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파리그 원정 경기
9월 18일.
스토크시티는 원정에서 스위스 슈퍼리그의 FC 로잔과 대결하기 위해 하루 일찍 스위스 로잔에 도착했다.
같은 조의 남은 두 팀은 각각 체코 리그의 전통 강자 스파르타 프라하와 세리에 A의 팔레르모가 있다.
스파르타 프라하와 FC 로잔은 객관적으로 스토크시티의 적수가 아니다. 그리고 세리에 A 소속인 팔레르모 역시 크게 걱정할 상대는 아니었다.
지난 시즌 좋은 성적을 거두긴 했으나 팀의 주전 몇 명을 세리에 A의 강팀들에 털렸다.
나름대로 스쿼드를 보강하긴 했지만, 현재 세리에 A에서 겨우 14위를 달리고 있는 걸 보면 전력 보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 같다.
"도우, 나 우울증 걸린 것 같아."
제임스가 멋대로 지껄였다.
"왜?"
"훈련과 경기 그리고 전술 공부. 내 생활에 축구밖에 없는 것 같아."
제임스의 말이 도라익의 속을 훅 건드렸다. 사실 도라익 역시 꽤 지쳐 있었다. 아무리 어른스럽게 굴려고 해도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16살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최경호가 축구에만 전념하게 식사, 청소, 빨래 등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지만, 도라익이 필요한 건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래서 원정 경기, 특히 유로파리그 원정 경기가 기대됐어."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여기 유명한 휴양지야. 구경 좀 해야 하지 않을까?"
도라익은 유선 전화를 들어 감독 방에 전화했다.
- 감독님, 잠깐 관광해도 될까요?
- 저녁 시간에 맞춰 돌아오기만 하면 돼.
도라익은 곧 단체 메시지를 날려 관광 원정대를 소집했다.
"도우. 내일 오후에 경기 끝나고 관광하는 게 좋지 않을까?"
우디르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부끄럼쟁이 산체스와 마찬가지로, 우디르 역시 대부분 제멋대로인 아프리카 선수들과 달리 자율적인 괴짜다.
"그럼 넌 빠져."
"아니야. 그냥 물어본 거야."
제임스가 빠지라고 하자 우디르는 금세 말을 바꿨다.
총 9명으로 구성된 관광 원정대는 호텔에서 렌터카를 3대 빌렸다. 전기로 움직이는 렌터카는 최고 시속이 40km로 제한되었지만, 길을 재촉하는 게 아니라 휴양지를 둘러보려는 사람들한텐 넉넉했다.
다행히 면허가 없는 사람은 도라익과 우디르 그리고 토미밖에 없어서 운전자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진짜 멋지다."
토미가 16세기에 지어진 성당을 보며 감탄했다. 500년도 더 전에 지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비율로 튼튼하게 지어진 대성당은 도라익한테도 큰 충격이었다.
"저기가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있는 곳이래."
프랑스어를 읽을 줄 아는 우디르가 간판을 보며 말했다. 제네바 호수 북쪽에 자리한 로잔은 프랑스어권에 속해 표지가 프랑스어로 적혔다.
"가보자."
일행은 렌터카를 몰아 국제올림픽위원회 건물로 갔다. 차에서 내린 도라익이 건물로 들어가자 호기심이 인 다른 선수들도 따라 들어갔다.
"저기요. 건의 사항이 있는데 어느 부서를 찾아가면 되죠?"
"어떤 건의 사항인지 말씀하시면 해당 부서에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올림픽에 제자리 멀리 뛰기 항목을 추가하면 안 될까요?"
제임스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우디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다른 선수들도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터지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그건 개인이 건의할 사항이 아닙니다. 올림픽 주최국에서 제안한 다음 투표로 결정합니다."
"올림픽 주최국이 어디죠?"
"어느 올림픽에 참가하려는 건가요?"
폭소가 터졌다. 도라익의 장난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억지로 웃음을 참던 선수들이 한 치 의심의 여지도 없이 진심임을 느끼고 폭발했다.
"도우, 너 진심이었어?"
남들보다 먼저 웃고 더 격렬하게 웃은 덕분에 가장 먼저 폭소를 멈춘 제임스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질문했다.
"응. 올림픽 금메달 따면 우리나라에서 평생 연금이 나오거든."
접수원은 유전적 원인으로 잘 웃지 못했다. 질병이라고 하기까진 좀 그렇지만, 개그 프로는 물론 정치 뉴스를 보고도 아무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이 특별한 날, 접수원은 처음으로 눈물이 나오도록 웃는 생소한 경험을 통해 웃음의 즐거움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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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어제 그건 다 여러분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함이었다."
도라익의 기행은 어제 늦은 밤 스토크시티 지역 인터넷 신문사에서 속보로 보도되었고, 고작 20분 만에 대한민국 포털 메인에 걸렸다.
아침에 기사 댓글들을 읽은 도라익은 그제야 자신이 어제 한 일이 부끄러운 짓임을 깨닫고 구차하게 변명했다.
"내 숭고한 희생으로 오늘 여러분의 컨디션이 최상일 거라고 믿는다."
도라익은 모든 사람이 웃는 듯 마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아 경기가 빨리 시작했으면 바랐다.
- 오늘 도라익 선수 컨디션이 좋아 보입니다.
- 아침부터 국민들한테 큰 웃음을 선사했는데요. 오늘 경기에서 활약하여 더 큰 기쁨을 줬으면 좋겠습니다.
이탈리아가 카테나치오로 유명하긴 하지만, 빗장 수비의 원조는 스위스였다.
지단의 아들이 선수로 뛰었던 덕분에 유명해진 FC 로잔은 스토크시티 상대로 빗장을 단단히 잠갔다.
그리스와 더불어 제공권과 몸싸움이 좋고 끈질기기까지 한 수비수를 많이 내는 스위스답게 찰리 아담은 경기가 시작하고 15분이나 되었는데도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상대는 세 센터백뿐이 아니라 두 수미마저 번갈아 가며 반칙으로 찰리 아담을 괴롭혔다. 같은 선수가 자주 반칙하면 주심이 카드라도 꺼내겠는데, 여러 선수가 돌아가며 하는 바람에 경고조차 나오지 않았다.
"스리백은 조금 낭비인 것 같습니다."
수석 코치가 윌슨에게 말했다.
"오늘 경기는 그렇겠지. 그러나 선수들이 빨리 적응하려면 모든 경기에서 스리백을 사용해야 해. 조금 변형할지언정 포백으로 돌아가는 건 절대 안 돼."
키가 작은 센터백인 타이먼마저 속도가 느리기에 레체르트가 공격에 가담하지 못했다. 리엄과 타이먼 모두 공격적 재능이 거의 없어서 세 명의 수비수 모두 수비에만 전념하고 있다.
대신 미드필더에 제임스와 토미 그리고 산체스를 출전하여 최대한 공격적인 태세를 갖췄다.
"전술 바꾸라고 해."
윌슨의 말에 수석 코치가 고함을 치며 손으로 신호를 줬다. 수석 코치의 신호를 본 도라익이 손뼉을 치며 미리 약속한 말로 지시를 내렸다.
- 공이 중앙에서 돌기 시작합니다.
측면 크로스 위주로 경기를 펼치던 스토크시티가 패스워크로 공을 중앙에 잡아뒀다. 윙백인 페어린던과 맥자넷도 측면을 버리고 안으로 좁혀 패스에 참여했다.
로잔은 스토크시티가 측면에서 공격할 땐 어느 정도 라인을 올렸지만, 스토크시티가 패스로 수비를 허물려 하자 바로 라인을 내렸다.
크로스를 수비할 땐 헤딩 선수가 골대와 조금이라도 멀도록 라인을 올리는 게 좋지만, 지면으로 공격할 때는 라인을 내려 침투할 공간을 줄이는 게 좋다.
그러나 갑자기 라인을 내린 로잔의 수비진은 촘촘하게 배치되지 못했다. 스토크시티가 그 틈을 찌르자 페널티 박스 앞에서 수비해야 할 수미들마저 박스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오른쪽에서 공을 잡은 페어린던은 고개를 들어 골대 앞 상황을 확인한 후, 힐킥으로 백 패스했다. 페어린던이 빼낸 공을 받은 제임스는 원터치로 페널티 박스 밖으로 보냈다.
몰래 뒤로 빠졌던 도라익이 어느새 나타나 왼발 아웃사이드로 데굴데굴 굴러오는 공을 강하게 찼다.
공은 축구화와 마찰하며 강력한 스핀이 걸렸다. 빠르게 회전하며 공기와 마찰한 공은 굴곡이 심한 곡선을 그리며 골대로 날아갔다.
로잔 골키퍼가 빠르게 몸을 던지며 팔을 길게 뻗었다. 실린 힘은 강해도 슛은 조금 느린 편이어서 키퍼가 공을 쳐 낼 듯했다.
그런데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공이 갑자기 밑으로 툭 떨어졌다. 무회전 킥에서나 보여주던 모습이 멀리서도 빤히 보일 정도로 스핀이 강하게 걸린 공에 나타났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 예전엔 축구공 제작 기술이 발달하지 못하고 공도 무거워서 가끔 이해하기 어려운 궤적이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무게중심이 정말 잘 잡히고 공이 가볍기도 하여 예상을 벗어나는 슛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유로파리그 중계 측에서 도라익의 슛을 여러 각도에서 반복하여 재생했다. 그리고 약 2분 뒤에 컴퓨터로 분석한 결과를 화면으로 내보냈다.
- 회전이 두 가지가 걸린 거네요.
- 정확히 말하자면 두 가지 회전이 동시에 공에 걸려서 하나가 된 겁니다.
제임스는 패스할 때 공의 윗부분을 차서 앞으로 구르게 했다. 그걸 도라익이 아웃사이드로 새로운 회전을 걸어버렸다.
도라익의 회전이 훨씬 강력하여 처음엔 감아 차기를 한 것과 비슷한 궤적을 그렸다. 그러나 골대 앞에 갔을 땐 조금 다르게 움직였다.
- 도라익 선수와 제임스 선수가 그러안고 환호합니다.
- 평소 훈련했던 것 같네요. '이게 진짜 되네?' 이런 표정입니다.
기본기가 부족한 페데리치는 회전이 많은 공을 잡거나 펀칭하는 훈련을 자주 했다. 그러나 슈팅 머신이 쏜 공은 직접 슈팅하는 것과 차이가 꽤 있었다.
그래서 도라익을 비롯해 슈팅 훈련이 필요한 선수들이 회전이 강한 슛으로 도왔다.
이번 슛은 그 과정에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평소에 아무리 재현하려고 해도 되지 않았는데 정식 경기에서 의도치 않게 성공해버렸다.
- 도라익 선수, 유로파리그 데뷔전 득점 축하합니다.
- 최연소 출전 및 득점 기록은 깨지 못했네요.
로멜루 루카쿠가 16살 218일에 유로파리그에 출전하여 2골을 기록했다. 도라익은 안타깝게도 36일 차이로 신기록을 세우지 못했다.
- 작가의말
도라익 : 할아버지 친구들이 연금이 최고랬어.
부나방 님의 추천 글을 확인했습니다. 주변 인물들 이야기가 좀 더 풍성했으면 좋겠다는 의견 잘 들었습니다.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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