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팀 경기
3월 21일.
인천국제공항.
함성이 터졌다. 우쭐한 기색이 역력한 여우가 모습을 드러낸 탓이다.
그리고 곧 범이 등장했다. 관심을 받고 기분이 구름 위로 뜬 여우와 달리, 아직 앳된 범은 뜻밖의 환영 인파에 제대로 놀란 얼굴이었다.
"도라익 선수, 팬입니다."
제복을 빳빳하게 다려입은 경호원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팬들이 좋은 마음으로 몰려왔습니다. 사고 없이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도록 도라익 선수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지금처럼 차분한 모습을 유지하시고, 팬들이 뭔가 하더라도 강한 리액션을 보이지 마세요. 흥분하여 집단으로 이성을 잃으면 아무리 국가대표라도 위험합니다."
"저, 형님. 기자회견 준비 안 했나요?"
오창범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기자회견은 서울의 호텔에 잡아뒀다고 전달받았습니다."
"저기요. 그런데 왜 저한테도 경호원 붙이나요? 솔직히 전 관심 밖일 텐데."
"예전에 이혁신 선수한테 그랬던 것처럼 도라익 선수 볼을 꼬집기라도 하면 큰일 나니깐요."
오창범에게 붙인 둘은 경호가 아닌 감시역이었다.
"길을 내기 쉽지 않습니다."
도라익과 대화하던 경호원의 무전기로 말이 들려왔다. 기자와 유튜버만 해도 2백 명 정도 몰려왔고 그냥 팬도 2천 명이 훌쩍 넘었다.
"도라익 선수. 차분하게 팬들한테 몇 마디 해주세요. 이대로는 오늘 안에 공항을 못 벗어날지도 모릅니다."
도라익은 심호흡으로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인터넷을 자주 안 하는 바람에 자신이 큰 사랑을 받고 있음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훅 치고 들어온 감동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무선 마이큽니다."
도라익은 경호원이 건네주는 마이크를 받아 입에 댔다. 사람들이 환호를 멈추고 도라익에게 집중했다.
"안녕하세요. 축구 선수 도라익입니다."
말을 마친 도라익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일부 팬이 환호를 질렀다.
"처음 느끼는 과분한 사랑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응원과 사랑을 받기에 제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나 반성합니다."
"어머, 어쩜 말도 잘해."
아마 도라익이 방귀를 뀌었어도 소화기관이 건강하다고 환호했을 팬들이다.
"저는 태극 마크를 가슴에 달고 국가의 명예를 지키러 왔습니다. 곧 23일이면 첫 경기가 있습니다. 컨디션 조절이 시급한 관계로 어서 이동했으면 합니다. 팬 여러분과는 여름에 꼭 좋은 자리를 마련해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다행히 오랜 팬질로 대한민국의 팬 문화는 세계에서도 선진국 반열에 들었다. 철없고 이기적인 팬이 없는 건 아니지만, 공식 팬카페 '스또라이커' 회원들의 주도하에 공항 밖으로 향하는 길을 텄다.
도라익은 경호원의 조언대로 차분하게 걸어서 나갔다. 축협에서 보낸 밴이 밖에서 시동을 건 채 기다리고 있었다.
"뭐 개선장군 맞이하는 거 같네."
도라익과 함께 밴에 탄 오창범이 뒤돌아보며 감탄했다. 기자와 유튜버는 물론, 일부 팬들도 밴 뒤를 따르며 긴 줄을 세웠다. 시야가 닿는 곳까지만 세도 최소 300대는 넘어 보였다.
"도라익 선수, 도착하고 사인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운전하는 아저씨가 수줍게 질문했다.
"아무렴요. 그런데 제 사인은 필요 없어요?"
오창범이 나섰다.
"당연히 필요하죠. 한국인이라면 원 플러스 원 싫어하는 사람 없죠."
"젠장. 나도 잘생기게 태어났어야 하는데."
플러스 원이 투덜거렸다.
###
3월 23일.
대전 월드컵경기장.
- 안녕하세요. 국민 해설 강철민입니다.
- 그냥 박만호입니다.
- 명언 제조기 도라익 선수가 이틀 전에 또 한 건 했죠.
- 팀 없이 선수 없습니다. 저보다는 대표팀을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 캬. 저 멘트를 안주 삼아 제가 소주 세 병 마셨는데 안 취하더군요.
홈에서 쿠웨이트를 맞이하는 대전 월드컵경기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 경기 시작 전에 시상식이 있다고 하네요.
- 2031년 한국 최우수 선수와 AFC 올해의 선수상을 직접 발급합니다.
- 발표 당시 놀랍게도 화제가 안 됐었죠?
- 너무 당연한 일이어서 기사가 잔뜩 나왔으나 별 반향은 없었습니다.
푸스카스상 받을 때 '골든 보이? 그건 뭔가요?' 사건 때문에 묻힌 감이 좀 있었다.
- 오늘 한국팀 플레이어 에스코트를 맡은 어린이들 전부 도라익 선수의 기부로 혜택을 입은 소아암 완치 어린이라고 합니다.
- 제 아들이 딱 도라익 선수 절반만큼만 훌륭하게 자라주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 제가 점쟁이는 아니라서 강 해설 소원이 이뤄질지 모르겠습니다만, 최소 아버지보다는 훌륭한 어른이 될 겁니다.
팬들이 내는 소리는 제멋대로 섞여서 의미가 사라지며 소음이 되었다.
"겁먹지 마. 우리 편이고 다 좋은 사람이야."
도라익이 겁에 잔뜩 질려서 다리를 부둥켜안은 꼬마를 다독였다. 동생이 많은 덕분에 아이 달래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아저씨 고마워요. 엄마가 이 말을 꼭 하라고 했는데 아까 까먹었어요."
사실은 키와 비교해 덩치가 커 보이는 도라익에게 겁을 먹고 말을 못 건넨 거였다.
"아저씨 아니고 형이야. 그리고 내가 더 고마워. 건강하게 훌륭한 어른이 되어주렴."
곧 양 팀 선수들의 축하를 받으며 시상식을 진행했다. 도라익은 자신한테서 떨어지기 싫어하는 꼬마를 안은 채 상을 받았다.
시상식이 끝나고 퇴장해야 하는 꼬마가 울며 들러붙는 바람에 잠깐 애를 먹었다. 다행히 아직은 무엇보다 사탕이 더 좋은 나이여서 잘 구슬려 들여보냈다.
- 쿠웨이트 하면 대부분 이라크랑 벌인 석유 전쟁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저는 침대 축구가 생각납니다.
- 침대 축구의 원조 격이죠. 날씨가 더운 곳이어서 그런다고 하는데, 오늘 날씨는 16도로 꽤 쌀쌀합니다.
한국팀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쿠웨이트 선수들은 바로 라인을 내려 도라익의 기습에 대비했다.
- 한국팀은 4-3-3 포메이션입니다. 소속팀에서 왼쪽 윙을 뛰는 이혁신 선수가 오른쪽 윙에 간 게 조금 특이하죠.
- 며칠 전 갓 데뷔전을 치른 오창범 선수가 오른쪽 풀백으로 출전했습니다. 둘 다 공격 성향이 강한 선수여서 오늘은 주로 오른쪽을 두드릴 것 같네요.
- 도라익 선수 공을 잡고 여유롭게 몸을 돌립니다.
- 건설 현장에서 집을 만들다가 애들이랑 소꿉장난하는 기분 아닐까요?
- 그럼요. 맨유 상대로 멀티 골을 2번이나 뽑은 선수라면 그런 느낌이 없잖아 있지 않겠습니까?
- 박 해설이 웬일로 맞장구를 칩니까?
- 오늘은 왠지 기분이 좋아서요.
박만호의 가계를 통틀어 무당은 없지만, 기분 좋은 예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 패스를 주고받던 도라익 선수가 갑자기 드리블합니다.
- 리듬이 빨라요. 패스 리듬보다 빨라요.
쿠웨이트는 느린 리듬을 원했다. 도라익은 다른 선수들과 느린 패스를 주고받으며 쿠웨이트의 리듬에 맞춘 다음, 갑자기 기어를 올려 폭주했다.
수비수 세 명이 어어 하는 사이에 제쳐졌다. 엄격히 판정하자면, 그저 방향 전환과 빠른 속도로 이룬 기술 함량이 낮은 성과다.
- 도라익 선수 슛!
- 아닙니다. 패스입니다.
- 골! 이혁신 골입니다.
- 도라익 선수 페이크 슛이었습니다.
수비수 세 명을 제친 도라익이 슈팅 자세를 취했다. 간단히 키퍼와 수비수 두 명의 주의를 끈 도라익은 슛 대신 느린 패스를 반대편 포스트로 보냈다.
몸싸움은 별로지만 순발력이 좋은 이혁신이 어느새 먼 포스트에 나타나 가슴 트래핑으로 득점에 성공했다.
- 도라익 선수 혼자서 수비수 세 명을 제친 다음 키퍼와 수비수 두 명을 유인했습니다.
수비에 가담하지 않은 공격수까지 빼면 남은 선수는 넷밖에 없다. 팀 절반이 도라익에 휘둘리며 생긴 커다란 공간을 남은 넷이 모두 메꿀 순 없었다.
- 도라익 선수는 마법사 같습니다.
- 방금 움직임이 뭔가 몽환적이긴 했습니다.
- 그게 아니라 푹신한 침대를 가시로 바꾸는 마법을 익힌 것 같습니다.
현재 한국은 4승 2패로 12점이다. 9점인 쿠웨이트와 7점인 레바논이 각각 홈에서 한국팀으로부터 3점씩 도둑질했다.
쿠웨이트는 침대 축구를 일관하여 경기 리듬을 망치는 방식으로 이득을 취했고 레바논은 호텔에서 2시간 거리의 훈련장을 한국팀에 배정했다.
그런 쿠웨이트가 경기를 시작하고 채 2분도 안 되어 실점하자 뼈다귀를 본 똥개처럼 흥분해서 날뛰었다.
- 도라익 선수 노련합니다.
- 공을 잡고 공격에 급급해하지 않고 쿠웨이트 선수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 다음 뒤로 돌립니다.
- 속된 말로 '똥개 훈련'이라고 하죠.
- 공이 한국팀 진영으로 돌아갔습니다. 쿠웨이트 선수들이 어쩔 수 없이 라인을 올립니다.
살다 보면 알면서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금 쿠웨이트가 바로 그 심정이었다.
경기 시작부터 한 골 먹은 바람에 빨리 만회 골을 넣어야 기세가 살아난다. 그런데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를 막는 데 필요한 공은 한국팀 발밑에 있다. 그것도 자신들이 나가면 앞으로 보내고, 돌아오면 다시 뒤로 넘긴다.
- 유럽에서 뛸 때는 몰랐는데, 도라익 선수 전술 이해가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 언론에서 도라익 선수의 전술 이해가 부족하다고 자주 언급해서 선입견이 생긴 게 아닐까요?
- 처음엔 확실히 대표팀에 차출되기에 부족한 모습이었고, 프리미어리그에서 주전으로 뛰기에 부족한 모습이었으며, 팀의 주장으로서도 부족한 모습이었습니다.
- 그게 이젠 옛말이 되고 있죠. 고작 1년 3개월 지났는데 말입니다.
- 작가의말
침대가 과학인지는 아직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했지만, 침대 축구를 깨는 특효약이 선제골임은 전 세계 과학자가 모두 동의하는 바입니다.
Commen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