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회견
2031년 1월 14일.
인천국제공항은 인산인해로 붐볐다. 역대 최약체로 불리며 8강이면 체면치레는 된다고 여겼던 대표팀이 우승컵을 안고 금의환향했다.
게다가 골든 슈즈에 MVP까지 거머쥔 슈퍼 루키의 탄생에 언론과 방송사들이 설탕물을 본 개미처럼 몰려왔다.
거기에 각 지역 서포터즈나 축구 동호회 그리고 유튜버들이 몰려들어 자리싸움하는 바람에 급히 보안요원을 요청해야 할 정도였다.
"김춘호! 김춘호! 아이언맨 김춘호!"
각 팀 서포터즈들이 자기 선수 응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20세에 팀 주전이 되어 29세까지 10년 동안 리그 한 경기도 안 빠진 철인 김춘호의 팬이 가장 많았다.
그러나 흥분한 팬들과 달리 정작 김춘호 본인은 마스크로 빨개진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언맨이라는 별명은 들을 때마다 부끄러웠다.
"오빠, 혁신 오빠. 여길 봐요, 오빠."
일명 혁순이들이 주변 눈초리를 무시하고 외쳤다. 김춘호는 우쭐하며 소녀팬들에게 손을 흔드는 이혁신을 부러운 눈으로 훔쳐봤다. 김춘호의 팬은 대부분 남자고, 그마저도 40대 이상 형님하고 삼촌들이었다.
'내가 여자 아이돌도 아니고, 삼촌 팬이라니.'
"제길. 골 못 넣은 놈은 서러워서 살겠나."
오창범이 투덜거리며 김춘호를 지나친 후 이혁신 곁으로 갔다. 친근하게 이혁신의 어깨에 팔을 두른 오창범이 소녀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다가 별 반응이 없자 손가락으로 집게를 만들어 이혁신의 볼을 쭉 당겼다.
소녀팬들이 꺅 소리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오창범은 J리그를 뛰기에 서포터즈들이 오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유럽 혹은 일본이나 중국에서 뛰는 선수들은 응원하러 온 팬이 많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온 팬이 가끔 있지만, 단합한 힘을 보여주는 K리그 서포터즈와 팬클럽들과 경쟁하기엔 화력이 너무 부족했다.
[김춘호. 국민 마음속 영원한 MVP.]
아재 팬들이 슈퍼 세이브를 하는 김춘호의 사진 몇 장 붙은 커다란 현수막을 펼쳤다. 소녀팬들을 부러워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아재 팬들은 늘 김춘호를 부끄럽게 하지만, 가끔 이렇게 울리기도 한다.
"감독님. 우승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차 감독은 자다 깨어나도 '감사합니다'는 아나운서보다 더 또박또박 발음할 자신감이 생겼다.
"저기 기자 회견장을 마련했습니다. 선수 세 명 뽑아서 같이 가시죠."
기자회견은 따로 한다고 그렇게 버텼는데 축협이 기어코 자리를 만들었다. 여기에서 거절하면 아예 철천지원수가 될 상황이다.
차 감독은 속으로만 한숨을 쉬며 기자 회견장으로 향했다.
축협 대변인이 장황하게 이번 대회의 우승을 위하여 감독과 선수 그리고 스태프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축협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물심양면의 지원을 얼마나 아끼지 않았는지 칭송했다.
기자들의 눈초리가 조금씩 사나워지는 기미가 보이고 나서야 대변인은 일장 연설을 마치고 마이크를 차 감독과 선수들한테 넘겼다.
"저기요. 먼저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도라익 선수는 왜 안 보이는 겁니까?"
오창범이 자기 앞 마이크를 켜고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안녕하세요. 도라익 선수의 룸메이자 비공식 대변인 오창범입니다. 도라익 선수한테 궁금한 질문은 저한테 해주시면 됩니다."
기자들이 예외 없이 손을 번쩍 들어 질문 기회를 요청했다. 기자회견을 주최한 축협 직원이 한 명 지목했다.
"일간스포츠 조형언 기자입니다. 오창범 선수한테 묻겠습니다. 도라익 선수는 함께 오지 않은 겁니까?"
"네. 도쿄로 올 때 미리 왕복으로 티켓팅했기에 바로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그 정도는 변통하여 티켓을 취소하고 한국에 들렀다가 갈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뉴스를 조금만 봤어도 현재 국내 구단들이 도라익 선수와 계약하려고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요."
'시발. 나한테 지랄이야.'
관종 오창범 선생은 표리부동의 기술로 속으로만 욕하고 얼굴로는 환하게 웃었다.
"도라익 선수는 유럽에서 데뷔하려고 합니다."
"유럽 구단의 유스에서 뛰는 것보다 K리그에서 주전으로 뛰는 게 선수의 성장에 훨씬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거참. 조 기자. 여기 전세 냈어? 질문 혼자 할 거야?"
"선배님. 이건 맥락이 같은 질문이잖아요."
"그래도 적당히 해. 사람이 염치를 알아야지."
"좋습니다. 방금 질문에만 대답해 주시죠."
"도라익 선수의 목표는 유럽 빅리그에서 주전으로 뛰는 겁니다. K리그도 훌륭하지만, 아무래도 프리미어리그나 분데스리가와 같은 곳에서 뛰는 게 성장의 지름길 아니겠습니까?"
조 기자의 차례가 끝나자 남은 기자들이 손을 번쩍번쩍 들었다.
"여명일보 감천 기자입니다. 도라익 선수가 장래가 유망한 선수임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전문가나 오랜 팬의 눈으로 보자면 현재 부족점도 명확한 선수입니다. 유럽 빅리그의 강팀이라면 도라익 선수를 주전으로 쓸 이유가 없고, 약팀이라면 그럴 여력이 없을 거로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차 감독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차 감독은 자기 앞 마이크를 켜고 기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일정 부분 동의합니다. 확실히 정식 경기를 뛴 경험이 적어서 판단이 느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며칠 안 되는 짧은 기간 엄청난 발전을 보인 점이나 감독 지시를 엄격히 수행한 점을 따져볼 때, 상성이 좋은 팀을 만나면 괜찮은 활약을 기대할 만합니다."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기자들이 먹이를 물어다 주는 어미 새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다투어 손을 들었다.
"새마을신문 한초희 기자입니다. 도라익 선수가 빅리그에서 당장 주전으로 뛰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요?"
질문한 기자는 주변의 눈총을 받았다. 이건 여러 질문으로 나눠 인터뷰를 풍성하게 할 수 있는 주제다. 그런데 질문 기회를 얻은 새내기 기자가 딴에는 핵심을 짚는다고 마무리를 쳤다.
"도라익의 대변인 오창범이 대답하겠습니다."
오창범이 썩은 고기를 노리는 하이에나 눈빛으로 웃었다.
"그간 도라익 선수와 바다처럼 깊고 산보다 높은 우애를 쌓으며 어릴 적 지도 그렸던 얘기까지 나눴습니다. 그 과정에 도라익 선수의 유럽 생활에 관해 자세히 들었는데요. 여태껏 도라익 선수가 무소속으로 지낸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기자들 손이 분주했다. 이런 건 속보 타이틀을 붙여 빨리 내보내야 한다.
"도라익 선수의 에이전트는 독일에서 태어난 한인입니다. 도라익 선수의 재능을 알아본 에이전트가 구단과 협상할 때 출전 보장을 요구했습니다."
"출전 보장이라면 어떤 형태인가요?"
성급한 기자가 허락도 없이 질문했다. 그러나 다 같은 마음이어서 누구 하나 질책하지 않았다.
"거기까진 저도 모릅니다. 단, 지금까지 계약이 성사되지 않은 건 출전 보장 조항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최경호가 요구한 건 리그 경기 80% 출전 및 출전 시간 보장이었다. 뮐러가 삼촌의 웹하드를 뒤져 찾아낸 계약이 하필 브라질 천재 소년 베르딩요의 계약서였고, 당시 이미 검증이 끝난 베르딩요는 유럽으로 이적하면서 빠른 적응을 위한 출전 보장을 요구했다.
도라익처럼 무명의 선수가 요구할 만한 사항이 아니라는 걸 경주 최씨의 후손 경호는 근래에야 겨우 인정했다.
기자들은 노트북이나 전화기로 출전 보장에 어떤 형태가 있는지 검색하느라 바빴다.
덕분에 찬밥이 된 이혁신과 김춘호는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나눴고 차 감독은 전화기로 도라익을 검색하며 무료함을 달랬다.
"일출신문 김병호 기자입니다. 혹시 도라익 선수의 계약 진행 상황을 아십니까?"
회견장이 고요해졌다. 오창범은 만인이 주목하는 상황을 즐기고 싶으나 오래 누리기엔 눈초리가 하나같이 심상치 않다.
"우리 라익이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기자들은 물론 곁에 앉은 차 감독과 두 선수마저 숨소리를 죽이고 오창범에게 집중했다.
'내 짧은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지금이라니.'
자괴감이 오창범을 덮쳤다. 그러나 관심을 끌고 싶은 욕구가 훨씬 강해 자괴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미 협상은 끝냈고, 라익이는 비행기 내리자마자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됩니다."
"어느 구단인지, 그게 어려우면 어느 리그인지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오창범 선수. 확실한 내용입니까?"
"본인의 발언에 책임질 수 있는 거죠?"
가짜뉴스 처벌법은 확인되지 않은 내용으로 기사를 쓰는 것도 처벌한다.
누구 말에 의하면 이렇다고 한다.
이런 식의 불확실한 기사는 사실과 다름이 알려질 경우 벌점으로 이어진다. 벌점이 많이 쌓이면 벌금을 하고, 중대 실책을 저지르면 신문사가 문을 닫기도 한다.
그리고 기자도 등급 평가를 하고, 등급이 낮으면 취재 자격을 정지하고 심지어 기자 자격을 박탈하기도 한다.
"구단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오창범은 손바닥의 땀을 닦고 새벽에 온 톡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형. 나 프리미어리그 팀이랑 계약해요.]
오창범은 보증을 서줄 정도로 도라익을 믿는지 잠깐 고민해봤다. 오창범이 아는 도라익이라면 거짓 톡을 날리고도 남을 녀석이다. 톡을 본 오창범이 배가 아파 밤새 잠 못 들 것을 상상하며 즐겁게 웃을 악마 같은 녀석이다.
"프리미어리그 팀과 계약합니다."
걱정이 없진 않았으나 관심이 고팠던 오창범은 일단 지르기로 했다.
- 작가의말
그러니까 경호는 지금까지 아스널이랑 토트넘 같은 팀에 도라익의 주전 자리를 보장해 달라고 요구했던 겁니다. 다리 부러진 노루 한데 모인다고, 또라이끼리도 서로 끌리는 게 있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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