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4월 11일.
스토크시티는 홈에서 크리스털 팰리스를 맞이했다. 런던에 연고를 둔 팀으로, 수비 위주로 경기를 운영하면서 소규모 반격으로 득점하는 데 능하다.
테일러는 우디르 대신 줄리엔을 포워드로 올렸다. 센터백은 네이선과 보크스가 맡았고, 수비 안정을 위해 쇠렌센이 선발로 출전했다.
대인 수비가 뛰어난 보크스, 위치 선정이 뛰어난 쇠렌센 덕분에 상대 반격은 번번이 막혔다. 루이스도 공격보다는 수비에 더 신경을 써서 크리스털 팰리스는 반격을 거의 포기하고 수비에만 집중했다.
- 골입니다!
덕분에 네이선이 공격에 참여했고, 눈 감고 한 헤딩이 운 좋게 골이 되었다.
테일러는 바로 선수들에게 라인을 내리라고 지시했다. 줄리엔은 센터백으로 복귀했고, 보크스는 상대 공격수를 전담 마킹했다.
반격은 토미와 산체스가 번갈아 맡기로 했다.
#
후반 60분.
도라익이 보크스를 교체해 출전했다. 크리스털 팰리스는 스피드가 가장 빠른 오른쪽 풀백에게 도라익을 마킹하는 임무를 맡겼다.
도라익은 수비에 참여하지 않고 좌우로 뛰면서 반격 기회만 엿봤다.
'지기 어렵겠는데?'
비록 도라익이 원하는 반격 기회는 나오지 않았지만, 스토크시티의 수비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중앙 수비를 강화해 상대가 측면으로 가도록 강제했고, 줄리엔과 네이선이 매번 헤딩에 성공했다.
밖으로 흐른 공을 상대편이 잡더라도 어느새 루이스와 쇠렌센이 몸으로 슈팅 경로를 봉쇄했다.
상대는 다시 공을 측면으로 돌려야 했고, 헤딩 잘하는 선수가 없음에도 억지로 크로스를 올려야 했다.
오창범과 맥자넷 모두 상대의 컷인에 조심하고 낮은 크로스를 방해하여 혼전이 벌어지는 걸 최대한 막았고, 어쩌다 실패해 페널티 박스 안에 혼전이 벌어지더라도 반응이 빠른 페데리치가 잘 해결했다.
'기회다.'
반격 기회가 올 것 같은 예감에 도라익은 슬금슬금 뒷걸음쳤다.
'아닌가?'
도라익은 뒤로 걷다 말고 멈췄다. 줄리엔의 헤딩을 잡은 건 상대편 선수였다.
'맞아.'
공을 잡은 크리스털 팰리스 선수가 억지로 슛을 때렸다. 슛은 루이스의 다리에 맞았고, 옆으로 흐른 공은 협동 수비를 하려고 달려오던 발제르가 잡았다.
발제르가 다리를 휘두르는 동시에 도라익이 앞으로 달렸다. 아주 잘 찬 공은 아니지만, 그래도 도라익이 달리는 방향과 얼추 비슷하게 날아왔다.
공을 건드려 힘을 죽인 도라익은 속도를 줄이면서 키퍼 위치를 확인했다.
키퍼의 대응은 아주 뛰어났다. 도라익이 왼쪽으로 가든 오른쪽으로 가든 비슷하게 대응할 수 있는 좋은 위치를 잡았다.
도라익이 실수로 공을 길게 차면 먼저 달려가 밖으로 차 낼 수 있는 거리를 유지했고, 칩슛을 하더라도 재빨리 뒤로 달려 공을 잡을 수 있는 위치였다.
길게 고민할 겨를이 없었던 도라익은 짧게 드리블했다. 그에 맞춰 키퍼도 위치를 조절했다. 상대의 너무나 훌륭한 대처에 도라익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때, 풀백이 달려와서 백태클을 날렸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도라익은 백태클에 당해 뒤로 쿵 넘어졌다.
"시발 새끼야. 너 뒤질래?"
눈이 뒤집힌 도라익이 벌떡 일어나서 상대 선수 멱살을 잡았다. 키퍼가 재빨리 달려와서 둘을 뜯어말렸다.
스토크시티 선수들도 우르르 달려왔고 크리스털 팰리스 선수들도 전부 몰려왔다.
주심이 카드 두 장을 꺼냈다. 노란 건 도라익에게 주고 빨간 건 크리스털 팰리스 선수한테 줬다.
"주심. 레드카드는 좀 심한 거 아냐?"
크리스털 선수가 항변했다.
"무조건 옐로카드인 백태클, 무조건 옐로카드인 공격을 방해하는 마지막 수비수의 반칙. 레드카드 안 줄 이유가 뭐지?"
어려서부터 축구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바람에 웅변 학원에 갈 기회를 잃은 크리스털 팰리스 풀백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등을 돌려 경기장 밖으로 걸었다.
"닥터, 닥터."
끝난 줄 알고 프리킥을 위치를 표시하려던 주심이 닥터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도라익이 토미의 품에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 도라익 선수, 크게 다친 게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도우, 내 말 들려? 확인해 봤는데 부상이 없어."
"진짜지?"
"그럼. 나 전문가야."
팀 닥터의 말에 도라익의 안색이 금세 회복했다.
"도우. 경기 끝나고 나랑 얘기 좀 하자."
"그래. 일단 경기부터 하고."
주심은 도라익 본인과 팀 닥터에게 진짜 괜찮은지 거듭 확인했다.
"제가 감독한테 도우를 교체하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대로 놔두세요. 당신이 나서면 도우한테 더 큰 데미지가 됩니다."
바로 교체하겠다는 팀 닥터의 다짐이 있고서야 주심은 경기를 재개했다.
"나 곧 교체되겠지?"
도라익이 중얼거렸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토미가 위안했다.
"솔직히 교체되고 싶어."
"알았어. 일단은 경기에 집중하자."
토미의 토닥거림에 도라익이 정신을 차렸다.
"좋아. 나 직접 슈팅할 거니까 나오는 공을 노려."
42미터 거리의 직접 프리킥이었다. 도라익은 골대와 키퍼 위치를 확인한 후, 고개를 푹 숙인 채 공에만 집중하며 달렸다.
그리고 왼발로 슛했다.
- 들어갑니다. 멋진 골이에요.
- 걱정했던 게 무색하네요.
키퍼를 향해 곧게 날아가던 공이 갑자기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화들짝 놀란 키퍼가 급히 이동했으나 공보다 빠르지 못했다.
도라익은 양손을 번쩍 들어 만세 자세로 제자리에서 골을 자축했다.
스토크시티는 바로 우디르를 올려 도라익을 교체했다. 교체된 도라익은 벤치 스텝과 선수들과 인사를 나눈 뒤 바로 라커룸으로 갔다.
"토마슨 박사님, 혹시 방금 보셨나요?"
- 그래. 자네 아직 완치된 게 아니었어.
"완치라고 말씀하셨잖아요."
- 나도 사람인데 실수할 수도 있지.
"이제 어떡해요?"
잠깐 정적이 흘렀다.
- 도우. 자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세상에 알려. 늘 밝은 모습만 보이려고 애쓰지 말고.
또 정적이 흘렀다.
"제 가족이 마음 아플 텐데요."
- 아니야. 가족은 그런 일로 마음이 아프지 않아.
"가끔 엘이 혼자 우는 거 봤어요."
- 마음이 아파서가 아니야. 자네 고통을 나누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책감 같은 거야.
"그게 그거 아닌가요?"
- 맞아. 자네 말이 맞아. 가족이 슬프고 아플 거야. 그런데 내 말에 따르지 않으면 자네가 축구 그만둬야 할지도 몰라.
#
스토크시티는 2:0 승리를 거뒀다. 동점으로 18위와 19위를 차지했던 QPR과 번리가 각자 비기고 지면서 18위로 올라갔다.
17위인 선덜랜드와도 겨우 1점 차이여서 썩은 고목이 꽃을 피우기 직전이다.
스토크시티 팬들은 전부 스카프나 옷을 벗어 휘두르면서 기적과 같은 3연승 그리고 리그 꼴찌 탈출을 경축했다.
스토크시티 선수와 스텝들도 경기장을 돌며 팬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즐겼다.
그때, 교체되고 바로 라커룸으로 갔던 도라익이 웃는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스토크시티 팬들은 우레와 같은 환호로 도라익을 맞이했다.
도라익은 한참 두리번거리다가 목청이 제일 큰 관객석으로 움직였다.
"안녕."
도라익이 인사를 건네자 팬들의 환호가 더 커졌다.
"너. 이거 너한테 주는 거야."
도라익은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애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곤 신발을 벗어 하나로 묶은 후 그 아이에게 던졌다.
투수 유망주였던 도민준의 아들답게 신발은 정확히 아이 품으로 갔다.
"다음은 당신."
도라익이 털보 아저씨를 가리켰다. 털보 아저씨는 로또 1등이라도 당첨된 듯 뱃살을 출렁이며 격정적인 춤을 췄다.
원래 양말만 주기로 했는데, 뛰어난 리액션에 감동한 도라익은 정강이 보호대까지 함께 던졌다.
"마지막으로 당신."
도라익은 환갑을 훌쩍 넘은 것 같은 흰머리 할아버지를 지목했다.
"이건 당신 겁니다."
도라익은 긴 팔 유니폼을 벗어 할아버지한테 던졌다.
소음이 잦아들었다. 뜻밖의 선물에 환호하던 팬들이 침묵했다.
도라익의 왼팔엔 갯지렁이보다 더 굵은 흉터가 셋이나 있었다. 오른 다리 역시 열 개가 넘은 흉터가 보였다. 가슴과 배에도 자잘한 흉터가 가득했다.
일부는 사고 당시 입은 상처로 남은 거고, 일부는 수술 자국이었다.
오른팔과 왼 다리는 그나마 괜찮았으나, 역시 흉한 수술 자국이 있었다.
도라익은 양팔을 쭉 벌렸다.
해방감이 느껴졌다.
유로파리그 원정에서 로잔과 경기할 때 장거리를 달려 골은 넣은 후 느꼈던 것과 다르지 않은 해방감이었다.
몸이 가벼웠다. 이대로 날개가 돋치면 훨훨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물이 흘렀다.
아파서가 아니고, 원통해서도 아니다.
1년 반 동안 모두가 희망이 없다고 하고, 한쪽에선 야구를 하라고 유혹했다.
그 모든 고난을 뿌리치고 이 자리에 선 게 너무 자랑스러워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
어느새 다른 선수와 스텝들도 다가왔다.
맥자넷이 도라익이 옆으로 쭉 편 팔을 잡고 엉엉 통곡했다. 토미 역시 줄리엔 뒤에 숨어서 몰래 눈물을 훔쳤다.
왜 훈련이 끝나면 샤워도 안 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갔는지, 왜 추가 훈련에 참여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본인도 제대로 의식하지 못했지만, 부상에 대한 공포가 늘 도라익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나 많이 괜찮아졌어."
눈을 뜬 도라익이 몸을 돌려 동료들에게 말했다.
"그런데 무서운 게 조금 남았어."
도라익이 코를 찡긋해 또 흐르려는 눈물을 막았다.
"다들 도와줄 거지?"
"그럼."
줄리엔이 커다란 손으로 도라익을 품에 당겼다. 다른 선수들도 팔을 넓게 벌려 도라익을 감쌌다.
낯이 하얗게 질린 공포가 꽁지를 빳빳이 세운 채 줄행랑을 놓았다.
"도우, 도우, 도우!"
팬들이 연호하는 소리가 도라익의 가슴 깊은 곳에 남았던 단단한 앙금을 조금씩 녹였다.
2:0.
스토크시티와 도라익은 큰 승리를 이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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