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점 경기
4월 22일.
스토크시티는 원정에서 리그 꼴찌 번리와 대결하게 되었다. 점수 차이가 고작 2점이어서 지는 팀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6점짜리 경기였다.
17위부터 15위까지 전부 원정 경기를 펼치기에 스토크시티가 3점을 따낸다면 강등권을 탈출할지도 모르는 중요한 경기였다.
긴장한 탓인지 그라운드에 입장하는 양 팀 선수들 얼굴이 모두 밝지 못했다.
3경기 전만 해도 번리가 18위고 스토크시티가 20위였다. 그런데 번리는 3라운드 동안 고작 1승점을 올리며 20위로 추락했고, 팬들조차 포기했던 스토크시티는 3연승으로 9승점을 올려 강등권 탈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럼에도 스토크시티 선수들 얼굴은 밝지 않았다. 상대의 반칙에 과민 반응을 보였고 경기 중 공황에 빠졌던 도라익이다. 오늘 경기에 교체로 출전한다면 번리 선수들이 위험한 반칙으로 도라익을 위협할지도 모른다.
- 오늘은 오창범 선수도 벤치에서 시작합니다.
꼭 이겨야 하는 경기라는 말은 지면 안 된다는 말과 같다. 꼭 이겨야 하는 경기는 비기는 것만으로도 큰 손실이기에 지는 건 절대 안 된다.
테일러는 오창범 대신 라미스를 선발로 점지했고, 보크스를 올려 루이스와 함께 수미를 뛰게 했다. 대인 마킹은 리 그레고리가 훨씬 잘하지만, 보크스의 전술 활용도가 훨씬 높다.
- 우디르 선수가 왼쪽 윙, 산체스 선수가 오른쪽 윙으로 뜁니다.
- 발제르 선수가 포워드인 거 같구요.
- 수비를 극대화한 전술인 거 같죠?
수비적으로 나왔지만, 스토크시티가 훨씬 유리한 상황이다. 스토크시티는 현재 33골을 넣었고 번리는 겨우 25골을 넣었다.
득점자도 스토크시티엔 10골 이상을 기록한 토미가 있지만, 번리에는 5골 넣은 선수 한 명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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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 네가 경기를 뛰기 어렵다고 판단하면 바로 교체할 거야."
0:0의 점수로 전반전이 끝났다. 테일러는 후반전이 시작하자마자 바로 도라익을 올리기로 했다.
혹시 도라익에게 문제가 보이면 바로 교체하기 위함이다. 괜히 늦게 올렸다가 도라익이 지난 경기와 같은 모습을 보이면 해결책이 없다.
"걱정 마세요. 화 안 내기로 아들이랑 약속했어요."
도라익이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원래 주정뱅이들도 술 마시기 전엔 절대 안 취한다고 큰소리 떵떵 치는 법이다.
기대보다는 걱정이 큰 가운데 후반전이 시작됐다.
도라익이 공을 잡자 번리 선수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누가 봐도 공보다는 사람을 노리는 모양새였다.
몇백 명밖에 안 되는 스토크시티 원정 팬들이 비난을 쏟았다. 그러나 수만 명 홈 팬의 응원에 처참하게 묻혀버렸다.
도라익은 공을 오른쪽으로 툭 치고 정작 본인은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기세 좋게 달려들던 번리 선수가 도라익과 충돌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도라익은 살짝 하얘진 얼굴로 깊은숨을 몰아쉬며 공을 향해 달렸다.
근처에 있던 번리 선수가 달려오다가 공을 향해 슬라이딩 태클을 펼쳤다. 아직 도라익이 공을 잡고 소유권을 주장하기 전이어서 위험한 동작이지만, 반칙은 아니었다.
도라익이 이를 악물고 급가속했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너무 오랜만이라 모두 깜짝 놀랐다.
절대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 공을 안전하게 지킨 도라익은 바로 공을 토미에게 패스했다.
도라익이 우디르를 교체해 출전하면서 보크스는 센터백으로 복귀했다. 스리백 전술을 사용한 스토크시티는 라미스와 맥자넷의 위치를 올렸고, 산체스와 토미 그리고 도라익이 미드필드를 구성했다.
그런데 포워드인 발제르까지 위치를 미드필더처럼 내린 바람에 스토크시티는 중원에서 머릿수로 상대를 압도했다.
번리는 패스를 주고받으며 밀고 올라오는 스토크시티를 막기 위해 양쪽 풀백의 위치를 안으로 좁혔다.
그 틈을 타 맥자넷과 라미스가 오버래핑했다.
번리는 측면을 계속 버리는 선택을 했다. 크로스를 올려도 도라익만 조심하면 된다. 반면, 중앙이 뚫리면 도라익은 물론이고 토미와 발제르 모두 일정 득점력을 보여줬다.
게다가 산체스의 중거리 슛도 꽤 위협적이다.
"줄리엔, 올라가."
네이선도 헤딩을 꽤 하지만, 득점력은 줄리엔이 못 미친다. 테일러는 원하던 그림이 그려지자 아꼈던 패를 꺼냈다.
번리 선수들이 당황했다.
줄리엔이 원톱으로 버티고 라미스와 맥자넷이 크로스를 올린다. 줄리엔 뒤엔 도라익과 발제르가 버티고, 토미와 산체스가 측면에 가기도 하고 중앙에 오기도 하며 번리 수비진을 흔들었다.
게다가 이번 시즌 중거리 슛으로 3골을 기록한 루이스가 뒤에 대기하고 있다.
공격수 한 명 빼고 전원이 수비하고 있긴 하지만, 선수들 머리가 복잡해서 반응이 점점 느려졌다.
'상대가 더 급해.'
테일러는 조급한 마음을 꾹 눌렀다. 스토크시티도 3점이 절실하지만, 20위인 번리만큼은 아니다.
테일러의 베팅은 정확했다. 후반 55분에 번리 벤치가 먼저 교체를 진행했다.
"자, 당분간 수비한다."
번리가 스피드가 빠른 공격수로 기존 공격수를 교체하자 테일러는 바로 수비를 지시했다. 스토크시티는 언제 공격했냐는 듯이 도라익만 앞에 두고 남은 선수 모두 수비에 전념했다.
속도 빠른 공격수로 스토크시티의 압박을 벗기려던 번리 입장에선 성공적인 교체인 듯했으나, 스토크시티가 갑자기 수비하는 바람에 교체로 올라온 공격수가 아무 쓸모도 없는 선수가 돼버렸다.
"제임스."
후반 65분. 테일러는 제임스로 산체스를 교체했다. 그에 맞춰 보크스가 위치를 올려 루이스와 함께 수미 롤을 수행했다.
"테일러 대단하지 않아?"
교체로 출전한 제임스가 도라익에게 속삭였다.
"확실히 잘 본단 말이야."
도라익은 고개를 끄덕여 제임스의 평가를 긍정했다. 현재까지 진행은 테일러가 경기 전에 얘기했던 흐름과 다르지 않았다.
감독이 경기 흐름을 정확히 예측하면 선수들 자신감이 부풀어 오른다. 모든 게 감독 의도대로 흐른다는 착각 비슷한 게 생기며 집중력도 높아진다.
"그럼 테일러의 마지막 예언을 현실로 만들자."
말을 마친 제임스가 오른쪽으로 갔다. 토미는 맥자넷을 돕고 제임스는 라미스를 돕기로 사전에 얘기됐다.
도라익 역시 사전에 지시받은 대로 왼쪽으로 치우쳐 움직였다.
도라익이 왼쪽으로 자리를 잡자 번리는 무의식적으로 스토크시티의 오른쪽을 공략했다. 도라익이 있는 왼쪽에서 공을 뺏기면 반격당할 확률이 높을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좋았어. 감독 말대로야.'
단순한 제임스는 이게 당연한 결과임을 모르고 테일러의 신기묘산에 감탄했다.
덕분인지 컨디션이 빠르게 올라왔고, 드리블하는 번리 선수의 공을 뺏어 루이스에게 패스했다.
공을 잡은 루이스는 잠깐 둘러보다가 달려오는 라미스에게 패스했다. 이는 번리 선수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흐름이었다.
라미스는 루이스가 준 공을 잡지 않고 첫 터치로 긴 패스를 때렸다.
- 도라익 선수 단독 찬스!
번리 선수가 다급히 도라익의 유니폼을 잡았지만, 결국 손아귀 힘이 풀려 놓치고 말았다. 도라익은 굴레를 벗은 야생마처럼 달려 라미스의 패스를 잡고 골대로 드리블했다.
키퍼가 달려 나왔다.
- 태클입니다!
페널티 박스 라인을 벗어나자마자 키퍼는 슬라이딩 태클을 날렸다. 도라익이 놀라 성급히 슈팅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고, 혹시라도 공을 건드려 공격을 무산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요행 심리도 있었다.
- 레인보우!
도라익은 키퍼가 태클을 하기도 전에 레인보우 킥으로 공을 앞으로 보냈다. 동시에 상대 태클을 피해 옆으로 물러났다.
태클에 실패한 번리 키퍼는 이를 꾹 악문 채 공을 향해 달려가는 도라익의 발목을 손으로 잡았다.
환희에 차서 공을 향해 가속하던 도라익이 쿵 하고 넘어졌다.
주심이 황급히 사고 현장으로 달렸다. 가장 가까웠던 토미 역시 넘어진 도라익을 향해 질주했다.
삑!
도라익을 쫓던 수비수가 공을 밖으로 차 내자 주심이 휘슬을 불어 반칙을 선언하고 번리 키퍼에게 레드카드를 제시했다.
번리 키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경기장을 떠났다.
"도우, 괜찮아?"
"나 괜찮아? 얼굴 말이야."
도라익이 엎드린 채로 말했다.
"얼굴이 하얘."
"살짝 꼬집어 줄래?"
"어딜?"
도라익은 어딜 꼬집어야 얼굴에 핏기가 생길지 고민하다가 곧장 포기했다.
겁에 질린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서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대로 엎드려 있는 게 오히려 더 걱정을 끼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 때문이었다.
"나 찍는 카메라 어딨어?"
도라익이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저거 같은데?"
골을 꽤 넣으며 세리머니를 꽤 했기에 토미는 정확히 카메라를 찾아냈다. 도라익은 굳은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다행입니다. 아무 부상도 없는 것 같습니다.
- 트라우마도 이겨낸 것 같습니다. 도라익 선수, 참 장합니다.
호흡이 돌아온 도라익은 일어서서 팔다리를 흔들어 풀었다.
"네가 찰 거야?"
토미가 질문했다.
"응. 갑자기 집중력이 올라왔어."
말을 마친 도라익은 공과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슈팅하는 장면을 거듭 상상했다. 그러는 사이 번리는 미드필더 한 명을 내리고 키퍼를 출전시켰다.
번리 선수들도 7명이나 수비벽을 쳤다.
"페이크 해줄까?"
토미의 말에 도라익이 고개를 저었다. 토미는 바로 수비벽 근처로 달려가 침투 준비를 했다.
번리는 수비벽에서 한 명 빼서 토미를 마킹했다.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도라익은 고개를 들고 키퍼와 골대와 수비벽만 보며 달렸다. 그리고 끝까지 공을 보지 않은 채 왼 다리를 힘껏 휘둘렀다.
- 골! 골! 미쳤습니다. 미친 골입니다.
- 그래요. 숨이 멈출 정도로 어마어마한 골입니다.
- 역사에 길이 남을 골입니다. 21세기 최고의 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왼발로 찬 공은 처음에 도라익 기준으로 수비벽 왼쪽으로 갔다. 그런데 수비벽을 넘은 공이 갑자기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수비벽에 막혀 공의 궤적을 뒤늦게 확인한 키퍼가 급히 몸을 날렸다.
그런데 오른쪽으로 틀던 공이 갑자기 위로 확 떴다.
원래부터 공을 건드릴 가능성이 거의 없던 키퍼였다. 공이 갑자기 위로 떠버린 상황엔 팔 두 개 더 줘도 공을 건드릴 일이 없었다.
탄식이 메아리치는 가운데, 수백 명 원정 팬의 환호가 유달리 우렁찼다.
- 농구엔 3점 슛이 있죠. 도라익 선수의 이 골은 6점 슛입니다.
원정에서 1:0으로 승리한 스토크시티는 31점으로 리그 17위에 랭크되며 강등권을 탈출했다. 점수 차이가 작아서 방심하기 이른 단계지만, 4연승의 기적을 맞이한 스토크시티 팬들은 팀의 잔류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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