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길이 빠른 길이다
15분 휴식하는 동안 알론소는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알아서 잘 달리는 말에 굳이 박차를 가할 필요가 없다.
"도우. 후반전엔 공격수로만 뛰는 게 어때?"
몇몇 선수가 도라익을 찾아와서 말했다. 리버풀의 다칸은 옐로카드 누적으로 오늘 결장이다. 도라익이 골 1개만 넣으면 브론즈 슈즈가 실버 슈즈로 바뀐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어."
도라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원하는 것에 닿는 가장 빠른 길은 바른길이다. 후반전 역시 수비에 집중하며 전반전처럼 뛴다."
스토크시티의 수비 전술에서 미켈과 레체르트 그리고 루이스가 핵심이다. 그런데 반년 정도 루이스의 공백을 대신한 쇠렌센은 여전히 루이스의 모든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도라익의 도움이 없으면 수비 전술에 틈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감독, 교체를 요청합니다."
토미가 크게 외쳤다.
"어디 다쳤어?"
"아니요. 그러나 제 체력으론 공격 상황에 도우의 부담을 덜어주지 못합니다. 우린 반격 상황에 드리블하여 도우의 체력을 아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도라익의 첫 골 당시 토미의 드리블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전반전에 이미 체력을 거의 소진한 토미는 후반전에도 똑같이 활약할 자신이 없었다.
"코치. 가서 제임스를 불러."
술래 두 명을 가운데 두고 패스 놀이를 하던 제임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들어왔다. 그리고 후반전에 교체로 올라갈 거라는 말을 듣자 바로 도라익한테 갔다.
"도우. 나 어떻게 뛰어야 해?"
"예전에 맨유랑 뛰었던 경기 기억나지?"
"응. 평생 못 잊을 거야."
"그날 너 뭐 생각하면서 뛰었어?"
제임스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래. 나 원래 생각 없는 놈이었지."
늘 고민하며 축구를 탐구하는 도라익을 보며 제임스도 똑같이 하려 했다. 그게 오히려 제임스에겐 화가 되었다. 흥분하면 날이 바짝 서던 감이 복잡한 머리 때문에 사라졌다.
기본기가 부족한 데다가 감까지 사라진 제임스는 토미한테 주전 자리를 뺏겼다. 그나마 늦지 않게 정신 차리고 기본기 훈련에 열중한 건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 있다.
심판의 휘슬과 함께 공이 구르며 후반전이 시작됐다. 토미 대신 출전한 제임스는 부지런히 뛰었다.
자리를 이탈해 도라익한테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이 패스를 차단하려다가 실패하면 팀에 위기가 오는 게 아닌지. 온갖 걱정을 훨훨 던져버리고 그저 공을 향해 뛰었다.
제임스의 플레이는 변수가 되었다. 아스널에도 변수이고 스토크시티에도 변수였다. 그러나 제임스를 오랜 기간 지켜본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변수로 인한 결괏값의 변화를 어느 정도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고, 아스널은 아니었다.
공을 차단한 제임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드리블에 몰두했다. 그간 기본기 훈련을 한 덕분에 타고난 감까지 더해 수비수 두 명을 연신 제쳤다.
"젬!"
돌파에 성공한 제임스는 도라익의 부름을 듣자마자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칩 킥으로 공을 띄웠다. 그리고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아스널 센터백이 고개를 들고 공을 바라보며 뒤로 달렸다. 아스널 키퍼 역시 자기 공이라고 고함을 지르며 달려 나왔다.
'다 틀렸어.'
공은 도라익의 것이었다. 높이 점프한 도라익이 공을 머리로 건드리고 착지한 후에야 센터백과 키퍼가 가까이 접근했다.
도라익은 급히 고개를 둘러 공을 확인했다. 키퍼는 공의 위치를 확인하는 대신 양팔을 쫙 벌려 도라익의 진로를 방해했다. 센터백은 왼발을 옆으로 길게 뻗은 후, 키퍼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던 곳에 공이 있는지 확인했다.
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 패스를 하고 바로 달린 제임스가 뒤로 흐른 공을 잡아 슛을 때렸다. 평소는 아니어도 실전에선 슈팅 정확도가 꽤 높은 제임스다. 도라익을 비롯한 세 선수에 가려져 각이 크진 않았지만, 빈 골대에 때린 슛은 골이 되었다.
"도우는 진짜 대단한 거 같아."
호흡이 안정된 토미가 벤치에서 중얼거렸다.
"왜 그렇게 생각해?"
오창범이 질문했다.
"바른길이 빠른 길이라고 했잖아. 난 경기를 더 뛰고 싶었어. 오늘 도우 보러 수많은 구단의 관계자가 왔거든. 그러나 도우의 말을 듣고 나보단 제임스가 낫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리고 봐. 제임스가 골을 넣었잖아."
아스널 키퍼는 자신의 공이 확실하다고 자신하며 달려 나왔다. 그런데 생각보다 빨리 나타난 도라익이 생각보다 빠르게 점프했고, 생각보다 훨씬 높이 점프했다.
당황한 기퍼는 충돌을 피하고자 급정지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하느라 도라익의 머리에 맞은 공이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놀라기는 센터백이 더했다. 도라익을 등졌고 공만 지켜보던 차여서 갑자기 시야에 나타난 도라익 때문에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 탓에 공이 어디로 갔는지 보지 못했다.
도라익 역시 급히 달리고 급히 점프하느라 공을 제대로 맞히지 못했다. 공이 제임스 쪽으로 흘러간 건 순전히 우연이다.
그러나 제임스가 아닌 토미가 출전했다면 이러한 우연으로 골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제임스. 머리가 복잡한 것도 안 좋지만, 너무 깨끗한 것도 안 좋아."
토미보다 체력이 넉넉한 제임스가 출전했건만, 스토크시티의 수비는 오히려 약해졌다. 제임스가 머리를 너무 비우고 뛴 탓이다.
"자. 여기부터 저기까지 네 수비 범위야. 저 범위 안에 상대 선수가 들어오면 마킹해. 공이 들어오면 우리 기준으로 왼쪽, 즉 맥자넷 쪽으로 몰아. 그리고 산체스와 맥자넷의 수비 범위에 공이 있을 땐 그쪽으로 접근해서 만일에 대비해야 하지만, 네 수비 범위를 최대한 벗어나지 마. 어때? 안 복잡하지?"
"공격 기회엔?"
"고개를 들어 셋의 위치를 확인해. 나하고 산체스 그리고 맥자넷. 누구한테 패스할지는 알아서 판단하고."
"알았어. 해볼게."
제임스의 눈은 여전히 흥분이 가득 찼다. 그러나 오늘 경기에서 이기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도라익의 말을 곱씹으며 자기 수비 위치를 지키려고 애썼다.
윌슨 밑에서 아주 좋은 방향으로 성장하다가 감독이 알론소로 바뀌면서 시즌 내내 기회를 많이 얻지 못했던 제임스다.
그러나 자포자기하지 않고 노력한 덕분에 시즌 마지막 라운드에 지난 시즌에 날아다니던 제임스로 바로 복귀했다. 기본기가 그때보다 훨씬 탄탄하니 한 시즌 동안 벤치를 앉은 게 마냥 억울하지도 않았다.
- 스토크시티는 뭐랄까. 예전 무리뉴 밑에서 리그 우승을 하던 첼시 같습니다.
- 그만큼 수비가 탄탄하다는 건가요?
- 그것뿐이 아니라 반격 효율도 아주 높습니다.
- 도라익 선수가 팀을 강하게 만든 걸까요 아니면 팀이 도라익 선수를 강하게 만든 걸까요?
- 옳은 사람이 옳은 팀에서 옳은 결과를 얻은 겁니다.
'도우. 제발 뭐든 해.'
팀이 2:0으로 앞섰고 경기 운영도 안정적이건만, 구단주의 마음은 애가 타서 재가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브론즈 슈즈와 실버 슈즈는 몸값이 다르다고.'
겨울에 이미 옵션까지 포함해 1억 파운드가 넘은 오퍼를 여럿 받았다. 그리고 도라익의 몸값이 9천만 파운드로 책정된 지금, 여름에 더 높은 금액의 오퍼가 들어올 게 뻔하다.
선수 한 명을 팔아서 한 시즌 중계료와 맞먹는 돈을 번다는 건 구단주에겐 뉴스로나 보던 남의 일이었다. 그러다 정작 본인이 경험하니 이적료 한 푼이라도 더 받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신이 실제로 있는지, 있다고 쳐도 구단주의 간절한 기도를 들었는지, 들었다고 쳐도 그 기도에 응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구단주의 염원이 이뤄졌다.
- 도라익 선수 직접 프리킥으로 득점에 성공합니다.
- 25골로 실버 슈즈가 되었죠.
무려 35미터나 되는 먼 거리에서 직접 슈팅하여 골에 성공했다. 공을 찬 도라익의 축구화 발등에 풀잎 하나 묻었어도 골이 되지 않았을 정도로 정교하게 들어갔다.
골을 넣은 도라익은 벤치로 달려가 토미와 함께 세리머니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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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익아. 확실히 이적하는 거지?"
5월과 6월에 4경기, 9월에 1경기의 월드컵 예선전이 있다. 시즌이 끝났건만 도라익은 회복 훈련 대신 당장 다가오는 예선전에 대비하여 컨디션을 지켜야 했다.
"그럼. 팀도 이적료를 최대한 받을 수 있고 제임스랑 토미도 잘하니까 괜찮을 거야. 우디르도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고."
"챔피언스리그를 뛰는 팀 이거 하나면 돼? 다른 조건은 없고?"
"응. 그리고 주전 보장도 필요 없어. 괜히 긴장감만 떨어질 거 같아."
"알았어. 돈에 관한 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혹시 생각나는 다른 조건 있으면 언제든 전화나 톡으로 말해."
스토크시티가 강팀이 아니기에 도라익은 운신의 폭이 훨씬 컸다. 조금 부족하지만, 주장이 되어 팀을 이끄는 경험도 얻었다.
그러나 스토크시티가 강팀이 아니기에 도라익은 마음껏 자기 플레이를 펼치지도 못했다. 팀의 실력 때문에 하고 싶어도 못 하는 플레이들이 있다.
일례로 점프가 뛰어나고 위치 선정도 괜찮은데 헤딩으로 골을 잘 넣지 못한다. 팀에 크로스를 잘하는 선수가 적어서 상대의 수비가 용이한 탓이다.
그리고 다른 선수들이 상대 수비를 끌어내는 능력이 부족해 드리블로 날뛸 공간도 부족하다. 만약 상대의 수비 주의력을 끌어주는 선수가 한두 명 더 있다면 베르딩요와 골든 슈즈 경쟁을 할 자신도 있다.
대표팀에서도 오창범이 잘할 땐 이혁신도 덩달아 잘한다. 오른쪽 공격을 책임진 오창범이 부담을 덜어준 덕분이다.
스토크시티엔 그런 선수가 찰리밖에 없다. 그마저도 플레이 스타일이 확연히 달라 큰 도움을 주진 못한다.
"계약서 검토는 뮐러네 회사가 도와주기로 했어. 그러니까 진짜 걱정 안 해도 돼."
"나 형 믿어."
최경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최경호가 출전 보장을 고집했던 일 때문에 도라익이 선수 인생을 망쳤을지도 모른다. 그 외에도 실수한 일이 한둘이 아니다.
한때는 여자에 눈이 멀어 요리와 빨래 등 본분을 팽개친 적도 있다.
"알았어. 그럼 난 일단 스페인으로 가서 세 구단과 차례로 만나 조건을 협상할게."
7월 이적시장이 오려면 아직 한 달 반 이상 남았지만, 도라익을 둘러싼 이적 전쟁은 이미 초연이 자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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