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틀랜드
제임스의 킥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났다.
앨런과 클루카스는 제임스가 찰리한테 패스할 거라고 믿었다. 전반전에 믿기지 않는 어마어마한 패스로 동점 골에 이바지한 제임스기에 기대하며 맡겼다.
맨유 선수들은 반반이었다. 제임스가 찰리한테 패스할 거라고 생각하는 선수도 있고 직접 슈팅할 거라고 생각하는 선수도 있었다.
스토크시티 선수 대부분은 제임스가 슈팅할 거로 여겼다. 흥분하면 이해할 수 없는 패스를 자주 했던 제임스다. 후반기엔 그런 모습이 줄었지만, 대부분 선수는 전반기에 애먹이던 제임스를 잊지 않았다.
스토크시티처럼 선수 자원이 부족한 팀이 아니었으면 주전 자리를 지키는 게 어려울 정도로 제멋대로였다.
그러나 제임스의 킥은 땅볼 패스였다. 점프한 맨유 선수들 발밑으로 구른 공은 먼 포스트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라익이 움직였다.
사전에 전혀 교감이 없었지만, 도라익은 늦지 않게 출발하여 슬라이딩 태클로 공을 때렸다. 발끝에 간신히 맞은 공이 포스트를 맞히고 튕겨 나왔다.
도라익이 누운 자세 그대로 왼발을 내질러 구르는 공을 발바닥으로 차서 골대에 넣었다.
골이 들어가자 도라익과 제임스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부심을 바라봤다. 부심의 깃발은 들리지 않았다.
팬들은 일단 골이 들어가자 오프사이드고 뭐고 상관 안 하고 소리부터 질렀다.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부심의 깃발을 확인한 후에야 세리머니를 펼쳤다.
맨유 주장이 주심한테 정중하게 VAR 판독을 요청했다. 곧 구장의 대형 TV 화면에 골 장면이 나왔다.
여러 각도로 반복하여 재생한 후 결국엔 골 판정이 내려졌다.
"둘이 몰래 상의했어?"
"아니."
"평소 연습했어?"
"아니."
"그럼 어떻게 한 거야?"
"뭐 어쩌라고."
도라익은 겨우 눌렀던 짜증이 또 치밀었다. 그냥 그럴 것 같아서 그랬는데 어떻게 그랬고 왜 그렇게 됐냐고 자꾸 물으니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정 궁금하면 제임스한테 물어."
"쟨 미친놈이잖아."
묘하게 납득이 가는 이유에 도라익도 마음을 수습했다. 솔직히 어떻게 된 건지는 도라익 본인이 더 궁금했다. 전반전의 패스도 그렇고 방금도 그렇고, 왠지 그렇게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뛴 건데 그대로 됐다.
"일단 경기에 집중하자."
VAR 판정에 불복하여 계속 따지는 맨유 벤치에 옐로카드 석 장 주느라 시간이 지체됐다. 클루카스가 나서서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했다.
평소 훈련이나 생활에선 버틀랜드가 주장 역할을 더 많이 하지만, 포지션 특성으로 경기중엔 클루카스가 주도적으로 나섰다.
- 도라익 선수가 맨유 상대로 2번째 골을 넣었습니다.
- 제임스와의 호흡이 기가 막히죠?
- 찰떡 호흡이란 말로도 부족하죠.
- 아스널 말고 상위 3팀을 통해 도라익 선수가 거품인지 아닌지 검증해야 한다던 분들 나와서 사과하세요.
VAR 판독 및 맨유 벤치의 항의로 지루해진 분위기를 두 해설이 살렸다.
결국 소란이 가라앉고 경기가 재개됐다. 그러나 도라익의 두 번째 득점을 기점으로 경기장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래서 카드를 감수하며 항의한 거구나.'
경기를 뛰는 도라익은 물론, 먼 한국에서 TV 화면으로 경기를 관람하는 사람까지 느낄 정도로 주심의 판정이 달라졌다.
맨유 벤치에 옐로카드 석 장을 연속 꺼내면서 심경의 변화가 생긴 게 분명했다. 판정이 조금씩 맨유에 유리하게 변했다.
주심을 폭언으로 위협한 것도 아니고 돈이나 다른 보상을 약속한 것도 아니기에 딱히 문제 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받을 영리한 대처다.
전반전과 달리 몸싸움을 엄격하게 판정한 탓에 상대적으로 몸을 많이 쓰는 스토크시티가 불리해졌다. 몇 번의 파울에 이은 구두 경고로 스토크시티 선수들이 하나같이 위축한 모습을 보였다.
'비기면 되는 건 맞지만, 그런 생각으로 경기를 뛰다간 질지도 모른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라면 스토크시티 선수들이 주심의 판정에도 불구하고 계속 몸싸움을 거칠게 했을 것이다.
주심이 옐로카드를 꺼내겠지만, 몇 장 꺼내다 보면 또 마음이 바뀌어 몸싸움을 관대하게 판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비기기만 해도 된다는 생각이 무의식에 박혀 주심의 판정 변화에 따라 몸을 움츠렸다.
오직 경기 경험이 적어 모든 게 신기한 도라익만 경각심을 느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지?'
킬패스 두 개나 때린 자칭 천재 제임스는 벌써 지쳤다. 여전히 판단이 날카롭긴 하지만, 지친 몸이 안 따라줘서 아까처럼 위협적이지 않고 실수가 점점 잦아졌다.
경기는 아직 36분이나 남았다.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 공이 왔다. 공을 받은 도라익은 조금 느린 속도로 달려오는 제임스한테 패스한 후 몸을 돌려 뛰었다.
제임스가 찌른 공은 아까와 달리 조금 길었다. 도라익은 최고 속도로 달리고서야 겨우 공을 잡았다.
옐로카드 한 장 받은 센터백은 2미터 거리를 두고 각만 좁혔다. 도라익이 어느 방향을 선택하든 늦지 않게 반응할 수 있는 위치와 자세다.
도라익은 근접 마크를 받으며 몸싸움할 때보다 더 큰 압박을 느꼈다.
그때 찰리가 움직였다. 도라익은 찰리한테 공을 밀어준 다음 적당한 속도로 달렸다. 찰리가 안으로 찌르면 센터백과 몸싸움하며 달릴 생각이고 아니면 공 받으러 뒤로 달려야 한다.
공을 받은 찰리는 엉덩이로 자신을 마크하는 센터백을 밀며 몸을 돌렸다. 골대를 마주한 찰리는 간단히 한 번 툭 쳐서 공간을 만든 후 바로 슈팅했다.
의외의 전개에 다들 놀랐지만, 안타깝게도 찰리의 슈팅은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아 맨유 골키퍼한테 쉽게 잡혔다.
키퍼는 공을 잡자마자 앞으로 뻥 찼다. 베르딩요가 달리면서 오른발로 공을 건드렸다.
오른발 아웃사이드에 맞은 공이 베르딩요가 달리는 방향으로 굴러갔다. 트래핑과 드리블이 동시에 이뤄진 셈이다.
리엄과 대니가 양쪽에서 간격을 좁히며 달려왔다. 가뜩이나 느린 둘이기에 협력 수비로 베르딩요의 전진 경로를 없애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베르딩요는 발끝으로 공을 툭 차고 가속했다. 리엄과 대니가 강하게 부딪칠까 봐 주저하는 작은 틈을 노려 둘 사이로 쏙 빠져나갔다.
다행히 어느 정도 대비하고 있던 버틀랜드가 빠르게 판단하고 달려 나왔다. 베르딩요도 급한 마음에 공을 세게 차는 바람에 따라잡는 데 애먹었다.
누가 먼저 공을 건드릴지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박빙의 상황에 베르딩요가 먼저 몸을 날려 슬라이딩했다. 버틀랜드는 이성적인 판단을 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몸을 던졌다.
쿵 소리와 함께 버틀랜드와 베르딩요가 세게 부딪쳤다.
주심이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말이 돼? 제정신이야?"
샘 클루카스가 격동하여 주심한테 외쳤다. 주심은 이어폰을 톡톡 두드리며 VAR 판독을 기다리자는 제스처를 했다.
대기심의 판단에 따라 주심이 신호를 주기도 전에 맨유와 스토크시티의 의료진이 동시에 투입됐다. 교체 사인은 맨유에서 먼저 보냈다. 대형 TV 화면에 비친 베르딩요의 허벅지에 강하게 긁힌 자국이 있었다.
곧이어 스토크시티 역시 교체 사인을 올렸다. 바로 교체 의사를 표명한 베르딩요와 달리 버틀랜드는 기절한 탓이다. 팀닥터는 버틀랜드가 구급이 필요한 상황인지 판단한 후에야 비로소 교체 사인을 보낼 생각을 떠올렸다.
잠시 후 충돌 화면이 느리게 재생됐다. 버틀랜드의 축구화가 베르딩요 다리를 먼저 가격했다. 피가 맺힐 정도로 깊은 자국이 생긴 이유였다.
허벅지가 차인 베르딩요의 몸이 회전했다. 그러면서 버틀랜드의 머리가 베르딩요의 몸과 강하게 충돌했다.
버틀랜드의 반칙이 분명하여 페널티킥 판정은 유지되었다. 버틀랜드가 레드카드를 안 받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로 심한 반칙이었다.
버틀랜드를 교체하여 출전한 아담 데이비스는 몸이 부르르 떨렸다. 벤치에 있을 땐 잘 몰랐는데 구장에 들어오니 맨유 팬들이 주는 압박이 장난 아니었다.
페널티킥은 래시포드가 차기로 했다. 데이비스는 몸이 덜 풀렸다는 이유로 스트레칭과 워밍업을 통해 시간을 최대한 끌었다.
셰필드와 위건의 경기가 먼저 끝나면 그쪽 상황에 맞춰 경기를 진행하면 된다. 그리고 시간을 끌어 래시포드의 몸이 굳으면 페널티킥을 실수할지도 모른다.
3분 가깝게 몸을 푼 데이비스가 골라인에 서고 주심의 휘슬이 울리자 래시포드는 바로 페널티킥을 찼다. 딱 한 발만 달리고 차는 페널티킥 방식에 데이비스는 멀뚱하니 서서 공이 들어가는 걸 보기만 했다.
- 데이비스 키퍼의 선택이 아쉽습니다.
- 상대가 가운데를 노릴 거라고 생각한 것 같죠?
- 결과론이지만, 만약 래시포드 선수가 가운데로 찼다면 데이비스 선수는 영웅이 되었겠죠.
데이비스는 상대 킥을 보고 판단한 게 아니라 미리 방향을 정했다. 가위바위보만큼 선택이 어려운 왼쪽·가운데·오른쪽 중에서 과감하게 가운데를 골랐는데 그만 예상이 빗나갔다.
점수가 2:2 동점이 되자 윌슨 감독은 바로 교체를 감행했다. 이미 지쳐서 실수가 잦은 제임스를 내리고 조쉬 타이먼을 중앙수비수로 올려 스리백으로 전환했다.
- 맨유도 수미 한 명 빼고 공격수를 올렸습니다. 두 윙까지 합치면 공격수가 총 네 명이죠.
- 맨유 입장에선 무승부가 패배나 마찬가지죠.
스토크시티는 골키퍼 교체로 수비 능력에 큰 타격을 받았다. 맨유 역시 베르딩요가 교체됐지만, 벤치 선수들 실력이 만만치 않다.
스토크시티가 몹시 불리한 상황이다.
- 작가의말
2:2 동점으로 라익이가 2골 넣었네요. 한 골 마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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