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의 라익
실점한 로잔은 섣불리 라인을 올리고 공세에 나서지 않았다.
스토크시티 입장에서 남은 세 팀이 만만하게 보이듯이, 다른 팀들도 해볼 만한 게임이라고 여기며 어느 정도 자신감은 있다.
로잔 역시 조 1위를 넘볼 정도로 욕심이 큰 건 아니지만, 객관적 최강자인 스토크시티와 무승부를 내거나 지더라도 골 득실을 유리하게 가져가려는 속셈을 품었다.
덕분에 경기 양상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로잔은 여전히 웅크린 채로 반격 기회만 노렸고 스토크시티는 패스워크로 상대 수비진을 흔들며 틈을 찾았다.
- 로잔의 반격이 또 한 번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 레체르트가 센터백치고는 빠른 편입니다. 더해서 위치 선정이 좋은 타이먼이 상대 공격을 늦추는 역할을 하니 수비에 틈이 없네요.
리엄의 압박을 못 이긴 공격수가 실수로 공을 세게 찼다. 빠르게 달려 공을 잡은 레체르트가 페널티 박스 밖으로 나온 미켈한테 패스했다.
패스받은 미켈은 지체하지 않고 오른쪽 측면으로 간 타이먼한테 공을 보냈다.
타이먼은 바로 산체스한테 패스한 후 느리게 달리며 엄호했다. 산체스는 바로 공을 타이먼한테 돌려주고 앞으로 달렸다.
타이먼은 어느새 중앙선까지 온 레체르트한테 패스했다. 레체르트는 공을 잡고 관찰하다가 곧게 찔러 제임스를 찾았다.
제임스가 공을 잡자 도라익이 슬금슬금 페널티 박스 밖으로 나왔다. 도라익이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자 로잔 센터백이 따라붙었다.
제임스는 공을 페어린던에게 패스했다.
공을 잡고 돌파를 시도하던 페어린던이 힐킥으로 제임스한테 공을 돌려줬다. 제임스는 원터치로 페널티 박스 안으로 패스했다.
센터백이 도라익을 따라 나오면서 생긴 공간을 어느새 차지한 토미가 제임스의 패스를 받았다.
골키퍼는 패스 방향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가까운 포스트 쪽으로 몸을 움직여 슈팅 각도를 없앴다.
찰리를 마킹하던 센터백이 황급히 토미 쪽으로 달렸고 맥자넷을 수비하던 풀백도 토미를 향해 움직였다.
토미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공을 오른쪽으로 밀었다.
- 골입니다. 도라익 선수 멀티 골 달성했습니다.
뛰어난 순발력으로 달려간 도라익이 강슛으로 득점에 성공했다.
- 오른발입니다. 도라익 선수가 오른발로 슈팅했습니다.
- 왼발 의존도가 높은 문제점을 인식했는지 이번 시즌부터 오른발 터치가 늘었습니다.
- 여전히 왼발 의존도가 78%나 되기에 큰 변화는 아니지만, 원래 천릿길도 한 걸음으로 시작하는 겁니다.
수석 코치가 전술 교체 신호를 보냈다. 지시에 따라 도라익이 포워드 자리로 가서 찰리와 함께 헤딩에 열중했고, 산체스와 토미의 지원을 받은 페어린던과 맥자넷이 평균 1분에 한 번씩 크로스를 올리며 로잔의 키퍼와 수비수들을 괴롭혔다.
하프 타임.
"후반전엔 라인을 내린다."
윌슨 감독이 전술 판을 들고 설명했다.
"제임스 대신 루이스가 투입된다. 우린 후반전에 느린 공격을 할 것이다."
"이유가 궁금합니다."
도라익이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다.
"22일에 뉴캐슬 원정 경기, 26일엔 리그컵 홈 경기, 29일엔 홈에서 아스널과 경기, 10월 1일엔 홈에서 유로파리그 경기."
13일 기간에 스토크시티가 치러야 할 경기는 총 5개다. 그중 리그컵 역시 챔피언십 팀을 상대해야 하기에 모든 주전에게 휴식을 줄 수 없다.
"경기 리듬이 빠르면 판단할 시간이 부족하고, 그렇게 되면 다치기 쉽다. 1:0으로 이기나 10:0으로 이기나 승점이 3점인 건 똑같다. 멋지게 이기는 것도 좋지만, 경기 자체를 컨트롤하여 완벽한 승리를 거두는 게 더 중요하다."
'그래서 날 풀타임 안 뛰게 하는 거구나.'
도라익의 회복력이 남다르다곤 하지만, 그걸 믿고 혹사하다가 시즌 중반이나 후반에 퍼져버리면 스토크시티엔 큰 손해다.
현재 도라익과 찰리 중 하나만 빠져도 팀의 전술이 극도로 단순해지는 약점이 있다.
한두 경기나 30분 정도는 우디르가 도라익을 대체할 수 있지만, 전술 이해가 도라익보다도 부족하여 주전 자리를 감당하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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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토크시티가 공을 뒤로 뺍니다.
- 전반전과 달리 라인도 내리고 패스도 신중하게 하죠?
- 상대를 끌어내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로잔 선수들도 쉽게 함정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다 후반전 60분이 되자 수비수 한 명을 빼고 공격수를 출전시키며 전방 압박을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수비 라인도 중앙선까지 올렸다.
- 다행입니다. 타이먼 선수의 핸드볼 파울이 프리킥 판정을 받았습니다.
타이먼은 긴장하면 팔에 힘이 들어가 반응이 느려진다. 상대가 찬 공을 피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파울이 되었다.
다행히 페널티 박스 라인을 넘지 않은 상황이어서 프리킥이 되었다.
키가 큰 선수들이 벽을 쌓고 타이몬이나 제임스 그리고 페어린던 등 키가 작은 선수들은 상대 공격수를 마킹하는 역할을 맡았다.
도라익 역시 속도가 빠른 상대 팀 오른쪽 윙의 유니폼을 살짝 비틀어 잡고 수비에 집중했다.
키커가 달리는 동시에 손가락으로 잡았던 유니폼이 빠졌다. 도라익은 바로 움직여 상대 윙이 달린 방향으로 뛰었다.
그러나 로잔 공격수들의 움직임은 페이크였다. 키커는 패스 대신 왼발 감아 차기로 가까운 포스트를 노렸다.
웬만큼 킥이 정교하지 않으면 노리기 어려운 위치인데 로잔의 키커가 찬 공은 꽤 정확했다.
그러나 정확하게 차려고 힘을 뺀 탓에 속도가 느렸다. 신장 199인 미켈이 세게 점프하지도 않고 공을 양손으로 꽉 잡았다.
"도우!"
미켈이 높이 외치며 공을 오른쪽으로 던졌다. 어느새 몸을 돌린 도라익이 빠르게 달려 미켈이 던진 공을 잡았다.
도라익의 마킹을 받던 윙이 미친 듯이 달려왔다. 도라익은 공을 앞으로 툭 치고 달렸다.
뒤에 남은 수비수는 총 셋이었다. 가장 먼저 도라익이 맞닥뜨린 건 풀백이었다. 도라익은 공을 짧게 치며 거리를 조절하다가 갑자기 강하게 치고 달렸다.
풀백이 달리는 경로를 막으며 방해하려 했지만, 어깨로 강하게 밀치는 도라익에게 오히려 밀려났다.
중앙선을 넘은 도라익은 공을 잡기 직전에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윙이 빠른 속도로 따라붙고 있고 센터백 한 명이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센터백이던지 수미던지 헷갈리는 선수가 센터백 뒤에 백업했다.
도라익은 급정지하여 오른발을 축으로 하고 왼발로 공을 굴리며 몸을 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도라익을 쫓던 윙이 급하게 멈춘 도라익을 스쳐 지나갔다.
계속하여 몸을 돌린 도라익은 공을 중앙으로 치고 달렸다. 센터백이 황급히 뒤로 달리고 백업했던 선수가 공을 향해 뛰었다.
- 도라익 선수 가속합니다.
- 너무 빨라요. 멀미할 것 같아요.
빠른 속도로 공을 따라잡은 도라익은 골대 방향으로 공을 툭 쳤다. 그러고는 달려오는 로잔 선수에게 바디 체크를 했다.
도라익과 충돌한 선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로잔 선수가 비틀거리는 사이 도라익은 어느새 균형을 잡고 자신이 찬 공을 쫓아갔다. 미리 뒤로 물러났던 센터백은 망설이다가 계속 뒤로 물러났다. 다가가면 도라익이 속도로 자신을 제쳐버릴 것 같았다.
그때 도라익한테 가장 먼저 제쳐진 풀백이 달려왔다. 도라익은 몸을 오른쪽으로 살짝 틀어 달려오는 풀백에게 바디 체크를 했다. 도라익과 충돌한 풀백은 쓰러지며 함께 달리던 윙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도라익은 바디 체크를 하는 동시에 왼발 아웃사이드로 공을 왼쪽 사선으로 밀었다. 그리고 충돌의 반탄력을 이용해 방향을 바꿔 공을 쫓아갔다.
- 페널티 박스 진입했습니다.
페널티 박스엔 키퍼와 도라익 그리고 줄곤 물러나던 센터백까지 셋이 있었다.
도라익은 오른발로 플립플랩을 펼쳐 센터백을 속인 후 골라인 쪽으로 드리블했다. 가까운 포스트를 오른손으로 잡고 있던 키퍼가 앞으로 세 걸음 나왔다.
도라익에겐 가랑이를 노리든지 높은 공으로 가까운 포스트의 야신존을 노리든지 두 가지 선택밖에 없어 보였다.
- 도라익! 과감한 드리블.
그러나 도라익은 헛다리를 두 번 짚은 다음 중앙으로 드리블했다. 먼저 공을 차서 보낸 다음, 키퍼와 센터백 사이로 쏙 빠져나갔다.
방향 전환이 너무 부드럽고 가속도 자연스러워 키퍼와 센터백 모두 도라익의 유니폼을 잡을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둘 사이로 빠져나간 도라익은 공을 따라잡은 후 오른발로 힐킥을 했다. 왼발 아웃사이드로 밀거나 오른발 인사이드로 강하게 차면 되는 공인데, 도라익은 굳이 멋을 부렸다.
'뭐지? 이 기분은?'
심장이 거세게 펌프질했다. 그러나 흥분한 몸은 더 많은 피를 달라고 보챘다. 하늘의 색이 아까와 다르게 보이고 관객석에서 외치는 소리도 먼 듯 가깝게 들렸다.
'뭘 해도 될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어느새 달려온 산체스가 높이 점프하여 도라익한테 안겼다. 산체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넘어진 도라익 위에 스토크시티 선수들이 탑을 쌓았다.
멀리서 교체된 제임스가 발을 동동 구르며 탑 쌓기에 동참하지 못한 걸 아쉬워했다.
- 도라익 선수 유로파리그 데뷔전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했습니다.
- 지난 시즌 38라운드 제임스의 패스를 받아 넣은 골이 올해 푸스카스 유력 후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 속도와 기술 그리고 힘의 완벽한 결합. 거기에 상대를 손바닥에 올려놓은 듯한 리듬 변환.
- 퍼포먼스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기술적으로도 아주 가치가 높은 골이었습니다. 백 년이 넘은 현대축구 역사에서도 이런 골이 가능한 선수는 많지 않습니다.
후반 72분. 도라익이 교체되었다.
그라운드를 내려가는 도라익을 향해 홈팬들마저 기립 박수를 보냈다.
- 작가의말
띠링!
플레이어 도라익 님이 ‘신의 영역’을 엿봤습니다.
사전에 허락을 받지 않았기에, 님은 엿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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