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분계선
2031년 5월 13일.
전 세계가 영국을 주목했다.
프리미어리그 38라운드의 10경기가 동시에 진행됐다.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은 경기장 밖에 모여 핸드폰으로 인터넷 중계를 지켜봤다. 그것도 자신이 응원하는 팀뿐만 아니라 우승을 판가름하는 경기와 강등을 결정짓는 경기도 주시해야 했다.
우승 행방과 강등 행방에 모두 관여된 경기가 있었다. 바로 2점으로 첼시를 앞선 맨유와 38점으로 리그 17위를 차지한 스토크시티의 경기다.
18위의 위건은 35점으로 스토크시티와 3점 차이가 난다. 그러나 스토크시티가 지고 위건이 승리하면 순위가 바뀌어 스토크시티가 강등한다.
스토크시티 입장에선 비기기만 하면 잔류가 확정되기에 꽤 유리한 입장이다.
하지만.
양 팀이 비기고 첼시가 승리할 경우 리그 1위는 첼시로 바뀐다. 골 득실에서 첼시가 맨유를 앞섰기 때문이다. 맨유는 첼시의 패배나 무승부를 바라기보단 확실하게 스토크시티를 이겨야 한다.
스토크시티는 비기기만 하면 되고 맨유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 얼핏 보면 스토크시티가 유리할 것 같지만, 맨유의 83득점 26실점의 성적을 생각하면 실상은 다르다.
더구나 경기를 진행하는 곳은 맨유의 홈구장인 올드 트래포드. 리버풀의 안필드와 더불어 원정팀에 악마의 구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도우, 괜찮아?"
도라익이 팀 맨 마지막에 서고 그 앞엔 클루카스가 섰다.
"뭐가요?"
"인터넷 안 해?"
"할 시간이 없어요."
"잘했어."
스토크시티 팬 중에서도 도라익을 비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일부는 객관적인 사실만 보고 비판하는 거지만, 대부분은 아니었다.
도라익이 페널티킥을 뺏으려는 행동에서 찰리가 다음 시즌 팀을 떠나는 게 아닌지 걱정되어 도라익을 욕하는 거로 불안을 해소하려 했다.
찰리는 곧 떠날 사람이어서 갓 팀에 온 도라익이 함부로 하는 거라고 억측한 것이다. 비슷한 사례가 없진 않아 허무맹랑한 추측은 아니었다.
작은 해프닝으로 여기고 지나쳐도 될 일이 논란이 되어 연일 시끌벅적한 이유다. 한국에서 벌어진 논란은 원인이 다르지만.
"도우, 난 네 팬이야."
플레이어 에스코트를 맡은 아이가 말했다.
"고마워."
"오늘 이길 거지?"
"응."
"꼭 이겨야 해. 반드시 셰필드 놈들을 챔피언십으로 쫓아내야 한다고."
도라익은 그제야 대화 흐름이 이상함을 느꼈다.
"너 어디 팬이야?"
"위건 팬이야. 하지만 널 미워하지 않아."
"근데 왜 우릴 응원하는데? 우리가 지고 위건이 이겨야 잔류할 수 있잖아."
"위건은 이기기만 하면 돼. 이기면 골 득실로 셰필드 위로 가거든."
셰필드 역시 38점이다. 현재 두 팀은 골 득실이 -22로 같다. 위건은 이기기만 하면 스토크시티의 경기와 상관없이 잔류에 성공한다.
"근데 왜 우리도 이겨야 해?"
"비겨도 돼. 셰필드가 챔피언십 가야 하거든."
"왜?"
"우리 팀 엠블럼이랑 유니폼을 태웠어. 경기장 밖에서."
홀리건이라고 쓰고 홀리 쉣이라고 읽는 영국의 과격 팬. 이번에 사고 친 놈들은 셰필드 지지자들이었다.
이들은 경기장 앞의 광장에서 위건의 엠블럼과 유니폼을 태우는 퍼포먼스를 하고 위건 팬들과 충돌을 일으켜 60여 명이 연루된 집단 난투를 유발했다.
"나쁜 놈들이네."
도라익도 자신들을 이긴 셰필드에 감정이 좋지 않다. 도라익이 공을 잡거나 실수할 때마다 터지던 홈팬들의 야유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거긴 좁은 지역에 구단이 여럿이야. 살기 퍽퍽해서 그러는 거라는데 그래도 용서가 안 돼."
도라익은 아이답지 않게 똑똑한 에스코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곧 맨유 선수들도 대기실에서 나왔다.
마커스 래시포드, 디오구 달로트, 다니엘 제임스, 메이슨 그린우드, 아론 완비사카, 제임스 가너, 브랜든 윌리엄스.
서른이 넘은 선수가 대거 포함되었다. 강팀과 펼치는 대결엔 스피드가 빠른 젊은 선수를 선호하고 약팀을 상대할 땐 경험이 풍부한 노장을 즐겨 기용하는 맨유 감독이다.
팬들의 원성에도 꾹 버티며 로테이션을 지킨 덕분에 10라운드 이후부터 어느 팀보다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며 쭉 리그 선두를 지켰다.
"이빨 빠진 사자야. 겁먹지 마."
꼬마가 도라익의 손을 꼭 잡으며 격려했다. 도라익은 그저 피식 웃었다.
곧 심판의 인솔을 받아 그라운드로 향했다. 대기 통로를 나오자 올드 트래포드의 시뻘건 관객석이 도라익의 시야를 침범했다.
"쫄지 마."
도라익의 손을 꼭 잡은 꼬마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알았으니까 너나 가슴 쭉 펴."
도라익과 꼬마는 누구보다 당당한 걸음으로 입장했다.
"비길 생각으로 경기하면 져. 그러니까 반드시 이긴다는 생각으로 해. 알았지?"
악수를 마치고 돌아가기 전, 위건 꼬마 팬이 신신당부했다.
이젠 지루하게까지 느껴지는 순서들이 지나고 경기가 시작됐다. 도라익은 처음 느끼는 압박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첼시도 이랬어?"
몸싸움 때문에 작은 다툼이 벌어진 틈을 타 도라익이 제임스한테 질문했다.
"첼시는 단단한 벽 느낌이고 맨유는 질척거리는 뻘 느낌이야."
공을 잡으면 패스할 데도 마땅치 않고 드리블할 공간도 없다. 골대와 가까운 곳이라면 드리블로 공간을 만들어 억지로라도 슈팅할 텐데, 미드필드에서 공을 잡으면 뭘 하기 막막하다.
이제껏 몸싸움에서 지는 걸 몇 번 본 적이 없는 찰리도 맨유 센터백 상대로 계속 헤딩을 빼앗겼다. 팀의 지원이 부족해 선택 여지가 적은 것도 있지만, 맨유 센터백이 찰리보다 힘이 세고 경험도 많은 게 주요 원인이다.
'그러고 보니 진짜 강팀은 처음이네.'
맨시티와 리버풀과 첼시 모두 출전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4위를 차지하여 챔피언스리그에 참가하는 아스널도 강팀이긴 하지만, 두 경기 모두 1:0으로 이겼기에 체감되지 않았다. 아스널의 축구 스타일이 다소 부드러워 별로 힘겹지 않았던 것도 있고.
맨유의 특징은 빠름이었다. 선수들 속도가 빠른 것도 있지만, 패스가 빨랐다. 거기에 각자 위치에서 개인 능력으로 상대를 압도하니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머리 잃은 파리처럼 갈팡질팡했다.
- 찰리 선수가 또 공중볼 경합에서 졌습니다.
- 딱 한 번 성공했는데 흘러나온 공을 맨유가 챙겼죠.
- 도라익 선수의 수비도 문젭니다. 빠른 패스 때문에 수비 위치를 선정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고 있어요.
맨유는 빠른 패스로 공을 돌리다가 틈이 생기면 찌른다. 공격이 실패하더라도 흘러나온 공의 열에 여섯은 맨유가 잡았다.
스토크시티가 잡은 넷도 찰리한테 보내다가 끊어 먹히지 않으면 도라익이 잡고 제임스나 앨런 그리고 산체스 등과 패스를 주고받다가 뺏겼다.
팀 전체가 압도당하니 도라익의 스피드도 무용지물이었다. 어렵게 속도로 돌파해 슈팅 기회를 만들어도 지쳐서 강한 슈팅을 때리기 어려우며, 패스는 맨유 수비수들이 차단했다.
게다가 7만이 넘은 맨유 팬들이 우승을 향한 광기를 발산하여 스토크시티 선수들을 위축시켰다.
팀이 절대적 열세에 놓였는데도 스토크시티 벤치는 온전히 경기에 집중하지 못했다. 셰필드 홀리건의 만행으로 화가 잔뜩 난 위건이 벌써 1:0으로 앞섰다.
골 득실에서 셰필드에 지는 스토크시티 입장에선 위건의 승리가 반갑지 않았다.
- 래시포드 선수가 플립플랩으로 풀백을 흔든 뒤 패스합니다.
- 아, 선테백이 넘어졌어요!
- 키퍼, 키퍼 나와야 합니다!
경기 30분. 맨유의 흔들기에 체력이 빠진 센터백이 래시포드의 패스를 차단하려다가 미끄러워 넘어졌다. 브라질의 자랑 베르딩요가 야생마처럼 달려 공을 잡고 드리블했다.
특이하게도 골 에어리어에서도 슈팅에 급급해하지 않고 드리블하는 선수다.
- 베르딩요의 골입니다.
- 1억7천만 파운드에 선수 세 명을 얹었죠.
- 베르딩요를 이적시킨 바르셀로나는 이번 시즌 리그 3위의 초라한 성적을 거뒀습니다.
당당하게 바르사에 주전 보장을 요구한 브라질 천재. 94년 미국 월드컵 브라질 우승의 주역 호마리우의 후계자로 불리는 선수다.
늘 훈련을 빼먹고 클럽에서 밤새워 놀던 호마리우와 달리 베르딩요는 성실하기까지 하다.
- 베르딩요 선수 리그 32번째 골입니다.
- 프리미어리그 최다 골 기록이 34골이죠.
- 안 깨졌으면 좋겠습니다.
상대가 잘했다기보단 수비수 실책으로 먹은 골이기에 스토크시티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괜찮아. 셰필드가 골 넣어서 점수가 1:1이야."
위건이 이기지 못하면 이번 경기가 어떻게 돼도 좋다. 벤치에서 정보를 받은 선수들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자. 앨런하고 산체스는 좀 더 과감하게 움직여. 제임스는 공격보다 수비에 신경 쓰고."
클루카스의 말에 셋이 고개를 끄덕였다. 버틀랜드 역시 수비수들의 위치를 조정했다.
1골을 앞선 맨유는 2번째 골에 집착하지 않고 적당히 수비적인 태세를 취했다. 동점 골에 급급한 스토크시티를 끌어낸 다음 베르딩요의 스피드로 반격하려는 속셈이었다.
그에 반해 스토스시티는 마음이 복잡했다. 과감히 공격하자니 추가로 실점할까 봐 겁나고, 이대로 수비하자니 위건이 이길까 봐 겁났다. 위건이 이기고 스토크시티가 지면 스토크시티가 강등한다.
"공 줘! 전반전에 한 골 넣자!"
물론, 도라익처럼 승리를 외치는 선수도 없진 않았다.
- 작가의말
전설이여, 소년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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