브 더 윅 역대 최다 출연자분을 또 모시게 되었습니다."
FD의 유도에 따라 방청객들이 환호했다.
"혹시 여러분은 우리 프로그램 최다 출연자가 누군지 아시나요?"
심지어 방청객도 오늘 토론 주제를 알지만, 시청자들의 궁금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진행자는 출연자 한 명을 콕 집어 질문했다.
"최다 출연자라면 첫 회부터 쭉 고정인 붙박이 최만수 선배님이신데, 혹시 재혼하시나요?"
방청객들이 빵 터졌다. 최만수 특유의 나라 잃은 표정은 언제 봐도 재밌었다.
"괜히 본전도 못 찾았네요. 그럼 시원하게 공개하겠습니다. 오늘 토론 주제는 '도라익의 삭발 이유'입니다."
대형 스크린에 바로 도라익의 최근 사진이 커다랗게 떴다. 중대장도 실망 못 할 정도로 잘 깎은 군대 머리에 방청객들이 연출이 아닌 진심으로 탄식을 질렀다.
"최근 한 달 동안 아주 훌륭한 모습을 보인 도라익 선수입니다. 비록 도움 하나 골 하나 기록하지 못했지만, 한 달 사이에 몸값이 무려 2천만 유로나 올랐습니다. 이에 관해 축구 전문가 오태범 평론의 의견을 청해 듣겠습니다."
"축구는 생활이다. 오태범입니다. 최근 한 달 동안 도라익 선수는 골도 도움도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전문가 평가는 좋아졌고 몸값도 쑥쑥 자랐습니다. 이는 도라익 선수가 더 큰 가능성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방청객들이 오태범의 말에 집중했다.
"첫 시즌에 도라익 선수는 골만 넣었습니다. 13경기 11골 10도움. 참으로 놀라운 데이터죠. 이중엔 맨유의 2골 1도움과 아스널 상대로 넣은 1골도 있습니다. 약팀을 만나 운 좋게 이룬 게 아니라는 거죠."
"두 번째 시즌에 도라익 선수는 두 가지 모습을 보였습니다. 유로파리그에선 공격적인 모습, 리그에선 공격 지분을 줄이고 수비에 더 많이 신경 쓰는 모습이었습니다. 비록 도라익 선수의 리그 득점과 도움은 줄었지만, 훨씬 안정적인 모습을 보인 스토크시티는 리그 중위권에 안착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시즌. 도라익 선수는 더욱더 놀라운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분데스리가의 지배자 뮌헨처럼 강팀을 상대할 땐 본인이 직접 골을 넣습니다. 그러나 스토크시티와 실력 차이가 크지 않은 팀을 상대할 땐 경기 자체를 운영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잠시만요. 저도 잘 이해가 안 되는데, 경기 자체를 운영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쉬지 않고 말한 오태범에게 잠깐 휴식도 줄 겸, 축구를 잘 모르는 시청자들의 의문도 풀어줄 겸 해서 최만수가 질문했다.
"몇몇 선수는 필드의 감독으로 불렸습니다. 멀리 가면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 같은 선수가 있죠. 전술을 짜고 포메이션을 정하는 건 감독이지만, 실제 경기를 뛰는 건 선수들입니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완벽하게 예측하는 건 어렵고, 또 22명이 뛰는 경기여서 변수도 많습니다. 일부 변수는 직접 뛰는 선수가 더 빨리 캐치하고 반응하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팀의 공격 리듬을 정하고 공격과 수비 비율을 정하고, 속공할 건지 지공을 할 건지, 공을 중앙에서 돌릴 건지 라인에서 돌릴 건지 정하는 선수를 필드의 감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거 되게 어려운 일 아닙니까?"
"맞습니다. 경기중 선수들 평균 심박 수가 130입니다. 가장 활동량이 적은 키퍼도 평균 110일 정도입니다. 심박 수가 높으면 혈액순환이 빠르죠. 그런 상황에서 냉정하게 사고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감독과 달리 선수는 30대 중반이면 대부분 은퇴합니다. 충분한 경험을 쌓아 경기를 이해할 즈음이면 피지컬이 떨어지고 기량이 부족해져서 출전 기회를 얻기 힘들다는 말이죠."
"그 어려운 걸 이제 17세인 도라익 선수가 해냈다고요?"
"해낸 건 아니고. 가능성을 보여준 겁니다. 패스로 팀 리듬을 조절하는 건 사실 예전에도 몇 번 보여준 적 있습니다. 그러나 그땐 제멋대로인 팀 리듬을 하나로 통일한 거지, 이번 시즌처럼 리듬을 바꾸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훈수 두는 입장에선 아쉬운 부분도 꽤 있고, 틀리게 판단한 부분도 간간이 보입니다."
"보는 입장에선 그렇지만, 하는 입장에선 그 정도도 대단하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걸 완벽히 설명하려면 제가 좀 더 길게 얘기해야 하는데 괜찮을까요?"
방송 시간이 정해진 생방송이어서 오태범이 길게 이야기하면 다른 출연자들의 발언 기회가 줄어든다.
"그럼요. 이걸 이해해야 토론할 수 있으니깐요."
"근래에 와서 축구는 분업이 아주 명확해졌습니다. 각자 자리에서 수행해야 할 롤이 명확하다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 키퍼는 뭘 하고 센터백은 뭘 할지 미리 정해놓고 경기를 뜁니다. 문제는 정교한 시계일수록 부품 하나로 전체가 망가질 가능성이 크다는 거죠. 개인 능력이 예전보다 덜 강조되는 현대 축구에서 빅클럽들이 여전히 비싼 이적료와 비싼 주급을 주면서 스타 선수를 영입하는 이윱니다. 마라도나처럼 거의 혼자 힘으로 리그 우승을 이뤄내는 일은 이젠 없지만, 모든 부품이 튼튼해야 시계가 정확한 시각을 가리킬 수 있으니깐요."
"그럼 도라익 선수는 가장 많은 부품과 연결된 핵심 부품 같은 역할이군요?"
"맞습니다. 일부 부품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때 그 기능 일부를 대신 수행할 수 있는 중요한 부품입니다. 그리고 시계가 틀렸을 때 바늘을 빠르게 또는 느리게 돌려서 정확한 시간을 찾아가는 두뇌와 같은 부품입니다. 아직은 어설프지만, 그 가능성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몸값이 무려 2천만 유로나 올랐습니다. 상승 폭이 거의 50%에 육박하죠."
출중한 스피드와 경이로운 순발력. 양발을 자유자재로 써서 필드 전방위를 이용할 수 있고, 득점 능력은 물론 골 기회를 창조하는 감도 나쁘지 않다.
이것만 해도 유수의 강팀이 군침을 흘릴 법도 한데, 도라익은 그 귀하다는 경기 운영 가능성을 보여줬다.
로또로 치면 이미 공개한 숫자는 다 맞았고 마지막 대박이 터지기를 기다리는 상황이다.
"그래서 의문입니다. 축구도 잘되고 광고도 잘되고. 팀에서 존경받는 주장이고. 대표팀에선 선수들이 농담 삼아 도라익 선수를 도 감독이라고 부를 정도로 분위기가 좋구요."
"차 감독이 최근 인터뷰에서 그랬죠. 혹시 자기가 레드카드로 쫓겨나면 감독직을 도라익이 수행할 거라구요."
"맞습니다. 그런데 도라익 선수가 대표팀 2경기를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간 다음 갑자기 삭발했습니다. 인터넷에선 이미 수십 개의 밈이 생겨날 정도로 현재 회자되고 있습니다."
"사우디와 비긴 일 때문이 아닐까요?"
"도라익 선수는 바르셀로나에 0:5로 졌을 때도 삭발하지 않았습니다. 리버풀과 0:0으로 비긴 경기 후 첼시를 만나 0:2 참패를 당했죠. 2골을 먹은 걸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 정도의 경기였고, 경기가 끝나고 도라익 선수가 자신의 틀린 판단으로 팀이 무너졌다고 시인했습니다. 그때도 삭발하지 않았죠."
"네. 홈에서 인터 밀란에 0:1로 진 경기, 그 경기에서 도라익 선수의 골이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아 취소됐습니다. 그때도 도라익 선수는 삭발하지 않았습니다."
원정에서 포츠머스에 지고 1승 1무 5패 4점의 점수로 리그 19위에 랭크됐지만, 도라익은 삭발하지 않았다.
"대표팀은 최근 2경기에 1골만 넣고 1승 1무에 그쳤습니다. 대표팀을 향한 무언의 시위가 아닐까요?"
먼저 진행한 원정 경기는 이라크가 아닌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진행됐다. 종교적 이유로 미국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이라크에서 먹히지 않았고, 이라크 국내 정세가 엉망이기 때문이다.
한국팀은 1:0의 힘겨운 승리를 이뤘다. 도라익은 이라크 선수들의 집중 마크를 받으며 경기 중에 유니폼만 두 번 갈아입었다.
그리고 돌아온 홈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맞이해 0:0 무승부의 결과를 냈다. 한국이 구장에 잔디 대신 시먼스라도 깔았는지 아니면 한국의 하늘이 그리도 맑고 고왔는지,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은 서서 뛰는 것보다 눕는 걸 참 좋아했다.
특히 도라익의 골이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아 취소되고 한국팀이 항의하면서 경기가 3분 정도 중단되기도 했다.
"전 아니라고 봐요."
김상현이 불쑥 끼어들었다.
"도라익 선수가 아무리 전도가 유망하다고 해도 대표팀에선 막내거든요. 아무리 팀과 선배들한테 불만이 있어도 이런 식으로 표출하진 않을 거예요. 전 아니라고 믿어요."
누가 들어도 반어법이다. 오태범은 이를 빠득 갈며 김상현을 노려봤다. 다음 협회장 선거까지 시간이 있기에 이젠 좀 그만해도 될지 싶은데, 관성이 붙었는지 김상현은 여전히 도라익을 까는 일에 혈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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