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슨의 모험
하프 타임. 스토크시티 대기실.
감독도 코치도 선수도 전부 굳은 얼굴이다. 도라익은 밖에서 워밍업을 하는 벤치 선수들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제임스. 오늘 왜 이리 흥분했어?"
침묵을 깬 윌슨의 지적에 제임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전반전 선취골의 주인공에 2번째 골을 획책한 장본인. 도라익과 더불어 전반전에 두 골이나 앞서게 한 최대 공신이다.
하지만.
2:0으로 앞선 상황에 다섯 번의 수비 실책을 범해 3실점을 유발한 죄인이기도 하다.
"요즘은 상담을 안 받나 보지?"
윌슨의 질책에 제임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제임스는 정신적으로 쉽게 흥분하는 경향이 있다. 증상이 뚜렷하지 않아 병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경기 시 심박이 100 이하로 절대 안 내려가는 축구선수로선 꽤 치명적인 결함이다.
약물치료를 받을 정도는 아니어서 매주 2번씩 심리 상담을 받는 거로 해결하기로 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최근 새 여자친구를 사귀며 치료를 등한시했다.
제임스는 도라익의 패스로 첫 골을 넣은 후부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했고, 아무리 침착하려고 해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덕분에 두 번째 골이 만들어지긴 했으나 연이은 실책으로 스코어가 뒤집혔다.
"캠벨. 체력은 어때?"
"10분이 한곕니다."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회복 능력의 하락은 어쩔 수 없다. 근력이나 테크닉의 퇴화는 과학적인 훈련으로 최대한 막을 수 있지만, 회복능력 저하는 신도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다.
"코치, 가서 리를 불러와."
리 그레고리는 미드필더다. 제임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못 했다. 채 1분도 안 되어 그레고리가 대기실로 들어왔다.
"리, 후반전 캠벨 대신 들어간다."
제임스가 푹 숙였던 고개를 쳐들었다.
"리는 제임스 자리로 가고, 제임스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뛴다."
어차피 캠벨을 반쯤 미드필더로 썼기에 큰 변화는 아니다.
"마무리는 도우한테 맡기고, 제임스는 수비와 공격 모두 신경 써."
윌슨은 교체에 따른 각 위치의 변화를 세세하게 지시했다. 어차피 도라익 빼고는 평소 훈련에서 숙지한 내용이라 다들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너무 큰 모험이다.'
수석 코치는 감독의 결정이 걱정되었다. 현재 전술에서 도라익의 슈팅 권한은 캠벨과 제임스와 인스 그리고 앨런 다음이다.
그런데 갑자기 도라익에게 마무리를 맡기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우. 경기 시작하면 이 위치로 가. 내가 땅볼로 여길 찌르면 그때 이렇게 달려가. 골키퍼가 왼쪽 손목을 살짝 다쳤어. 그러니 꼭 왼손 쪽을 노려."
제임스가 이를 갈며 말했다.
전반전의 흥분은 이미 사라지고 중대 실책을 다섯 번이나 저지른 자신한테 만회할 기회를 준 감독에게 꼭 보답하고 도라익이 골을 넣을 수 있게 돕겠다는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다.
고개를 끄덕인 도라익은 머릿속으로 제임스가 말한 상황을 상상했다. 세 센터백의 움직임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해야 하기에 여러 가지로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나 결론은 여전했다. 믿을 건 스피드밖에 없다.
- 후반전이 곧 시작합니다.
- 도라익 선수가 프리미어리그 최연소 도움과 최연소 득점 기록을 세웠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2:3으로 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 그나마 다행인 점은 도라익 선수는 0:3 상황도 겪어봤다는 것이죠.
- 그럼요. 0:3보다 2:3이 훨씬 희망적인 스코어 아니겠습니까.
두 해설은 억지로 텐션을 올렸다. 휴식 시간이 지나면 도라익이 교체되는 게 아닌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등 번호 18번을 보고 겨우 숨을 돌렸다.
2:0으로 앞선 뒤는 뉴캐슬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경기가 진행되었고, 제임스의 실책으로 골을 연속으로 3개 먹었다.
전반전이 조금만 길었으면 분명히 한 골 더 먹을 상황이었다.
그 과정에 도라익은 거의 한 일이 없었다. 속도로 공간을 만든 후 억지로 슈팅을 여럿 때렸지만, 너무 정직하여 키퍼 품에 들어가지 않으면 각도를 정교하게 노리려다가 어이없는 방향으로 날리곤 했다.
공격이든 수비든 팀에 섞이지 못한 모습을 여러 번 보여줘서 응원하는 사람들을 걱정케 했다.
- 후반전 시작입니다. 도라익 선수가 센터백에게 길게 패스한 후 앞으로 뜁니다. 스토크시티도 공을 돌리며 라인을 올립니다.
- 캠벨 대신 19번 리 그레고리 선수가 출전했는데요. 지금 위치로 보면 12번 제임스의 자리입니다.
- 윌슨 감독이 제임스를 공미 위치로 올렸군요. 저 자리에선 수비 실책을 범해도 팀에 덜 위협적이죠.
- 리 그레고리가 공을 뒤로 꺾은 후 제임스한테 패스합니다.
- 패스가 조금 느리네요. 후반전 선축으로 도라익 선수의 기습을 기대했습니다만, 윌슨 감독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군요.
- 공을 잡은 제임스가 옆으로 툭 칩니다.
- 스루패스!
- 도라익! 도라익이 공을 잡았습니다.
그레고리의 느릿한 패스를 받은 제임스 역시 느릿느릿 몸을 돌리며 왼쪽을 쳐다봤다. 팀의 2주장인 샘 클루카스가 손을 들어 공을 요구했다.
그때, 갑자기 방향을 꺾은 제임스가 두 센터백 사이로 공을 강하게 찔렀다. 동시에 3번과 중앙 센터백 사이에 자리를 잡았던 도라익이 사선으로 달렸다.
제임스의 혼을 불어넣은 패스는 정말 정확하게 도라익의 발밑에 안착했다. 도라익은 오른발을 휘둘러 슈팅 동작을 가져갔다. 키퍼는 당황하지 않고 발을 번갈아 구르며 낮은 슈팅에 대비했다.
낮은 공일 경우 손보다는 발로 막는 게 더 확실하다.
그러나 도라익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어 슈팅하지 않았다. 오른발로 툭 건드린 공은 왼발로 슈팅하기 좋은 위치로 갔다. 여기서 왼발 인사이드로 바나나킥을 차면 먼 포스트를 노리기 딱 좋다.
키퍼는 은밀하게 무게중심을 오른쪽으로 옮기며 높은 공에 대비했다. 땅볼이나 낮은 공이라면 이 위치에서 쉽게 막는다. 그러나 야신존을 노리는 높은 공이라면 팔로 꼭 막아낸다는 보장이 없다.
공의 궤적을 보고 판단하기엔 너무 가까운 거리인 탓이다. 그저 본능과 경험에 의지하여 팔을 휘둘러야 하는데, 데이터가 전혀 없는 선수여서 믿을 건 본능밖에 없다.
다행히 어느새 쫓아온 중앙수비수가 슬라이딩으로 땅볼 슈팅 경로를 봉쇄했다. 14번 유니폼을 입은 뉴캐슬의 왼쪽 센테백은 도라익의 오른쪽으로 달려가 드리블에 대비했다.
3번 센터백은 스토크시티 선수들의 위치를 확인하며 위협적인 패스 경로를 막았다.
그러나 도라익의 왼발 슈팅은 예상을 벗어나 가까운 포스트를 노렸다. 미처 중심 이동이 어려웠던 키퍼가 억지로 팔을 뻗어 손가락 끝으로 공을 건드렸지만, 도라익의 슈팅에 실린 힘이 너무 강했다.
전반전에 살짝 다친 손목이 결국 버티지 못한 채 꺾이면서 공은 골대에 강하게 처박혔다.
- 도라익 선수. 프리미어리그 최연소 멀티 골 기록을 세웁니다. 정식 경기에 데뷔한 지 이제 12일 되는 선수가 이룬 업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대단합니다.
- 원정 팬들한테 달려간 도라익 선수가 등을 보이면서 엄지로 자기 등 번호를 가리킵니다.
- 날 기억해라. 내가 너희 구세주다. 내가 이 팀을 구원하겠다.
- 강 해설은 요즘 너무 쉽게 흥분하는군요.
- 미안합니다. 노안이 와서 그런지 도라익 선수의 유니폼 등에 적힌 글자인 줄 알고 소리 내 읽었습니다.
최 PD는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선배한테 쌍 따봉을 날렸다. 저런 과격한 발언 때문에 징계위에 회부된 것만 해도 올해 3번이다. 아직 1월인 걸 생각하면 정말 기가 찰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고정 팬이 확고하여 대체자를 찾기도 어려운 해설자다.
'어차피 벌점으로 깎인 연말 상금은 시청률 보너스로 메꾸고도 남지.'
최 PD는 생중계가 끝나면 강 선배와 박만호한테 한우를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뉴캐슬은 바뀐 스토크시티의 포메이션에 바로 적응하지 못한 바람에 전반전 후반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게다가 제임스가 약 먹은 놈처럼 공격과 수비 양쪽에서 날뛰는 바람에 중원 장악이 훨씬 어려워졌다.
대신 오른쪽으로 간 리 그레고리가 공격에 거의 공헌이 없어 탄탄해진 수비에 비해 원정팀의 공격 루트가 단순했다.
- 아쉽습니다. 도라익 선수의 슛이 포스트에 맞고 골라인 밖으로 나갑니다.
- 벌써 열세 번째 슛입니다. 제가 사전에 공부한 바로는 스토크시티의 마무리는 센터 포워드와 양쪽 윙이 담당합니다. 바로 샘 앨런과 제임스 체스터 그리고 교체된 캠벨 선수입니다. 그런데 이 경기에선 도라익 선수가 거의 슈팅을 독점했습니다.
- 윌슨 감독이 12월에 취임했지만, 박싱데이가 껴서 팀 포메이션에 대대적인 개조를 할 수 없었지요. 도라익을 영입하면서 전술에 변화를 주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 지금 윌슨 감독이 도라익 선수를 마무리로 점지했다고 여겨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 아직은 아닙니다. 7득점의 찰리 아담 선수가 다음 경기면 복귀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신장이 198이나 되는 선수로, 캠벨처럼 수비 가담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만약 기존 전술로 돌아간다면 도라익 선수는 슈팅보다는 팀을 위한 희생 플레이에 집중해야 할 겁니다.
그때. 뉴캐슬 수미의 패스를 가로챈 제임스가 단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앞으로 패스했다.
- 도라익 선수 단독 찬스입니다.
도라익이 굴레를 벗은 야생마처럼 질주했다.
- 작가의말
뉴캐슬이여, 주인공의 철퇴를 받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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