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귀근
2050년 5월 13일.
36라운드에 이미 우승을 확정한 맨유가 38라운드에 스토크시티를 맞이했다.
- 아쉽습니다. 도라익 선수 리그 은퇴 경기가 홈이 아닌 원정이어서.
- 그래도 도라익 선수 팬이 많이 와줘서 다행입니다.
올드 트래포드에는 2만 명에 달하는 원정 팬이 입장했다. 도라익의 은퇴식 때문에 맨유에서 아주 크게 양보한 것이다.
- 아직 경기 시작하려면 멀었는데 왜 벌써 생중계 시작하냐구요?
- 시청률 때문이죠. 경기 시작하려면 1시간 넘게 남았는데도 벌써 작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초반 시청률을 달성했거든요.
- 우리 최 PD는 좋겠습니다. 시청률 신기록 세워서.
- 기록 하니까 도라익 선수가 떠오르네요.
도라익 전문 해설로 불리는 강철민과 박만호가 만담 분위기로 생중계를 이끌었다. 관리 덕분에 피부는 나이에 비해 탱탱하지만, 눈가의 주름은 세월의 무상함을 그대로 알렸다.
- 일단 가볍게 우승 경력만 따져볼까요?
- 그렇네요. 도라익 선수 기록 중에 우승이 가벼운 편이긴 합니다.
- 프리미어리그 우승 1회.
- 라리가 우승 4회.
- 세리에 A 우승 2회.
- 분데스리가 우승 3회.
- 리그앙 우승 2회.
- 챔피언스리그 우승 7회.
- 올림픽 우승 3회.
- 아시안컵 우승 3회.
- 각 리그의 FA컵 합산 우승 11회.
- 잉글랜드 리그컵 우승도 있네요. 이건 FA컵이랑 다르죠.
- 뭐 빠진 거 없어요?
- 시시한 우승컵 십여 개 더 있는데, 입 아파 생략할게요.
- 자, 다음 개인 기록으로 넘어가겠습니다.
- 최연소니 뭐니 이딴 건 빼고 굵직한 것으로만 가죠.
- 그것도 귀찮아요. 그냥 위키에서 검색해 확인하세요.
- 시즌 100골 달성이나 2시즌 연속 모든 리그 경기에서 골 넣은 건 그래도 언급하는 게 좋지 않습니까?
댓글들이 뭉텅이로 올라왔다.
- 음. 위키에서 검색했는데 내용이 너무 길어서 읽기 피곤하니 그냥 우리더러 읽어달라는데요.
- 낭독 기능 사용하세요. 요즘 AI 목소리가 우리보다 훨씬 듣기 좋아요.
티격태격하면서도 둘은 결국 도라익이 세운 기록들을 일일이 언급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도 빠르게 흘렀다.
- 자, 드디어 오늘 경기 출전 명단이 나왔습니다.
이미 우승을 확정한 맨유지만, 리그 2위의 스토크시티를 맞이해 주전을 전부 출전시켰다.
스토크시티는 현재 2위지만, 비기거나 질 경우 4위까지 떨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고, 도라익의 은퇴 경기까지 겹쳐 당연히 주전으로 출전했다.
- 키퍼는 미라클입니다.
줄리엔의 아들 미라클은 골키퍼가 되었다. 전형적인 라인형 키퍼인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순발력으로 슈퍼 세이브를 자주 보이는 편이다.
- 센터백은 네이선과 콜린스의 조합입니다.
네이선도 한 시즌만 더 뛰고 은퇴할 예정이다. 콜린스는 나이가 들면서 활동 범위를 줄였지만, 그간 쌓인 경험 덕분에 훨씬 훌륭한 모습을 보였다.
- 왼쪽 풀백은 스미스입니다.
스미스는 지난 시즌 은퇴하기로 했으나 도라익이 스토크시티로 돌아오자 번복했다. 활동량이 예전과 같지 않으나 노련함으로 극복해 자기 역할을 넘치게 해냈다.
- 오른쪽 풀백은 일본 선수 미야코입니다.
수비가 부족하나 공격 공헌도가 높은 선수다.
- 수미는 마이친입니다.
폴란드 출신의 수미는 슈팅 빼고 완벽한 선수다.
- 마이친 앞엔 도라유와 봉코의 조합입니다.
봉코는 감비아 대표팀 주전으로 도라익과 함께 뛰고 싶다는 일념으로 주급을 낮춰 스토크시티에 이적했다.
도라익과 스토크시티 선수들의 기부로 만든 발전소와 정수 시설 덕분에 깨끗한 물을 마시고 자란 봉코이기에 스토크시티와 도라익에 대한 호감이 남달랐다.
- 도라유 선수, 지난여름에 도르트문트에서 2500만 유로로 이적해 왔는데요. 올 시즌 5골 9도움 달성했습니다.
- 도르트문트 입장에선 배가 참 아프겠습니다.
- 기본기 탄탄하고 드리블도 잘하는데 경기 흐름을 제대로 못 읽던 선수였거든요. 그런데 형의 가르침 덕분인지 올해 재능을 활짝 꽃피웠습니다.
- 왼쪽 윙은 브라질의 마우루 선수입니다.
드리블과 돌파에 과도하게 집착하던 스토크시티 에이스였는데, 도라익이 오면서 완치됐다. 출중한 돌파는 패스에 도움이 되고, 훌륭한 패스를 장착하면 돌파가 쉬워진다.
인생의 지혜를 배우고 겸손함까지 배운 마우루는 점점 훌륭한 선수로 변했다.
- 오른쪽 윙은 네덜란드의 코디 테저 선수입니다.
양발 사용이 자연스러운 젊은 윙이다. 마우루가 팀의 에이스였지만, 실질적으로 팀을 이끈 건 코디였다.
부지런하고 배움을 즐기는 선수여서 올 시즌 가장 긍정적인 변화를 보인 선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공격수는 도라익입니다.
- 이런 말이 있죠. 다른 선수가 월드클래스인 건 그 선수가 월드클래스의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도라익이 월드클래스인 건 그 이상의 클래스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반박 여지가 전혀 없는 평가네요.
- 감히 단언컨대, 도라익 같은 선수가 백 년 안에 절대 안 나옵니다.
- 그럼 벤치 명단 알려드리겠습니다.
- 어?
- 어!
댓글창에 '헐'이나 '대박' 등 단어가 무더기로 올라왔다.
- 도민호가 벤치 명단에 있습니다.
- 스토크시티에서 봉인했던 18번 유니폼을 입고요.
- 지난여름 도라익 선수가 마지막 시즌이라며 스토크시티에 돌아올 때 11번 유니폼을 골랐습니다. 그래서 18번은 영원히 봉인될 줄 알았는데.
- 도라익 선수의 은퇴식에 도민호 선수가 출전하는 깜짝 이벤트가 있나 봅니다.
- 형과 동생은 드물지 않고, 부자가 함께 경기를 뛴 기록도 드물지만 있습니다.
- 그러나 이렇게 세 명이 함께 출전한 기록은 제가 아는 범위엔 아직 없습니다.
도라익의 은퇴 경기라는 이유로 경기 시작 1시간 전부터 스포츠 중계 시청률 기록을 1분마다 갱신했다. 벤치 명단에 도민호의 이름이 확인되고부터는 상승 폭이 달라졌다.
- 음. 그런데 도민호 선수 프로필을 확인해보니 키가 189네요?
- 지난여름만 해도 저랑 키가 비슷했는데.
강철민은 전성기 시절에 179였다. 지금은 조금 줄어서 177에서 178 사이를 오간다.
- 도민호 선수가 강 해설을 할아버지라고 불렀죠?
- 네. 제가 도민호 선수 할아버지랑 나이가 비슷합니다.
- 비슷이요? 강 해설이 형인 거로 아는데요.
- 무슨 소립니까. 저리 훌륭한 아들이랑 손자 두신 분이 형이죠.
시간은 누군가에겐 빠르게, 누군가에겐 느리게 흘렀다. 그러나 결국엔 시즌 마지막 경기, 도라익의 리그 은퇴 경기 전으로 이르렀다.
"내 프로의 마지막 시즌을 너희와 함께해서 영광이었다."
도라익이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연설했다.
"비록 우승이 아니어서 조금 아쉽지만, 스토크시티가 얼마나 탄탄한 팀이고 너희가 얼마나 훌륭한 선수인지 세상에 알린 것 같아 기쁘다."
몇몇 선수가 눈물을 훔쳤다. 전성기와 비교해 기량이 떨어진 도라익이지만, 긍정적인 태도와 끊임없는 노력 그리고 사심 없는 도움으로 팀을 리그 2위로 끌어 올렸다.
자신들이 부족해서 도라익의 은퇴 시즌에 우승컵을 못 들어 올렸다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몹시 컸다.
"다들 고맙다. 내가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게 훌륭한 선수라서."
"이기자!"
"승리하자!"
"박살 내자!"
다소 과격한 구호로 울렁이던 마음을 평정시킨 스토크시티 선수들이 밖으로 나가고 도라익만 남았다.
- 보통 우승팀이 결정되면 상대 팀 선수들이 도열해서 박수로 맞이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우승팀인 맨유 선수들이 스토크시티 선수들과 함께 도열해서 도라익 선수를 맞이합니다.
- 도라익 선수라면 그만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죠.
- 있는 게 아니라 차고 넘치죠. 넘치고 넘쳐서 지구 반대편까지 흐릅니다.
- 강 해설, 설마 또 웁니까?
- 도라익 선수가 월드컵까지 뛰고 은퇴한다고 했습니다. 저도 월드컵이 끝나면 해설 그만둘 생각입니다.
- 아니, 그런 결정을 이렇게 내리면 어쩌라는 겁니까?
- 말릴 생각 마세요. 제 생각은 확고합니다. 마누라가 계속 해설하라고 해도 안 할 겁니다.
- 그래도 저한테는 미리 알렸어야죠. 새 파트너 찾을 시간 정도는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 야, 나 지금 진지해.
도라익이 밖으로 나왔다. 선수들이 진심 어린 박수로 도라익을 맞이했다.
그에 맞춰 2만 명 원정 팬들이 대형 TIFO를 펼쳤다.
즐겁게 웃는 도라익의 얼굴과 함께, 도라익이 걸어온 여정과 기록을 빼곡히 새긴 TIFO였다.
- 아, 위장전입자들이 속속 드러납니다.
홈팬 관객석에서 맨유 유니폼을 벗는 팬들이 보였다.
- 바르사, 뮌헨, 레알, AC 밀란, 릴, 도르트문트, 파리 생제르맹.
- 도라익 선수가 몸을 담았던 구단 팬들이군요.
- 이 장면을 보니까 1년 전 도라익 선수가 스토크시티로 돌아갈 때 일이 생각나네요.
- 스토크시티 팬 17만 명이 런던 공항에 도라익 선수 마중하러 나갔죠.
- 그때 중국 팬이 올린 글이 생각납니다. 중국 리그로 왔으면 우린 1억 명 갈 수 있는데.
- 농담이 아닌 거 같아서 무서웠던 기억이 납니다.
대형 화면에 도라익의 축구 생애를 조명하는 클립이 방영되었다.
워낙 들어 올린 우승컵이 많아 1초에 3컷씩 교체하는데도 시간이 꽤 걸렸다.
- 도라익 선수의 할아버지 도봉구 씨가 시축합니다.
- 몇 년 뒤면 여든인데 참 정정하시네요.
- 제 아들이 도라익 선수 같으면 저도 지금 20대로 보일 겁니다.
- 아들이 들으면 섭섭하겠습니다.
- 섭섭할 게 뭐 있습니까. 도라익 선수랑 비교해 준 자체를 영광으로 알아야죠.
시축을 끝낸 도봉구 씨는 굳이 벤치로 가서 도민호와 다른 선수들에게 용돈을 쥐여줬다. 용돈 문화에 익숙지 않은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 자. 도라익 선수의 리그 은퇴 경기. 이제 시작합니다.
- 작가의말
아직 조금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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