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의 귀재
"도우가 이적하지 않을 거란 얘길 전하러 여기까지 온 겁니까?"
도르트문트 직원은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냥 전화로 해도 되는데 굳이 독일까지 와서 이러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뿐이 아닙니다. 도우한테 오퍼를 넣었던 구단 모두 직접 대면해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게 맞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서요."
상투적인 대화를 조금 더 나눈 최경호는 정중한 작별 인사와 함께 독일을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거기엔 마지막 구단 파리 생제르맹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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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우의 에이전트가 직접 구단을 찾아가 이적하지 않을 거라고 얘기하고 다닌다고?"
사무실의 침대도 과학적인 디자인으로 매우 포근하다. 그러나 굳이 home과 room의 구분을 짓는 이유가 있듯이, 집이라는 공간과 달리 심적인 안정을 주는 데 부족함이 있다.
그래선지 구단주의 얼굴은 살짝 푸석한 느낌이었다.
"그렇습니다.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고 해서 관심을 두지 않은 탓에 소식이 조금 늦었습니다."
최경호가 고작 이틀 만에 스페인과 독일 그리고 프랑스까지 쓸고 다닌 이유도 컸다.
그때 에릭의 전화기가 부르르 떨렸다. 잽싸게 전화기를 꺼내 화면을 훑은 에릭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미스터 최가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지금 1층 로비에 있답니다."
"들여보내."
구단주는 식은 홍차를 덥히며 최경호를 기다렸다. 그러나 평온한 얼굴과 달리 모든 뇌세포에 채찍을 휘두르며 머리를 굴렸다.
'무슨 꿍꿍이지?'
차라리 최경호 대신 보아스라면 고민하지 않았을 거다. 보아스라면 원하는 게 더 많은 돈일 테고, 목적이 명확하면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하는 것도 상대적으로 쉽다.
'더 좋은 대우를 받으려고 이적하는 척하는 게 보통 수법인데. 협상 전에 이적 안 한다고 못 박는 건 또 무슨 경우지? 에이전트가 선수 못지않은 사이코라더니.'
그러나 최경호가 들어오는 순간, 구단주는 잡생각을 모두 버려야 했다.
"오랜만입니다."
구단주를 본 최경호의 첫인사였다. 언뜻 평범한 인사 같지만, 구단주 귀엔 '우린 오랜 기간 안 본 서먹서먹한 사이니 친분 과시 이런 거 하지 맙시다'로 들렸다.
"도우가 이적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오랜 기간 고민하다가 스토크시티에 도움이 되는 제안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최경호는 구단주에게 고민할 시간을 길게 주지 않았다.
"재계약을 원합니다."
사실 재계약은 구단주가 바라마지 않는 일이다. 도라익이 스토크시티에서 1시즌 더 뛰면 계약이 1년 남는다. 그러면 대부분 구단은 굳이 높은 이적료를 주고 도라익을 영입하는 대신 좀 더 기다려서 계약이 반년 남은 겨울에 이적료 없이 도라익과 계약하길 원한다.
선수의 입장에서도 이적료 없이 계약하면 주급을 15만 파운드 정도 더 받을 수 있으니 절대 손해가 아니다.
"주급을 얼마까지 줄 수 있습니까?"
'코가 꿰었구나.'
자신이 원하는 걸 감추고 상대가 원하는 걸 들춰서 테이블에 올리는 게 협상의 기본이다. 최경호는 처음부터 구단주가 먼저 요구해야 할 재계약을 들먹이며 주도권을 잡아버렸다. 거기에 구단주는 아직도 최경호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모르고 있기에 완전히 페이스가 말렸다.
"팀의 사정을 미스터 최도 다 알 테니."
"그럼요. 그러니까 아는 사정 다 생략하고 얼마까지 줄 겁니까?"
재계약을 안 하면 스토크시티는 다음 여름에 도라익을 반드시 팔아야 한다. 상대가 원해서 파는 거랑 내가 팔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파는 거랑 어느 쪽이 더 높은 가격을 받을지는 교육 수준이 유치원만 돼도 판단이 쉽다.
'12만 파운드를 주면 바이아웃은 5천만 파운드가 최대치. 15만이면 7천만 파운드. 20만이면 9천만 파운드.'
물론, 구단주가 말한 수치는 최대치다. 다른 부분에서 대우를 높이지 않으면 최대치 금액을 받아내지 못한다.
문제는 이거다. 현재 팀의 최고 주급은 찰리의 12만 파운드다. 다른 선수들의 주급도 최고 주급에 맞춰져 있다. 그런데 갑자기 도라익에게 15만 파운드나 20만 파운드를 주면 팀의 주급 체계가 깨진다.
계약을 새로 협상하는 선수들은 최고 주급에 맞춰 자신의 주급을 요구할 거고, 새로 영입하는 선수들 역시 최고 주급을 기준점으로 자신이 받아야 할 주급을 가늠한다.
게다가 12만 파운드를 받는 찰리가 구단에 불만을 가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구단주가 예전에도 말했듯이, 주급은 프로에게 그저 돈이 아니라 자존심이기도 하다.
"제 질문이 어려웠나 보군요. 그럼 다르게 묻죠. 찰리보다 더 줄 수 있습니까?"
최경호는 구단주에게 생각할 시간을 안 주고 몰아붙였다.
"이번 것도 좀 어려운 질문이군."
"그럼 주급 문제는 잠시 내려놓고, 바이아웃은 얼마까지 생각합니까?"
구단주는 홍차를 후후 불며 시간을 끌었다. 주급은 높이 줄 수 없으나 바이아웃은 높이 설정하고 싶은 구단주의 마음이 차근차근 그러나 난폭하게 공략당하고 있다.
이대로는 철저히 함락당해 상대가 원하는 대로 협상이 마무리된다.
"나는 바이아웃이 없었으면 하네."
궁지에 몰린 구단주는 정공이 아닌 기습을 택했다. 말하는 본인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듣는 상대는 얼마나 황당할까? 이러면 상대한테 조금 얕보일 수 있지만, 상대 페이스대로 흐르는 협상 국면을 흔들어 자신이 원하는 흐름으로 가져갈 기회가 생긴다.
"괜찮은 아이디어입니다."
그런데 최경호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입가에 살며시 걸린 미소는 마치 이 말만 기다렸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뭐지? 이 사이코의 머리를 해부하면 뇌 의학이 수십 년의 발전을 가져올지도 모르겠군.'
황당한 나머지 구단주의 주의력은 협상이 아닌 최경호에게 넘어갔다.
"원하는 조건입니다."
최경호는 미리 준비한 서류를 꺼내 테이블에 올린 후 구단주 쪽으로 쭉 밀었다. 그 모습은 마치 포커 결승 마지막 판에 로열 스트레이트 플러쉬를 잡은 갬블러 같았다.
"계약 기간 3년. 주급 12만 파운드. 계약금 4천만 파운드."
12만 주급이면 1년에 약 624만 파운드다. 3년이면 1872만 파운드. 거기에 4천만을 더한 다음 주급으로 환산하면 37.64만 파운드.
그러나 바이아웃을 없앤다는 조항을 생각하면 또 많은 돈은 아니다.
"3천은 어떤가? 팀의 사정이야 내가 구구절절 이야기 안 해도 잘 알 텐데."
스토크시티의 재정은 절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단번에 4천만 파운드의 거금을 도라익 한 명에게 쓸 정도로 여유 있지도 않다.
"그럼 이렇게 하죠. 계약금을 3천으로 하고, 스토크시티와 도우의 이름으로 보육원을 비롯한 지역의 사회복지 시설에 천만 파운드를 기부하는 겁니다."
기부하면 구단 이미지가 좋아질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세금 면제의 혜택도 받을 수 있다. 숨 두 번 쉬고 눈 몇 번 깜빡이는 사이에 계산을 끝낸 구단주는 이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려고 구단을 돌아다니며 이적 안 한다고 통보했던 거구나.'
최경호는 이적 안 한다는 확실한 메시지를 구단주에게 전달했다. 이는 얼핏 최경호가 배수진을 친 것처럼 보이지만, 물러날 곳 없는 사람은 구단주다.
도라익은 올해 이적하든 다음 해에 이적하든 다다음 해에 이적하든 전혀 손해가 없다.
"좋네. 그 조건으로 계약하지."
구단주는 굳이 사족을 붙이지 않고 최경호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라익아. 올라와서 계약 체결해."
차에 앉아 기다리던 도라익이 최경호의 전화를 받고 올라와서 계약서의 남은 빈칸을 자기 이름으로 채웠다.
"도우. 그대를 잠시라도 더 소유할 수 있어서 영광일세."
"더 좋은 모습으로 스토크시티를 사랑하는 모두에게 보답하겠습니다."
계약을 마친 도라익과 최경호가 사무실을 떠났다. 구단주는 그제야 흠뻑 젖은 최경호의 등을 확인했다.
'당했는데 기분이 나쁘진 않군. 협상 참 잘하는 친구야.'
구단주는 도라익과 재계약했다는 소식을 언론에 전한 후 개운한 기분으로 50여 일 만에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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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어디 안 가? 이유가 뭐야?"
"이거 형만 알고 있어야 해."
"당연하지. 사건 터지기 전에 내가 어디 가서 네게 여자친구 있다는 얘길 하는 거 봤어?"
관종이긴 하지만, 그래도 선은 잘 지키는 오창범이다.
"감독님이 월드컵이 끝나면 협회에 가겠대. 그리고 다음 협회장 선거에 나갈 생각이래."
"그게 이적이랑 뭔 상관이야?"
"대표팀이 잘해야 감독님이 새 직장에서 어깨에 힘줄 수 있잖아."
"그건 그렇지."
"월드컵 가면 우린 약팀이야. 유럽 대부분 팀이 우리보다 강하고, 남미는 물론 북미도 이젠 무시할 수준이 아니고. 아프리카 팀들도 잘할 땐 진짜 잘하잖아."
"그래서?"
"강팀에 가기보단 스토크시티에 있는 게 월드컵을 뛰는 데 좋을 거 같아서 그래. 그리고 스토크시티엔 형도 있잖아."
오창범은 코를 찡그리며 쏟아지려는 눈물을 겨우 막았다.
"토미를 고명준 선배로 생각하고, 미켈을 김춘호 선배로 생각하고. 산체스는 혁신이 형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형하고 나까지 있으니 이게 대표팀이잖아."
감동으로 고였던 눈물이 도로 쏙 들어갔다.
"그러니까 스토크시티에 남은 이유가 월드컵 준비 때문이라는 거지?"
"맨유, 맨시티, 리버풀, 첼시, 아스널, 에버턴, 토트넘. 이렇게 많은 강팀이 있는 리그를 왜 떠나."
"라익아. 좀 듣기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어차피 감독님이랑 넌 남남이야. 굳이 감독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감독님이 선수 양성을 위해 협회로 간다고 했어. 이건 대한민국 축구를 위한 일이고, 결국엔 대한민국을 위한 일이야. 내가 스토크시티에서 1년 더 뛴다고 뭐 인생 망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아직 알론소한테 배울 것도 많이 남았어."
누그러들었던 감동이 다시 치밀었다. 오창범은 전화기를 꺼내 도라익의 멋진 모습을 찍어 '대의를 위해 이적을 포기한 위대한 주장님'이라는 제목으로 sns에 올렸다.
└ 헐, 진짜 안 해?
└ F**k. 진짜 마드리드로 간다에 100유로 베팅했다.
└ 도우랑 토토 사이트 합작품이다. 토토 사이트에서 돈 주고 했다. 이적 포기.
└ 스토크시티 팬이다. 똥꼬 찢어졌다. 기뻐서.
번역기를 돌린 바람에 다소 문장이 이상하지만, 뜻을 이해하는 데는 별문제 없었다.
구단주의 발표나 언론의 보도에도 반신반의던 사람들이 오창범이 올린 제목과 사진만 있는 글로 도라익이 이적을 포기했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한글 맞춤법조차 가끔 틀리는 오창범이지만, 신용 면에서는 세계 어떤 언론보다 높았다.
- 작가의말
- 뭐? 부인이 사무실로 오고 있다고?
- 그렇습니다. 두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 좋아. 당장 집으로 가지.
“미스터 최. 당신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까 어서 사인이나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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