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승을 위하여
스토크시티는 홈에서 선덜랜드를 맞이했다. 특이하게 속도 빠른 공격수 두 명을 앞세우고 요즘 잘 쓰지 않는 442 포맷을 애용하는 팀이다.
거기에 스토크시티는 도라익과 찰리의 투톱으로 응수했다. 도라익도 머리로 한 득점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그렇지 헤딩이 꽤 위협적이다.
- 속도 빠른 공격수로 반격을 노리는 선덜랜드 상대로 압박 전술을 사용하는 건 왠지 상대한테 2점 정도 깔아주고 시작하는 바둑 같습니다.
- 기이한 전술을 즐겨 사용하는 알론소 감독이니 뭔가 복심이 있지 않을까요?
- 리 그레고리 선수가 선발로 출전한 걸 보면 뭔가 색다른 전술이 기대되긴 합니다.
알론소는 강철민과 박만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 진짜 놀랍네요. 리 그레고리 선수와 라세 쇠렌센 선수가 상대 두 공격수를 마킹합니다.
- 거기에 속도 빠른 센터백 레체르트가 백업을 하고 남은 일곱 명은 공격에만 전념하네요.
- 밖으로 흐른 공은 대부분 루이스 선수의 차지입니다.
게다가 미켈도 늘 페널티 박스 밖에 자리를 잡고 상대가 길게 치고 달리는 걸 대비했다. 선덜랜드의 두 공격수는 공격 기회가 드문 것도 드문 거지만, 어쩌다 잡은 기회도 미켈을 포함한 네 스토크시티 수비 선수들의 방해로 허무하게 날렸다.
- 공을 잡은 후 롱킥으로 득점할 수도 있습니다만, 선덜랜드의 두 공격수 모두 킥력이 뛰어나지 않습니다. 빠른 속도로 오프사이드 라인을 깨고 정확하고 빠른 슛 혹은 드리블로 키퍼를 제치고 득점하는 타입입니다.
- 완벽한 수비보단 효율적인 수비를 지향하는 거네요. 그런데 왜 알론소 감독은 이런 전술을 정했을까요?
- 개인적인 생각인데, 이틀 뒤에 홈에서 아스널을 맞이하지 않습니까? 체력을 아껴야 하는 게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 확실히 벌써 어깨를 들썩이는 선덜랜드와 달리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몸이 가벼워 보입니다.
- 또 하나는 알론소 감독 입장에서 생각해 봤는데요. 지금까지 강팀을 만난 경기 대부분이 무득점입니다. 뮌헨 빼고는 강팀에 골을 넣은 적이 없지요. 자신의 전술이 보기에만 그럴듯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면 이틀 뒤 아스널 경기에서 뭔가를 해야 합니다.
- 그게 이 경기에서 사용한 전술과 무슨 상관인가요?
- 이 전술을 아스널 경기에서 사용하면 골 10개 이상 먹을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일부러 이런 해괴망측한 전술로 다음 상대인 아스널에 혼란을 주려는 게 아닐까요?
스토크시티는 중앙에서 공을 돌리다가 상대가 수비진을 중앙으로 좁히는 즉시 라인으로 공을 보냈다. 오른쪽의 오창범과 왼쪽의 맥자넷이 크로스를 올리고, 경기 내내 수비에 딱 세 번 참여한 마르코 렌테와 센터백으로 선발 출전한 줄리엔이 도라익을 도와 선덜랜드 선수들과 헤딩 경합을 벌였다.
그러나 흘러나온 공은 아예 포기한 채 여덟 명 선수가 페널티 박스 안에서 수비하는 선덜랜드 상대로 스토크시티의 폭격은 유효타를 기록하지 못했다.
'이대로는 위험한데.'
지금 기세를 전반전 내내 유지하는 건 힘들다. 스토크시티의 기세가 사그라들 때 선덜랜드에 기회가 주어진다. 그 기회에 선덜랜드가 골 하나라도 넣으면 스토크시티가 준비한 전술은 전부 무용지물이 된다.
'어떻게든 골을 넣어야 해.'
도라익은 눈으로 공을 보면서 주변 선수들과 거리를 유지하는 중에도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그러나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대단한 성취를 이뤘다고 해도 도라익은 아직 프로로 뛴 지 2년도 안 되는 애송이일 뿐이다.
그때 맥자넷의 크로스가 왔다. 페어린던을 흉내 낸 낮고 빠른 크로스가 아니라 포물선이 큰 다소 느린 크로스다.
이런 크로스는 위치만 잘 잡으면 키가 작아도 헤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키퍼가 수비하기 편하기에 골대로 가까이 보내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넷 중에서 가장 골대와 멀리 있던 도라익이 맥자넷의 크로스를 받은 건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도라익이 헤딩으로 슈팅을 안 하고 밖에 있는 루이스한테 백패스 한 건 정말 우연이었다. 머리가 복잡했던 도라익은 별생각 없이 혼자 있는 루이스한테 공을 넘겼다.
원래 루이스의 임무는 흘러나온 공을 양쪽 라인으로 돌리거나 도라익 등과 패스를 주고받으며 상대 수비진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도라익이 헤딩으로 공을 준 건 중거리 슛을 때리라는 의미라고 생각한 루이스는 일체 주저함이 없이 골대도 보지 않은 채 강슛을 날렸다.
루이스의 슛은 밖으로 달리던 선덜랜드 선수의 발에 맞아 높이 튀었다. 그리고 공이 향한 방향엔 줄리엔이 있었다.
줄리엔은 급히 양팔을 휘저어 수비수의 접근을 방해하려 했다. 그러나 선덜랜드 수비수들은 이미 오프사이드를 만들려고 앞으로 달린 상황이어서 헛손질만 했다.
"가만있어!"
귀를 때리는 외침에 줄리엔의 몸이 굳어버렸다. 목소리가 귀에 익긴 한데, 혹시 선덜랜드 선수가 자신이 슈팅 못 하게 혼란을 주느라 외친 게 아닌지 의심이 됐고, 고개를 돌려 부심이 오프사이드 판정을 했는지 확인하고 싶고, 오랜만에 선발로 출전한 김에 시원하게 강슛을 하나 날리고도 싶고. 온갖 생각이 버무려지며 슈팅하려고 힘을 넣은 몸이 그만 굳어버렸다.
"굿!"
줄리엔이 뭘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어느새 줄리엔의 시야에 나타난 도라익이 오른발로 강슛을 날렸다. 마지막 순간에 갑자기 보폭을 짧게 바꾼 탓에 키퍼는 왼발 슈팅을 염두에 두느라 그만 반응이 늦고 말았다.
그리고 도라익의 강슛은 미리 알았다고 해도 꼭 막는다는 보장이 없을 정도로 빨랐다.
"나 오프사이드였어?"
줄리엔은 골이 들어갔다는 기쁨보다는 자신이 슈팅을 안 하고 참은 게 잘한 일인지 더 궁금했다.
"응."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함께 카메라 앞으로 달려가 '미라클 세리머니'를 펼쳤다. 미라클이 가장 좋아하는 애니 캐릭터의 제스처를 흉내 낸 세리머니로, 줄리엔과 도라익을 필두로 모두가 참여했다.
- 아. 스토크시티가 움츠린 수비 전술을 사용합니다.
1골을 넣은 스토크시티는 바로 라인을 내렸다. 줄리엔은 센터백 자리로 갔고, 도라익은 미드필더 위치로 가서 수비에 전념했다.
앞엔 찰리 아담만 두어 반격 시 공 소유권을 지키게 하고, 쇠렌센은 일대일 마킹을 그만두고 루이스와 함께 세 센터백 앞에서 수비하며 적절히 양쪽 풀백을 지원했다.
리 그레고리 역시 공격수를 버리고 선덜랜드에서 가장 많은 도움을 기록한 미드필더를 마킹했다. 도라익은 직접 공을 잡은 선수를 수비하기보단 수비 진형이 일그러져 생기는 틈을 적절히 메꾸며 반격에 더 신경 썼다.
- 후반전 60분인데 선덜랜드 선수들 이미 지쳤습니다.
- 스토크시티에 반격 기회가 생길 때마다 급히 수비하느라 체력 소모가 컸습니다.
전반전 30분 정도, 후반전 70분 정도가 체력적인 고비다. 그리고 이 고비만 넘으면 어느 정도 체력이 돌아온다.
그런데 골 먹기 전까지 수비하느라 평소보다 체력을 훨씬 소모한 선덜랜드는 후반 60분에 이미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알론소는 곧바로 찰리와 도라익을 내리고 토미와 우디르를 올렸다. 토미는 도라익이 하던 수비 역할을 맡고, 우디르는 속도로 지친 선덜랜드를 압박하는 역할이었다.
그리고 수비 실책을 몇 번 범한 오창범 역시 70분에 라미스로 교체되었다.
- 잘 짜인 극본과 같은 경기입니다.
- 장수들도 정공법을 좋아하는 유형이 있고 기습을 비롯해 기책을 좋아하는 유형이 있죠.
- 기책은 필요한 조건이 딱딱 맞아떨어져야 효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들켰을 땐 그만큼 큰 대가를 치러야 하죠.
- 다행히 오늘은 알론소 감독이 원하는 그림인 것 같습니다.
경기는 별 이변이 없이 1:0으로 끝났다. 골을 넣은 다음부턴 수비 위주로 경기를 진행했지만, 스토크시티 팬들은 불만을 갖기보단 리그 2연승을 따낸 데 더 의미를 뒀다.
그리고 경기 MOM을 받은 도라익이 경기 후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우선 경기에서 승리한 걸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경기의 승리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아주 당연한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선덜랜드도 색깔이 명확한 훌륭한 팀이지만, 오늘 경기에선 우리 준비가 더 철저했고 전술 이행도 더 확실했다고 생각합니다."
"선제골을 넣고 수비로 전환하는 건 사전에 약속된 움직임이었나요?"
"그렇습니다. 왜냐면 이틀 뒤에 우린 아스널을 상대해야 하니깐요. 오늘 경기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즌 전체를 보면 다음 경기에서 좋은 결과를 얻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강팀인 아스널 상대로 좋은 모습을 보이면 팀의 사기가 오를 겁니다. 3연승은 우리에게 큰 자신감을 줄 거구요."
"그럼 내친김에 아스널 상대로 승리할 수 있는지 질문하고 싶군요."
"우리가 승산이 크다고 봅니다. 방금 들었는데 아스널은 홈에서 토트넘과 4:4 무승부를 냈다고 하네요. 레드카드 한 장에 부상자 2명. 거기에 라이벌인 토트넘에 4실점을 한 만큼 심리적 충격이 작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스토크시티에 패배한 후 토트넘은 감독을 교체했다. 딱히 감독 잘못은 아니지만, 팀 분위기를 수습하려면 교체가 답이다. 리그 중에 선수를 전부 교체하는 건 불가능하고, 설사 선수를 다 교체한다고 쳐도 팀 분위기가 바뀐다는 보장이 없다.
구단 입장에선 잘잘못을 떠나 감독을 바꾸는 게 가장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이다.
그리고 감독을 교체하자마자 토트넘은 리그 첫 승리를 이뤘고, 신임 감독의 두 번째 경기에서 아스널과 4:4 무승부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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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크시티가 아스널을 이기는 건 불가능해요. 도라익 선수의 인터뷰는 그냥 립서비스예요."
김상현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객관적 전력만 봐도 아스널이 우위죠. 더구나 현재는 전반기예요. 프리미어리그 모든 팀이 두려워하는 전반기의 아스널이죠. 게다가 도라익 선수가 3연승을 인터뷰에서 언급하며 선수들의 심리적 부담이 커졌어요."
"그럼 토트넘과 4:4로 비긴 아스널은 심리적 부담이 없습니까?"
오태범이 혀를 찼다.
"아니죠. 아스널은 오히려 스토크시티를 이기는 거로 사기를 고취할 거예요. 다른 경기보다 훨씬 집중력이 높을 거예요."
"아니. 왜 스토크시티는 3연승이 부담이고, 아스널은 앙숙과 무승부를 이뤘는데 오히려 동력이 되는 겁니까?"
"실력이죠. 그리고 도라익 선수도 밑천을 드러냈어요."
"밑천이요? 경기마다 나은 모습을 보이는 선수가요?"
"6월에 도라익 선수가 오른발이 주발이라는 게 밝혀졌을 때 다들 난리였죠. 제가 오히려 우려된다고 칼럼을 썼을 때 많은 사람이 비웃었는데요. 현재 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어요."
"한 발에 집중하지 못해 오히려 실력이 하락할 거란 그 기우 말씀이죠?"
김상현은 미리 준비한 자료를 틀라고 제작진에 신호를 보냈다.
"양발을 자유자재로 쓰는 선수. 참 듣기엔 좋죠. 그런데 영상을 보시죠."
2분 정도 분량의 드리블 영상이 재생됐다.
"왼발로 드리블하다가 오른발로 드리블하고, 그러다 또 왼발로 드리블. 초반에야 잠깐 먹혔겠지만, 점점 돌파 성공률이 떨어지고 있죠? 이건 양발 선수라기보단 그냥 왼발도 잘 쓰고 오른발도 잘 쓰는 선수죠."
김상현의 날카로운 지적에 오태범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수비하는 선수만 왼발 오른발 고민하는 게 아니란 말이죠. 도라익 선수도 왼발과 오른발 중에 어느 걸 쓸지 고민해야 하고, 리듬이 빠른 프리미어리그에선 큰 약점으로 작용해요."
바이에른 뮌헨과 대결할 때까지만 해도 도라익은 왼발을 더 사용했고, 괜찮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오른발 사용이 늘면서 오히려 실력이 하락했다. 리그에선 그나마 괜찮지만, 실력 차이가 큰 데다가 생소하기까지 한 챔피언스리그 팀을 상대하는 경기에선 진짜 보여준 게 없었다.
'요즘은 꽤 적응한 것 같은데.'
그러나 괜히 편들었다가 도라익이 좋은 모습을 못 보이면 김상현의 기만 살려주는 셈이다. 오태범은 반박하고 싶어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지로 눌렀다.
- 작가의말
오른발과 왼발이 손잡는 날이 어서 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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