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 도우미
"안녕. 난 성이 도우이고 이름은 라익이야. 너희는 페데리치와 쇠렌센 그리고 타이먼 맞지? 만나서 반가워."
도라익이 환하게 웃으면서 대문을 열어 셋을 맞이했다. 셋은 얼떨떨한 얼굴로 도라익의 손에 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만나서 진짜 반가워."
도라익은 셋을 하나하나 힘껏 안아줬다. 생각지도 못한 열정적인 환대에 셋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안 그래도 내가 먼저 연락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찾아와 줘서 고마워. 다들 점심 전이지?"
셋은 귀신에 홀린 듯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에이전트가 요리를 엄청 잘해. 점심은 여기서 먹는 게 어때? 특별히 가리는 음식은 없지?"
"없긴 한데. 혹시 우리가 온다고 누가 알려줬어?"
"아니. 구장에서 비품 관리하는 할아버지 있잖아. 어제 잠깐 대화했는데 너희 셋이 팀에서 가장 훈련을 많이 하는 부지런한 선수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함께 훈련하면 어떨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어."
도라익이 하얀 이를 드러내고 즐겁게 웃었다. 셋은 도라익의 과잉 친절에 위축하여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주로 도라익이 대화를 이끌어갔다.
"그러니까 오전에는 간단한 훈련을 하고 점심을 구단 식당에서 먹은 다음 오후엔 전술 훈련이나 훈련 경기 등을 한다는 말이지? 그리고 오후 5시가 되면 문을 닫고."
"그래. 저녁에는 구단 훈련장을 사용할 수 없어. 잔디도 너무 밟히면 스트레스 때문에 죽거든. 잔디 품질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벌금은 물론 벌점을 먹을지도 몰라."
부유한 팀은 훈련장이 여럿이어서 번갈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스토크시티는 훈련장이 겨우 2개밖에 안 되었다. 다행히 새로 만드는 구장에 4개의 훈련장도 함께 짓고 있기에 내년부터는 훈련장 걱정을 안 해도 된다.
"벌점? 리그 점수를 깎는다는 말이야?"
"응. 약물 선수가 무더기로 나오면 점수와 상관없이 강등 처리하고, 한둘만 나올 경우 점수를 몇 점 깎는 벌을 줘. 잔디 상태가 나쁘다고 벌점까지 가진 않지만, 자주 걸리면 벌점을 줄 수도 있어."
"그럼 너희는 저녁에 어디서 훈련하는데?"
"저녁에는 그저 근육을 단련하거나 공원을 달리는 게 전부야. 아니면 공을 갖고 리프팅 훈련이나 하든가. 전문적인 훈련을 하기엔 마땅한 곳이 없어. 잔디가 없거나 불이 없어서 어둡거나."
그때 최경호가 소형 트럭에 물건을 가득 싣고 돌아왔다.
"응? 저건 구장에 쓰는 야간등 아니야?"
"맞아. 저녁에 마당에서 훈련하려고 중고로 하나 구했어."
세 선수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야간등을 바라봤다. 공원을 비롯해 잔디가 있는 곳이 드물지 않지만, 불빛이 너무 어둡다.
그냥 즐기기엔 괜찮지만, 프로 선수가 훈련하기엔 적합한 밝기가 아니다. 그런 곳에서 자주 훈련하다가 시력이 하락하면 프로의 길을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말인데. 매일 저녁 우리 집에 모여서 훈련하는 건 어때? 저녁밥을 공짜로 제공할게."
셋은 서로 쳐다보며 눈치만 봤다. '내성적인' 동양인과 친구를 사귀고 열심히 훈련하는 '바른길'로 인도할 임무를 안고 방문했다.
그런데 시작도 전에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떠버렸다.
"훈련할 곳을 내주는 것도 고마운데 어떻게 밥까지 얻어먹어. 밥값 정도는 우리가 낼게."
유럽인에겐 초면인 도라익의 친절이 너무 과했다.
"아니야. 난 유스 출신이 아니라서 모르는 게 많아. 너희 셋한테 듣고 배울 것도 많고 훈련 중 도움받을 일도 많아. 밥 대접하는 건 미안해서 그러는 거니까 부담 안 가져도 돼."
'제길. 자기 일 아니라고 막말하네.'
싣고 온 짐을 정리하던 최경호가 속으로 툴툴거렸다. 식사량이 점점 커지는 도라익을 배불리 먹이는 것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덩치가 산만 한 운동선수 셋이 추가된다고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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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9일.
리그컵 원정 경기에서 0:3의 패배를 당했지만, 선수들의 사기는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제임스, 저녁에 클럽에서 술 한잔 어때?"
훈련이 끝나자 톰 인스가 말했다.
"미안. 여자친구랑 저녁에 약속 잡았어."
"며칠 전에 헤어졌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응. 새로 생겼어."
톰 인스는 제임스를 포기하고 다른 선수를 포섭했다. 물론, 16세여서 법적으로 클럽 출입이 불가능한 도라익한테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도라익은 팀 선수들을 세 부류로 나눴다.
하나는 친한 사람들. 샘 클루카스를 비롯한 은퇴를 고민해야 할 나이 많은 선수들과 주전은커녕 벤치에도 잘 앉지 못하는 젊은 선수들은 도라익과 친하게 지냈다.
하나는 데면데면한 사람들. 꽤 많은 사람이 여기에 속했다. 이들은 도라익에게 좋은 감정도 나쁜 감정도 없었다. 대표적으로 여성 팬들에게 인기가 높은 제임스를 뽑을 수 있다.
하나는 도라익을 싫어하는 사람들. 대놓고 구박하고 그런 건 없지만, 도라익이 말을 걸어도 대꾸하지 않고 훈련 경기 중에 패스해주는 일이 절대 없었다.
얼핏 제임스랑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냥 관심이 없는 거랑 배척하는 건 다른 일이다. 이들의 대표가 바로 팀의 최고 스타인 톰 인스였다.
다행히 도라익은 이런 거로 스트레스받고 그러는 성격이 아니어서 팀 생활을 아주 즐겁게 잘 보냈다.
"도우. 사무실로 따라와."
윌슨이 도라익을 불렀다.
"요 이틀간 훈련 경기 영상이야. 함께 분석하자고."
윌슨 감독은 도라익의 위치 선정과 이동 그리고 공을 잡았을 때 처리를 하나하나 지적했다.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잘한 건 더 잘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이틀에 걸쳐 총 80분의 훈련 경기를 진행했다. 윌슨은 열정적으로 도라익에게 어떠한 더 나은 선택지들이 있었고, 그렇게 움직였을 때 다른 선수들이 어떤 반응을 보여줬을지 설명했다.
"오케이. 잠깐 쉬고 한 번 더 하자."
윌슨은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겼고 도라익은 스포츠음료로 목을 축였다.
"이번엔 제가 하고 감독님이 듣는 건 어떻습니까?"
도라익의 말에 윌슨이 눈알을 굴렸다. 조금 느리게 도라익의 뜻을 이해한 윌슨은 양팔을 벌려 찬성했다.
"아주 훌륭한 생각이야."
영상을 재생한 도라익은 자신이 실수한 점이나 부족한 점을 말했다. 아는 영어 단어가 상대적으로 적어서 버벅거리긴 했지만, 윌슨이 방금 지적한 부분을 꽤 많이 수용했다.
"배움이 빠르군. 그런데 놓친 부분이 좀 있어. 내가 한 번 더 설명하지."
이미 두 번 훑었기에 윌슨 감독은 빠르게 감으며 중요한 부분만 지적했다. 그렇게 꼬박 2시간을 투자해 윌슨은 도라익에게 자신의 전술을 설명했다.
"모레 경기에 자넨 선발이야. 상대는 우리보다 강팀이고 심지어 원정이야. 괜찮지?"
"다른 나라 구장에서 우승컵을 들었습니다. 뭐가 문젠지 모르겠네요."
하룻강아지가 가슴을 치며 호언장담했다.
윌슨은 껄껄 웃으며 도라익을 배웅하고 전술 고치를 불러들였다. 도라익의 전술 이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아서 좀 더 복잡한 전술을 사용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막 몸을 만지거나 그러진 않았지?"
밖에서 꼬박 2시간을 기다린 최경호가 도끼눈을 부릅뜨고 질문했다.
"내가 애야? 덩치도 나보다 작고 힘도 나보다 약해 보이던데."
"너 흑인 무시하지 마. 저 마른 몸이 다 근육일지도 몰라."
도라익은 최경호의 발언이 인종차별인지 칭찬인지 헷갈렸다.
"오히려 감독이 형을 걱정하던데? 구단이 준 집에 같이 산다고 하니까 형이 여자친구 있는지부터 물어보더라."
"그래서?"
"맨날 차인다고 그랬지."
최경호는 계약금의 일부로 새로 구한 차에 도라익을 태우고 집에 갔다. 벌써 젊은 선수 세 명이 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감독이랑 면담하느라 늦는다고 말했잖아."
도라익이 나무라자 선수들이 뒷머리를 긁었다.
"기껏해야 반 시간이나 한 시간 늦으려니 했지."
최경호가 만든 한식으로 저녁을 먹은 도라익과 세 선수는 대화하며 배가 꺼지기를 기다렸다.
"상대가 리듬을 타면 전방에서 파울로 흐름을 끊어야 한다는 말이지? 그런데 상대 리듬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판단해?"
"팔다리는 힘이 넘치는 데 숨이 가쁜 경우가 있어. 그건 경기 리듬이 네가 익숙한 리듬이 아니어서 그럴 가능성이 커. 그리고 이유 없이 짜증이 나는 경우도 있어. 그럴 때도 보통은 상대 리듬으로 경기가 진행돼서 갑갑한 거지."
어느 정도 배가 꺼지자 넷은 마당에서 훈련했다.
페데리치는 키퍼다. 신장이 188로 키퍼로서는 작은 편이다. 대신 반응이 빨라 슈퍼 세이브에 일가견이 있다.
하지만 안정감이 부족하여 여태껏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다.
쇠렌센은 미드필더다. 약점도 장점도 명확하지 않은 선수로 미드필드의 어느 위치에 둬도 기본은 하지만, 그걸로 주전 자리를 따내기엔 프리미어리그가 녹록지 않았다.
타이먼은 원래 센터백을 보다가 15세부터 성장이 멈추는 바람에 풀백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속도가 느린 편이고 공격 가담이 적극적이지 않아 벤치에 앉아본 적도 없다.
훈련은 그리 체계적이지 않았다.
쇠렌센과 타이먼 그리고 도라익이 슈팅으로 페데리치를 돕기도 하고, 쇠렌센과 타이먼이 도라익을 수비하며 경험을 쌓아주기도 했다.
"도우. 너 드리블 진짜 잘하는구나."
쇠렌센과 타이먼의 협력 수비는 도라익한테 번번이 뚫렸다. 느린 타이먼은 속도로, 모든 방면에서 고른 스탯을 보이는 쇠렌선은 몸싸움과 순발력을 이용해 쉽게 제쳤다.
둘의 협력이 서투르기도 하여 한 명씩 상대하는 것과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에 큰 차이가 없었다.
쇠렌센과 타이먼이 일대일 공격과 수비 훈련을 할 때면 페데리치가 도라익의 슈팅 자세를 바로잡는 코치 역할을 했다. 비디오로 공격수의 슈팅 분석을 매일 하는 페데리치이기에 코치 못지않게 전문적이었다.
훈련에 지친 사람은 앉아서 쉬거나 손으로 테니스공을 던져 페데리치의 기본기 훈련을 도왔다. 도라익은 자그마한 테니스공을 손바닥으로 일일이 쳐내는 페데리치를 신기한 눈으로 구경했다.
열 살 전부터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들은 도라익한테 여러 방면에서 큰 도움을 줬다.
3시간 훈련을 끝낸 셋은 함께 스트레칭으로 근육을 풀었다. 이 부분에선 도라익이 상당한 지식을 뽐냈다.
- 작가의말
프리미어리그 현역 감독 신분의 전술 일타강사 한 명에 주전은 아니지만 이쪽 일에 십여 년 종사한 프리미어리그 현역 전문직 훈련 도우미 세 명 얻었습니다. 거기에 원래부터 있던 운전기사 겸 주방장 겸 아침 알람 겸 - 아무튼 에이전트 일 빼고 다 잘하는 - 에이전트인 최경호까지. 참으로 든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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