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의 라익
└ 더 놀랄 기운도 없다.
└ 그러니까 원래부터 천재였는데 쌉천재로 진화했다는 거지?
└ 너무 축구 생각만 해서 뇌가 그쪽으로 진화한다고? 그럼 난 맨날 여자 생각만 하는데 왜 뇌가 진화하지 않는 걸까?
└ 2D 말고 실제 여자 생각해야지.
도라익의 입원 소식은 빠르게 뉴스가 되었다. 한창 뜨거운 어린 천재가 갑자기 졸도한 것도 기삿거린데 의사가 뇌의 진화 운운하는 바람에 사람들의 관심을 사정없이 끌었다.
"오랜만이야."
퇴원 이튿날에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여긴 어떻게 왔어?"
"뉴스 보고. 사장 부탁도 있고 해서."
엘은 커다란 가방 두 개를 끌고 왔다.
"네 덕분에 공방을 24시간 돌려도 모자랄 정도로 옷이 잘 팔리고 있어."
유로파리그 4경기 연속 해트트릭만 해도 대단한 뉴스거리다. 그런데 연타석으로 졸도가 나왔는데 뇌 진화설이 붙으며 장외 홈런이 되었다.
사장은 50만 파운드의 거액을 베팅한 도박에서 잭팟을 터뜨렸다.
"그건 뭐야?"
"이건 사장 선물, 이건 내 선물."
가방 하나에는 찻잔과 주전자 등이 들어있었다. 동양인의 다도에 환상을 품은 사장이 3천 유로나 주고 산 귀한 다기 세트였다.
다른 가방은 옷과 신발 그리고 모자 등 패션 용품이었다. 엘이 옷을 대충 입는 도라익을 위해 깔맞춤으로 여러 벌 준비했다.
"고마워. 네 덕분에 모델이 돼서 돈을 번 내가 선물해야 하는데."
"널 모델로 추천한 공을 인정받아 보너스도 받았어. 내가 훨씬 고맙지."
"그런데 넌 왜 이리 한가해? 모델들은 아주 바쁘다고 들었는데."
"난 프리랜서니까. 회사랑 계약하면 쉴 틈이 없다고 그러더라."
당분간 축구공은 물론 축구와 관련 있는 영상도 시청 금지다. 무료했던 도라익에게 엘은 훌륭한 대화 상대였다.
"그럼 너도 아직 16살인 거네?"
"연도로 따지면 내가 1년 빨리 태어났지."
엘은 크리스마스이브가 생일이었다. 제대로 따지면 도라익보다 17일 일찍 태어난 셈이다.
"의사랑 구단에서 나한테 평소 취미생활을 하라는데, 뭘 해야 하지?"
"음악 듣고, 영화 보고, 여행 다니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난 축구 말고 다른 거 해본 적이 별로 없거든."
"옷 갈아입어. 나랑 같이 놀러 가자."
도라익은 엘이 사 온 옷으로 갈아입은 후 선글라스까지 썼다. 옷이 날개라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최경호도 멀리서는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신했다.
엘 역시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아주 유명하지 않지만, 도라익과 함께 광고를 찍은 덕분에 한국과 스토크시티에서는 조금 유명한 편이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한가하다. 가로수는 누렇게 진 잎을 떨구려고 몸부림치고 바람은 그런 가로수에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영국뿐이 아니라 유럽 각지 여행객들이 스토크 온 트렌트에 들러서 도자기 그릇을 구매했다. 엘 역시 마음에 드는 그릇이 보이면 바로 사들였다.
"여기가 여행 도시였어?"
"멍청이. 넌 어떻게 자신이 사는 도시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도시 정식 명칭이 스토크 온 트렌트라는 것도 네가 방금 말해줘서 알았어."
보통은 스토크시티로 불리는 이 도시는 도자기 제작으로 유명하다. 탄광과 가까워서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고, 언제부턴가 영국 주부들이 스트레스 풀려고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적당히 쇼핑한 도라익과 엘은 트렌트 강변을 걸었다. 이른 아침에 늘 뛰던 익숙한 길이지만, 왠지 색다르게 다가왔다.
"도우는 왜 첫사랑과 결혼하려고 해?"
"아버지랑 엄마가 그랬으니까."
"부모님 사이가 좋으셔?"
"응. 여섯째가 5월에 태어났어."
"형제 많아서 좋겠다. 난 외동딸인데."
"그런데 엘은 날 어떻게 안 거야? 축구 팬도 아니잖아."
"언니가 있었거든. 소아암으로 죽었어. 그걸로 싸우다가 부모님이 이혼하셨고. 우연히 도우의 기부 기사를 보고 종일 울었어."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걸 보고 나도 열심히 돈 벌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어. 덕분에 전도가 유망한 패션 브랜드와 전속 계약도 맺었지. 사실 그날 도우와 찍은 게 내 첫 광고였어."
"진짜? 엄청나게 잘하던데?"
"아마추어 같은 모습을 보이면 창피하니까 이 악물고 열심히 했지."
"잠깐 쉬다 가자."
도라익은 하이힐을 신은 엘의 걸음걸이가 불편하게 보이자 쉬자고 제안했다. 둘은 강변의 노천카페에 가서 음료 한 잔씩 시키고 휴식을 취했다.
스토크시티 유니폼을 입은 카페 주인은 아침 일찍 강변을 달리는 도라익과 늘 인사를 주고받았는데 옷이 바뀌었다고 선글라스를 쓴 도라익을 알아보지 못했다.
"어때?"
엘이 갑자기 질문했다.
"뭐가?"
"대부분 사람은 쉬는 날에 이렇게 지내. 딱히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고 걷고 보고 내키면 쇼핑도 하고. 힘들면 쉬고 목마르면 음료수를 사 마시고."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기사로 본 네 삶은 축구라는 신앙을 향한 구도자의 모습이었어. 주제넘지만, 축구를 위하기보다 너 자신을 위해 살라고 충고하고 싶어."
"축구가 재밌는 걸 어떡해?"
도라익의 대답에 엘은 또 배꼽을 잡고 깔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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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트넘과 비긴 경기와 첼시에 패한 경기 모두 도라익은 출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12월 3일 홈에서 로잔 FC를 맞이한 경기에 끝내 선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도우, 그간 많이 보고 싶었어."
"어제도 훈련장에서 봤잖아. 내 패스로 골도 넣었잖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머쓱해진 제임스는 화제를 전환하려 했다.
"도우, 오늘 해트..."
쇠렌센과 타이먼이 어느새 나타나 제임스의 입을 막았다.
"해트 뭐?"
"경기할 때 비도 자주 오고 어떤 때는 또 햇살이 너무 세잖아. 그래서 경기 중에 모자를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제임스가 헛소리하는 거야."
"어휴. 저 또라이."
"그래. 저 또라이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울 거야. 그러니 저기 앉아서 경기 시작할 때까지 마음을 다스려."
의사의 권고로 축구에 관한 생각을 줄이기로 했으나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축구 말고 생각할 일이 그다지 많지 않은 탓이다.
그래서 제임스 때문은 아니지만, 확실히 머리가 어지러웠던 도라익은 타이먼의 권고에 따라 조용한 구석에서 음악을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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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청자 여러분. 그간 격조했습니다.
강철민은 벌점 누적으로 방송 정지 3주의 징계를 받았다. 대표팀 2경기와 프리미어리그 2경기 해설에 결장한 강철민은 비장한 얼굴로 유로파리그 생중계에 임했다.
- 도라익 선수가 기절하여 입원한 뉴스를 보고 강 해설이 울었는데요. 무슨 생각으로 대성통곡했는지 궁금합니다.
- 3주의 징계로 발언 수위를 낮춰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남들 다 노는 휴가에 훈련하다가 쓰러진 도라익 선수 뉴스를 보고 더 열심히 하기로 생각을 바꿨습니다.
- 그거랑 이거랑 완전히 다른 거 같은데요?
- 내 마음입니다.
이미 토너먼트 진출이 보장된 스토크시티가 홈에서 FC 로잔을 맞이했다. 토트넘과 첼시 경기를 벤치에서 구경했던 도라익이 선발로 출전한 것과 강철민의 복귀로 경기도 중계도 활기가 넘쳤다.
- 도라익 선수 드리블로 수비수 세 명을 연속 제쳤습니다.
- 패스!
- 골입니다! 토미 선수가 득점에 성공했습니다.
도라익의 패스는 훌륭했지만 토미의 슛은 형편없었다. 그러나 왼발로 찬 슛이 자기 오른발에 맞으며 골이 되어버렸다.
가까운 거리의 슛이어서 일찍 몸을 날린 키퍼는 반대편으로 느리게 굴러가는 공을 애절하게 지켜볼 도리밖에 없었다.
- 방금 도라익 선수는 수비수 세 명을 제치고 한 명의 수비수를 끌어왔습니다. 그렇게 생긴 공간에 공을 찔렀고 긴장한 토미 선수가 미숙한 슛을 했는데 운이 맞아 골이 되었죠.
- 토미 선수는 도라익과 함께 유로파리그 정식 경기 득점에 성공한 둘뿐인 스토크시티 선수에 등극했습니다.
원정에서 스파르타와 3:3 무승부를 내며 1점을 기록한 로잔이다. 이론상 남은 2경기 모두 이기면 조 2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할 수 있지만, 말 그대로 이론뿐이다.
4경기에 1무 3패를 당한 팀이 기적적으로 남은 2경기를 이기는 건 말이 안 된다.
자포자기한 로잔은 1실점을 하고 바로 라인을 올렸다.
- 찰리 선수 헤딩으로 공을 뒷공간에 떨굽니다.
- 도라익 선수 가속합니다.
- 키퍼가 나옵니다.
- 마르세유 턴!
- 슈우웃!
레체르트가 롱킥으로 찰리 아담을 찾았다. 찰리는 공을 맞혀 살짝 방향만 바꿨다. 빠른 속도로 달려간 도라익은 골대를 버리고 출격한 키퍼를 앞두고 마르세유 턴을 펼쳤다.
간단히 키퍼를 제쳐버린 도라익은 시간을 끌지 않고 바로 슈팅을 때렸다. 적당한 힘으로 찬 공은 정확하게 골대 가운데로 굴러갔다.
- 도라익 선수 계속 좋은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경기를 뛰는 사람이나 지켜보는 사람이나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입방정이 될까 봐 누구도 대놓고 말하지 못했다.
- 찰리 선수의 공 처리가 평소와 달리 공격적입니다. 우리랑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거겠죠.
-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 토미 선수가 공을 잡습니다.
스피드와 드리블과 슈팅 모두 제임스보다 나은 토미다. 그러나 경기에 몰입하면 감독 지시를 잊고 멋대로 뛰기 일쑤다. 경험이 쌓이면 극복할 수 있는 부분이기에 제임스의 유력한 경쟁 상대다.
- 토미 선수의 절묘한 패스.
- 도라익 선수 달립니다!
- 작가의말
여자 생각 너무 하면, 머리카락 빠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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