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전 테스트
호프만이 대답했다.
"도르트문트는 완성된 젊은 선수를 데려다가 경기 경험을 쌓아 주고 잘 포장해서 비싸게 팔아. 우린 잠재력이 큰 선수를 기본기부터 탄탄하게 닦아주는 게 장점이지. 훈련 비디오를 봤는데 제대로 된 코치를 받지 못했는지 어설픈 부분이 많아. 함부르크에 맡긴다면 최고로 훌륭하게 키울 거야."
함부르크는 한국의 연예 기획사처럼 연습생을 데려다 연습시키고 경쟁 시켜 가수를 만드는 방식이다. 도르트문트는 최경호처럼 완성된 가수를 찾아 앨범을 제작하는 거로 큰돈을 버는 방식이고.
도르트문트의 유스 시스템 역시 훌륭하지만, 그쪽은 비싸게 팔 완성형 선수들한테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할 수밖에 없기에 함부르크보다 못하다.
호프만은 독일어가 능숙하나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에이전트한테 함부르크가 최고라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맛있는 식사 감사합니다."
맛도 좋고 양도 풍족하고 대화도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최경호도 호프만도 도라익도 밝은 얼굴로 작별했다.
"잘 곳은 이미 예약했어. 거기로 가자."
최경호가 예약한 곳은 함부르크 외곽의 민박 시설이었다. 이인실에는 작은 샤워 부스도 있고 침대도 두 개여서 최경호의 사무실보다는 훨씬 나았다.
도라익에게 푹 쉬라며 밖에 나갔던 최경호는 한 시간 뒤에 돌아왔다.
"라익아. 형 믿어?"
"그럼요."
할아버지와 절친한 친구의 아들이다. 그리고 만난 지 이틀밖에 안 됐지만, 둘은 많은 부분에서 합이 맞았다.
"에이전시 계약서야. 계약 담판을 모두 나한테 위임하고 네 수익의 10%를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대신 계약하기 전까지 모든 이동과 주숙 그리고 식사 비용은 내가 부담할게."
라익은 영어로 된 계약서를 빠르게 읽어본 후 최경호한테 말했다.
"형, 나 미성년자인데요."
최경호가 이마를 탁 쳤다. 의외로 말이 잘 통해 도라익이 15세 어린이임을 자주 까먹었다.
"부모님께 전화할 수 있어?"
"할아버지한테 할게요."
최경호는 도라익의 할아버지를 설득해 계약을 체결했다. FIFA에서 공증한 전자 계약서는 양식이 이미 정해져 있어 특별 조항만 삽입하고 전자서명을 하면 된다.
전자 계약서는 FIFA 서버에 원본을 저장하고 최경호와 도라익 할아버지의 휴대폰에 한 부씩 발부되었다.
정식으로 도라익의 에이전트가 된 최경호는 뮐러한테 전화하여 프랑크푸르트의 사무실을 정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제부터 우린 운명공동체야. 네가 잘되면 나도 잘되고, 네가 망하면 나도 망한다."
"내가 망하면 형은 원래 하던 일 계속하면 되잖아요."
"아니야. 난 남은 인생을 너한테 올인하기로 이미 결심했다."
최경호는 전화기로 뮐러가 보낸 자료를 열어 도라익한테 보여줬다. 거기엔 축구 선수의 가치를 평가하는 여러 지표가 자세히 적혀 있었다.
"봤지? 가장 많은 돈을 벌고 성공 확률이 높은 포지션은 공격수다. 그리고 현대 축구가 원하는 공격수는 이런 능력을 갖춰야 해."
최경호는 찬란한 미래를 상상하며 도라익한테 어떤 선수가 되어야 하는지 역설했다.
###
민박에서 푹 잔 도라익과 최경호는 오전 10시에 함부르크 유소년 기지를 방문했다.
"내가 강력히 주장해서 구단 임원들을 전부 불러왔네. 좋은 모습을 보이면 오늘 당장 계약하는 것도 가능해."
원래는 패스와 트래핑 그리고 리프팅과 드리블 등 기본기를 먼저 점검한 다음 연습 경기로 기량을 확인한다.
그러나 호프만의 호들갑으로 구단 임원들이 참관하러 온 탓에 기본기 점검은 오후에 하기로 하고 먼저 연습 경기에 투입됐다.
검은 팀 조끼를 입은 도라익은 처음 보는 아이들과 팀을 이뤄 경기를 펼치게 되었다.
'얘넨 뭐 먹고 자랐지?'
한국에 있을 땐 178의 키로 또래들 사이에서 군계일학을 자랑하던 도라익이지만, 함부르크 유스에는 도라익보다 작은 아이가 몇 없었다. U17 팀이어서 도라익보다 한두 살이 많다곤 하지만, 그래도 놀라운 발육이었다.
"도우는 공격수야."
검은 조끼를 입은 유스 선수들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피지컬과 테크닉 그리고 속도와 체력 모두 높은 수준이 필요한 원톱 자리를 처음 보는 선수한테 맡기는 게 불만이었다.
더구나 검은 조끼들은 후보다. 주전이 대부분인 상대의 코를 콱 눌러주고 주전 자리를 빼앗아야 하는데 처음 보는 놈팡이가 공격수 자리를 턱 하고 꿰차니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유스 감독은 최경호의 도움을 받아 도라익한테 팀 전술을 전달했다. 복잡하진 않지만, 간단하지도 않은 전술이어서 통역해주는 최경호가 마음을 졸일 정도였다.
오직 도라익만 그저 태평이었다.
준비 운동이 끝나고 패스로 합을 맞추다가 10시 30분에 경기를 시작했다.
"위치 선정은 괜찮군요."
함부르크의 임원 중 대부분은 축구와 무관한 사람이다. 구단의 경영은 축구팀 운영과 별개이기 때문에 선수가 실무직이 되는 일은 드물다.
그래서 하나뿐인 선수 출신 임원이 평가하고 남은 사람은 조용히 듣기만 했다.
"몸싸움이 훌륭합니다. 타고난 부분이 있어 조금만 교정하면 프로에서도 먹히겠습니다."
도라익은 17세의 나이에 벌써 190을 바라보는 수비수를 엉덩이로 힘껏 밀었다. 키도 몸무게도 도라익을 압도하는 수비수지만, 예상을 뛰어넘은 힘에 당황하며 몸을 비틀거렸다.
수비수의 중심을 흔든 도라익은 몸을 돌리며 팔을 뻗어 상대를 살짝 밀었다. 동시에 팔로 전해오는 반동을 이용해 균형을 빠르게 잡고 앞으로 달렸다.
그에 맞춰 미드필더가 땅볼 패스를 강하게 찔렀다. 기량이 부족한지 공이 구르는 속도가 빨랐다.
"순발력이 좋군요."
공보다는 느렸지만, 놀라운 순발력으로 달린 도라익이 다리를 쭉 뻗어 왼발 끝으로 공을 건드렸다. 아쉽게도 빠르게 자세를 낮춘 골키퍼의 손에 잡혔으나 가속도 훌륭하고 공을 건드린 판단도 정확했다.
공을 잡은 골키퍼가 롱킥으로 빠르게 반격을 발동했다. 상대 팀은 윙의 개인기를 이용한 돌파로 편한 크로스를 올렸고, 키가 도라익보다 훨씬 큰 공격수가 헤딩으로 멋진 골을 넣었다.
"약점은 없습니까?"
프로는 장점이 아무리 많더라도 큰 약점 하나에 쉽게 무너진다.
"기본기가 부족합니다. 오후에 자세히 점검해야겠지만, 일단 볼 터치가 어설픕니다. 볼 터치가 불안하면 이어지는 동작이 매끄럽지 못합니다. 유스 경기니까 괜찮은 거지, 프로 레벨에선 팀의 템포를 다 망가뜨리는 짓입니다."
"포텐셜은 어떻습니까?"
경기는 다소 지루하게 진행됐다. 주전들은 승리보다는 팀 전술을 훈련하는 데 집중했고, 검은 조끼를 입은 후보들은 감독의 꾸중을 들은 후 한 골 뒤처지고도 보수적으로 경기에 임했다.
"속단하긴 이르지만, 기본기와 전술 이해도만 높여도 괜찮은 선수가 될 겁니다. 특히 귀한 왼발이라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주고 싶군요."
패스가 넘어오지 않자 답답했던 도라익은 감독의 지시를 어기고 밑으로 내려와 공을 받았다. 강한 압박에 볼을 어렵게 돌리던 미드필더들은 도라익의 외침에 바로 공을 넘겼다.
공을 받은 도라익은 간단한 터치로 몸을 돌린 후 속도로 수비수를 떨쳐냈다. 스쳐 지나가는 도라익을 수비수가 손으로 잡으려 했지만, 도라익은 유니폼을 잡으려는 상대 손을 사정없이 쳐냈다.
"드리블이 난폭하군요."
"그렇습니다. 터치가 섬세하지 못해 예상한 것보다 공이 덜 가거나 더 갑니다. 그래서 최고 속도를 내지 못하는 것이지요."
드리블이 생각처럼 되지 않아 페널티 박스에 진입하기 전에 수비수한테 따라잡혔다. 도라익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왼발 인사이드로 공을 힘껏 차서 같은 팀의 오른쪽 윙한테 패스했다.
"패스는 어떻습니까?"
"힘이 좀 부족했습니다. 경험이 적어서일 수도 있고 볼 감각이 뛰어나지 못한 탓일 수도 있습니다. 둘 다 훈련으로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니 괜찮습니다."
패스가 조금 약했던 탓에 윙과 풀백이 경합했다. 다행히 공을 쫓는 풀백보다 공을 마중 나간 윙이 유리한 경합이어서 제어권을 잃진 않았다.
"오우!"
풀백을 완전히 벗겨내지 못한 윙이 억지로 크로스를 올렸다. 풀백의 블로킹을 피하려고 급하게 찬 탓에 공이 높았다.
그리고 도라익의 몸이 높이 솟구쳤다.
"훌륭하군요."
먼저 점프한 도라익은 긴 체공 시간을 자랑하며 머리로 공을 맞혔다. 도라익이 헤딩으로 준 백패스를 미드필더가 강슛으로 마무리했다.
키퍼의 손에 맞고 다시 포스트를 맞힌 슛은 골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팀 사기를 올리기엔 충분한 공격이었다.
"굿."
조끼들이 몰려와 일일이 도라익과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 뒤로 조끼 팀의 공격은 주로 도라익에게 의지했다. 트래핑이나 드리블이 불안하고 패스도 강하거나 약하여 정확도가 부족하지만, 제공권이 확실하고 속도가 빠르며 잡은 공은 확실히 지켰다.
"2년 정도만 다듬으면 프로로 데뷔해도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2년이면 충분합니까?"
"네. 기본기를 닦고 부족한 경험까지 채우면 두 번째 쏜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아시아 시장을 개척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군요."
"특히 친화력을 높이 사고 싶네요. 오늘 처음 보는 데 벌써 무리에 녹아들었습니다."
임원 모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한 달 뒤.
최경호의 전화기에 문자 하나 도착했다.
[본 구단은 귀하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명확히 알리며 협상 중단을 통보합니다. 생각이 바뀌거나 하면 언제든 연락을 주십시오.]
"형. 우리 망한 건가요?"
"프로팀은 독일에만 있는 게 아니야. 우리 영국 가자."
일곱 개 팀과 벌인 협상에서 모두 실패한 최경호는 도라익을 차에 싣고 영국으로 향했다.
- 작가의말
프롤로그 끝.
Comment '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