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 세리머니
한국시간 10월 1일 새벽.
스토크시티 구단주는 물론 시장과 저명인사들이 구장을 방문했다.
"도우. 나 머리 괜찮아?"
도라익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꼭 잡은 잭이 질문했다.
유로파리그 예선전 첫 경기에서 플레이어 에스코트를 한 잭이 첫 정식 홈 경기에서 시축하기로 했다.
"응. 머리띠도 엄청 멋져."
잭은 머리를 자르는 걸 병적으로 싫어했다. 짧게 자르는 것뿐만 아니라 끝을 다듬는 것조차 거부해서 헤어 스타일이 제멋대로였다.
그래서 유니폼과 깔 맞춤한 하얀 줄과 빨간 줄이 엇갈린 머리띠로 단단히 묶어 고정했다.
밖에선 군악대가 한창 연주하고 있었다. 경기 시작 30분 전부터 온갖 행사로 유로파리그 진출을 축하했고 이젠 막바지에 이르렀다.
시축이 있기에 양 팀 선수들은 조금 일찍 입장했다.
- 도라익 선수가 주장 완장을 달고 동전을 고릅니다.
- 맨시티와 리버풀 상대로 동전 던지기 하는 영상이 각각 360만과 290만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 사실 그때만 해도 주장이 언제 다른 선수로 바뀔지 걱정이 컸습니다. 그러나 이젠 안심해도 좋습니다. 스토크시티 감독과 선수들이 도라익에게 보내는 신임이 정말 두텁습니다.
골대를 고르고 바로 시축이 있었다. 잭이 발갛게 상기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공을 찼다. 관객들이 세게 차라고 입을 모아 외치자 겁에 질린 잭이 도라익한테 쪼르르 달려갔다.
도라익은 잭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번쩍 든 다음 공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러곤 잭을 시계추처럼 흔들어 발로 공을 맞히게 했다.
관중들이 폭소를 터뜨렸고, 재밌는 놀이에 잭도 울먹이는 대신 깔깔 즐겁게 웃었다.
- 도라익 선수, 재치가 뛰어납니다.
시축이 끝나고 잭이 퇴장했다. 공이 다시 중앙에 놓이고 정식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 스토크시티의 전술은 상대적으로 약한 팀에 확실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 움츠리면 찰리 아담의 헤딩을 걱정해야 하고, 라인을 올리면 도라익의 침투가 두렵습니다.
- 가장 좋은 방법은 패스를 어렵게 하는 건데, 페어린던과 맥자넷 두 선수 다 괜찮은 개인 돌파 능력을 갖춘 빠른 선수입니다.
- 산체스와 루이스는 패스가 정확한 선수고요. 제임스 역시 언제 심장을 찌를지 모르는 비수를 감추고 있습니다.
- 제임스는 말벌 같은 선수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살면서 말벌에게 쏘일 걱정을 하는 사람은 얼마 없습니다. 그런데 쏘이면 진짜 아프거든요.
제임스는 공을 잡을 때마다 예의 주시해야 하는 선수는 아니다. 그러나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상황에도 치명적인 독침을 날릴 수 있는 선수여서 마냥 방치하기도 그렇다.
- 첫 라운드 경기에서 도라익이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스토크시티는 3:0 원정 승을 거뒀습니다. 반면 스파르타 프라하는 홈에서 팔레르모 상대로 난타전을 벌여 3:2로 승리했습니다.
- 3점 동점으로 조 1위와 2위를 차지한 팀끼리 벌이는 경기입니다. 이기는 팀은 6점으로 선두를 차지하여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합니다.
- 로잔 역시 ATM 취급하기엔 어느 정도 전투력을 보유했습니다. 다른 조와 비교하면 실력 격차가 상대적으로 작기에 오늘 경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너무 흥분하지 말자.'
도라익은 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로잔과 벌인 경기처럼 엄청난 컨디션을 보일 것 같았다.
그러나 6일에 프리미어리그 원정 경기가 하나 있기에 애써 억누르며 참았다. 어떻게든 지난 시즌 말미에 3경기 연속 훌륭한 모습을 보였던 때처럼 컨디션을 적절하게 조절해야 한다.
그러나 경험이 부족한 도라익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페어린던이 공을 잡자 도라익은 골 박스 안으로 달렸다. 거의 동시에 페어린던이 크로스를 올렸다.
키가 173이고 몸싸움이 약한 페어린던은 속도가 특기다. 왼발 기술도 나쁘지 않아 자주 인사이드로 컷 플레이를 하기에 수비하기 까다로운 선수다.
공을 잡으면 드리블을 하여 자신이 선호하는 위치에 가서 크로스를 올리기 일쑨데, 이번엔 딱 한 번 터치하고 바로 올렸다.
- 골입니다. 전반전 13분, 도라익 선수가 헤딩으로 선제골을 기록합니다.
- 지난 경기까지 페어린던 선수의 빠르고 낮은 크로스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방금은 완벽할 정도로 정확한 타이밍에 헤딩했죠.
- 도라익 선수가 페어린던 선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좌우로 흔듭니다.
- 아까 잭에게 했던 장난이군요. 관중들도 즐겁게 웃습니다.
세리머니를 마치고 돌아갈 때, 맥자넷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도우. 내 크로스로 골 넣으면 나도 저거 해줘."
"넌 너무 큰데?"
맥자넷은 도라익보다 1cm 큰 186의 키를 자랑한다. 몸매가 호리호리한 편이어서 무게는 도라익보다 덜 나가지만, 겨드랑이를 잡고 흔들기엔 조금 부담된다.
"소원이야. 한 번만 해줘."
"알았어."
경기가 재개되자 스파르타가 라인을 크게 올렸다. 도라익의 속도만 경계하기엔 찰리와 도라익의 공중볼 우위가 너무 명확했다. 차라리 라인을 올리고 운에 맡기는 게 낫다는 생각에 실점 직후 바로 공격적으로 태세를 바꿨다.
스토크시티는 라인을 대폭 올린 상대에 맞서 물러나지 않았다. 수비선을 페널티 박스 밖에 두고 안으로 찌르는 스루패스는 미켈에게 처리를 맡겼다.
그렇게 대부분 선수가 30미터 정도 넓이의 구역에 몰리자 공 다툼이 치열해졌다. 그리고 난전의 귀재 제임스가 슬슬 진가를 발휘했다.
다섯 선수가 차지하려고 싸우던 공이 흘러나오자 누구보다 빨리 달려간 제임스가 잡았다. 제임스가 공을 잡자 도라익은 바로 몸을 돌려 달렸다.
속도가 느린 찰리는 달리는 대신 오른쪽으로 빠지며 패스를 받아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제임스의 패스는 찰리나 도라익 대신 맥자넷을 찾았다. 제임스가 공을 잡자마자 라인을 타고 달린 맥자넷이 공을 잡았을 때 주위 10미터에 아무도 없었다.
- 맥자넷 선수가 얼리 크로스를 올립니다.
- 도라익 선수 날았습니다.
맥자넷의 크로스는 조금 깊었다. 그러나 컨디션이 최상인 도라익은 빠르게 판단하고 힘껏 점프했다.
새처럼 허공을 난 도라익은 정확히 이마로 맥자넷이 올린 공을 맞혔다. 고운 포물선을 그린 공은 각을 좁히러 나온 키퍼의 머리를 넘어 골대 가운데로 들어갔다.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로빙슛이었다.
- 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스페인 상대로 반 페르시가 넣은 골과 비슷합니다.
- 난이도를 보면 그때와 비슷하지만, 도라익 선수의 점프가 훨씬 멀고 높았습니다.
- 올림픽위원회를 찾아가 제자리 멀리 뛰기를 정식 종목으로 넣어달라고 건의할 만하네요.
- 건의가 채택되면 대한민국이 메달 하나는 공짜로 먹는 셈인가요?
- 아, 뭔가요? 도라익 선수한테 달려간 맥자넷 선수가 양팔을 펴고 돌아섭니다.
- 도라익 선수가 맥자넷 선수를 번쩍 들고 흔듭니다.
- 저 얼굴 보세요. 명절 마지막 날 술에 찌든 삼촌이 함께 놀아달라는 조카를 바라보는 그 얼굴이에요.
2번째 실점을 한 스파르타는 수비 라인을 적절하게 내렸다. 좁은 공간에서 경합하면 자신들이 열세라는 것도 확인했고, 도라익의 스피드가 영상으로 볼 때보다 훨씬 위협적임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 맥자넷 선수 오늘 컨디션이 좋습니다. 풀백에 이어 상대 센터백도 제쳤습니다.
- 아, 크로스입니다.
슛하기 좋은 위치에서 맥자넷은 크로스를 올렸다. 양발이 다 괜찮은 페어린던과 달리 맥자넷은 오른발이 서투르다.
- 찰리 선수가 헤딩으로 백 패스합니다.
- 힐킥! 도라익 힐킥! 골입니다!
오른발로 슈팅하면 참 위협적일 것 같은 공을 맥자넷이 왼발로 크로스를 올렸다. 찰리 아담은 조금 느린 크로스를 슈팅하지 않고 뒤로 보냈다.
원래는 제임스가 있어야 할 자리인데 텅 비었다. 그때 도라익이 재빨리 달려가 몸을 돌리지도 않고 힐킥으로 슈팅했다.
골이 들어가자 찰리는 도라익 앞으로 가서 등을 보이고 서서 양팔을 벌렸다.
'뭐 하는 짓이야?'
'그거.'
도라익은 고개를 돌린 찰리와 눈으로 대화했다.
- 도라익 선수 울기 직전입니다.
- 찰리 아담 선수는 체중이 100킬로그램이 넘거든요.
- 도라익 선수도 들어 올리기만 하고 흔들지는 못하는 모습입니다.
- 맥자넷 선수가 돕네요. 맥자넷 선수가 흔드는 걸 돕습니다.
- 이런 게 바로 팀워크죠.
3:0으로 전반전을 상쾌하게 끝낸 스토크시티의 라커룸은 즐거움이 가득했다.
도라익만 빼고.
"감독님. 교체 요청합니다."
"노파심에 묻는 건데, 다치거나 한 건 아니지?"
"컨디션이 너무 좋아서요. 더 뛰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윌슨이 고개를 끄덕이자 선수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다른 선수가 펼쳐도 되는 세리머니지만, 도라익이 하는 것만큼 즐거울 것 같지 않았다.
"내친김에 제임스 너도 후반전엔 쉬어. 코치는 가서 우디르와 토미를 불러오게."
스토크시티는 후반전에도 압도적인 경기를 펼쳤다. 그러나 아쉽게도 골은 더 나지 않았다.
'도우가 알고 한 걸까?'
스토크시티는 전반전에 지난 시즌 리그컵 결승과 같은 팀 컨디션을 보였다. 팀 전체가 도라익의 리듬을 따라간 덕분이다.
그러나 이대로면 팀 리듬이 깨져서 6일 원정 경기를 질 가능성이 크다. 윌슨은 후반 50분 즈음에 팀의 리듬을 가속하는 도라익을 교체하려고 했는데 본인이 먼저 요구했다.
'알고 한 거라고 해도 놀랍지만, 본능적으로 느낀 거면 진짜 대단한 선수가 될 것 같아.'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온 윌슨 감독은 착각의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
- 작가의말
도라익 : 이대로면 다음 경기에 컨디션이 엉망이겠는데. 이제 그만 뛰어야지.
윌슨 : 팀을 위해 희생하다니. 어린 나이에도 생각이 참 깊군.
Comment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