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건 스피드뿐
뉴캐슬의 두 윙백은 컨디션이 좋았다. 방금도 간단한 페이크로 풀백인 톰 에드워즈를 돌파한 후 훌륭한 크로스를 올렸다.
다행히 196의 신장을 자랑하는 버틀랜드가 공을 정확히 잡은 덕분에 위험을 간신히 넘겼다.
공을 잡은 버틀랜드는 선수들이 자기 위치로 돌아가길 기다리지 않고 길게 앞으로 찼다.
도라익은 버틀랜드와 눈을 마주친 느낌을 받자 바로 준비했고, 버틀랜드가 공을 차기 무섭게 자신을 마킹하는 센터백을 손으로 힘껏 밀었다.
정면이 아닌 측면에서 민 덕분에 아까와 달리 미처 대비하지 못한 3번 센터백이 살짝 휘청였다.
캠벨의 말대로 주심은 파울을 선언하지 않았다.
수비수를 떨군 도라익이 달려서 공을 잡았을 땐 중앙 센터백이 이미 다가와 좋은 수비 위치를 잡은 뒤였다. 게다가 도라익한테 밀린 3번도 빠르게 쫓아오는 중이어서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도라익은 공을 양발로 번갈아 터치하며 기회를 엿봤다. 캠벨은 왼쪽 센터백과의 자리싸움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키는 도라익과 비슷해도 체격은 훨씬 다부진데 나이 때문에 근력이 하락했는지 연신 밀리고 있었다.
그때 속도가 느린 데다가 도라익한테 밀려 출발도 늦은 3번이 도착했다. 도라익은 3번의 도착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 움직였다.
골라인 쪽으로 툭 치고 들어가자 두 센터백도 바로 반응했다. 속도가 빠른 중앙 센터백이 도라익을 따라갔고 3번은 고개를 둘러 살피면서 패스 경로를 막으려 했다.
도라익은 골라인 근처에서 공을 뒤로 팍 꺾었다. 중앙 센터백 역시 예상했다는 듯이 늦지 않게 몸을 멈췄다.
도라익은 오른발로 플리플랩을 펼쳤다. 플리플랩에 속은 수비수가 반대편으로 움직이려고 할 때 공은 다시 골라인 쪽으로 향했다. 급정지 후 바로 반대편으로 중심을 옮기던 센터백은 또 한 번 전환된 방향에 몸이 굳어 미처 발도 내밀지 못했다.
도라익은 수비수와 골라인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공을 굴려 돌파에 성공했다. 패스 경로를 막던 3번이 빠르게 달려왔고, 캠벨과 남은 센터백은 서로 손으로 얼굴을 밀며 야단법석을 피웠다.
'이 정도면 되었다.'
도라익은 상대나 같은 팀이 무시하지 못할 만큼 보여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솔직히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했다. 빠른 가속과 방향 전환 때문에 다리가 굳어 슈팅할 여력이 없었다.
그때. 낯설지는 않으나 그리 익숙하지도 않은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제임스였지?'
선수들 이름을 일일이 외우는 게 어려워서 일부는 번호로 기억했다. 어떤 선수는 성으로 부르라고 하고 어떤 선수는 이름으로 부르라고 해서 헷갈리기도 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기억하기 쉬웠다. 처음 본 사람은 운동선수보다 영화배우로 착각할 찬란한 외모 그리고 007로 익숙한 이름 덕분이었다.
거의 사고도 거치지 않고 왼발이 공을 밀었다. 도라익의 발이 움직이자 반사적으로 다리를 내민 3번은 그만 가랑이를 뚫렸다.
키퍼 역시 슈팅에 대비하여 가까운 포스트를 지킬 궁리만 했던 탓에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굴러가는 공을 그저 지켜봐야만 했다.
캠벨과 몸싸움하는 센터백은 미처 패스를 인지하지 못했고, 그건 캠벨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한 손으로 상대 유니폼을 잡고 다른 손으로 상대 얼굴을 밀면서 의미 없는 몸싸움에 열중했다.
공은 모두를 무사히 지나쳐 반대편으로 흘러갔다.
"으아!"
먼 포스트에 나타나서 공을 밀어 넣은 제임스가 미친놈처럼 소리 지르며 도라익을 안았다. 도라익도 가벼운 몸무게는 아닌데 제임스는 쉽게 들어 올렸다.
- 도라익 선수, 프리미어리그 최연소 도움과 최연소 공격 포인트 기록을 세웠습니다.
- 도라익 선수를 처음 본 게 엊그제 같은데요. 벌써 이렇게 성장했네요.
- 엊그제는 아니지만, 아직 보름도 안 됐죠.
- 소름이네요.
- 한국 축구의 새 대들보가 나타났습니다.
"전술 교정해야겠죠?"
수석 코치의 말에 윌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캠벨을 뒤로 물리고 양쪽 수비를 강화한다."
뉴캐슬의 주요 득점 방식은 양쪽 윙백을 통한 돌파에 이은 크로스 혹은 패스다. 윌슨 감독은 공격과 수비에 모두 재능을 보이는 제임스와 샘 앨런을 양쪽으로 보내 풀백을 도와 수비하게 하고 캠벨을 미드필더 위치로 내렸다.
20년 동안 팀에 있으면서 골키퍼 빼고 모든 위치를 뛴 경험이 있는 캠벨은 어렵지 않게 미드필더 역할을 수행했다.
원래는 공중 제어권이 확실하고 몸싸움도 잘하는 찰리 아담이 맨 앞에 서고 블루스가 수비를 도왔다.
그러나 캠벨의 헤딩과 키핑 능력이 찰리보다 부족하고 도라익의 수비 능력이 블루스보다 크게 부족하기에 변통하여 둘의 위치를 바꿨다.
뉴캐슬은 패스 능력이 가장 나은 중앙 센터백을 미드필더로 올리고 좌우 센터백이 남아 수비했다. 캠벨을 마킹하던 센터백이 도라익과 가까이 접근하고 3번 센터백은 수비라인을 조절하며 반격에 대비했다.
도움을 기록하며 긴장이 풀린 도라익은 머리도 영활하게 돌아갔다.
'돌파는 어렵다.'
한 번만 먹어봐도 똥인지 된장인지 안다. 방금은 비록 돌파에 성공했지만, 그건 상대의 방심을 이용한 거다.
'속도밖에 없다.'
도라익은 4강전과 결승전에서 상대하던 일본과 중국 수비수와 차원이 다른 뉴캐슬 수비수들 상대로 자신이 확실히 자신할 수 있는 게 스피드뿐임을 자각했다.
'차 감독님이 이럴 때 위치를 어떻게 잡으라고 했지?'
윌슨이 얘기해주지 않았기에 차 감독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한 골 먹은 뉴캐슬은 수비 라인을 대폭 올렸다. 그리고 왼쪽 센터백이 도라익을 마킹했다.
'왼쪽에 가자.'
도라익을 마킹하는 센터백은 왼발 선수다. 도라익의 왼쪽이 상대 선수한테는 오른쪽이기에 불편을 느낄 게 분명하다.
도라익이 움직이자 수비수도 함께 왼쪽으로 갔다. 도라익은 앞뒤로 계속 걷거나 느리게 뛰면서 센터백의 반응을 살폈다.
상대를 자기 왼쪽에 두는 게 습관된 센터백이 도라익을 오른쪽에 두고 약간 불편해하는 게 느껴졌다.
뉴캐슬의 한바탕 공격이 그치고 스토크시티에 기회가 왔다. 공격 상황에서 캠벨이 다시 복귀했고 도라익을 마킹하던 센터백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제임스가 공을 잡자 도라익이 앞으로 뛰었다. 이번엔 공이 넘어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부심이 오프사이드 사인을 냈다.
자신이 오프사이드인 걸 아는 도라익은 가만히 있는데 캠벨이 상욕을 섞어서 부심을 질책했다. 그러나 도라익의 걱정과 달리 부심도 주심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긴 뭔가 다른 세상 같다.'
고작 세 경기째여서 함부로 평가할 주제는 못 되지만, 일본이나 중국을 상대할 때와는 다른 뭔가 프로페셔널한 느낌이 확 와닿았다.
다시 심기일전한 뉴캐슬이 또 원정팀을 강하게 압박했다. 도라익은 중앙선을 타고 왼쪽에서 어슬렁대며 기회만 엿봤다.
기회는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뉴캐슬의 윙백이 스로인했다. 공을 받은 미드필더는 습관적으로 공을 윙백한테 돌려줬다. 그때 기회를 노리던 제임스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공을 낚아챘다.
벤치에 앉아있던 윌슨 감독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성공했으니 망정이지, 만약 공을 가로채는 데 실패하면 제임스가 지키는 오른쪽이 바로 뚫리는 위험한 도박이다.
도라익은 뒷걸음치며 기회를 엿봤다. 제임스는 공을 딱 한 번 터치하여 편한 위치에 둔 뒤 강한 힘으로 길게 내찼다.
동시에 도라익이 튀어 나갔다. 센터백이 다가와서 오른팔로 막으며 방해했지만, 자세가 익숙하지 않고 왼팔보다 힘도 약해 도라익을 제지하지 못했다.
그래도 속도를 살짝 죽이는 효과는 있었다. 덕분에 3번 센터백이 도라익보다 한발 앞서 공을 잡았다.
도라익은 팔을 활짝 벌린 채 가슴으로 3번을 힘껏 밀었다. 파울에 대한 걱정을 완전히 접고 전력으로 밀었기에 3번은 크게 휘청였다.
이대로는 공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인지 3번이 공을 키퍼한테 패스했다.
근데 하필이면 도라익의 푸시로 중심이 삐끗한 상황이어서 패스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도라익은 왼손으로 상대를 밀며 앞으로 달렸다. 도라익이 미는 힘이 강하진 않았지만, 중심을 잃은 3번이 도라익을 방해하지 못하게 할 정도는 되었다.
뉴캐슬 키퍼는 전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공격수와 골키퍼의 일대일은 골키퍼의 승리가 훨씬 많다. 게다가 경기 중 도라익이 보인 몇 번의 기본적인 실수가 키퍼의 자신감을 부풀렸다.
'속도뿐이다.'
기본기는 탄탄하지만, 경기 상황에 알맞게 여러 기술을 응용하기엔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 도라익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공을 오른쪽으로 툭 쳤다.
키퍼가 나오기 애매한 위치로 공이 굴러갔다. 도라익의 빠른 속도를 경계한 키퍼는 위치를 조금씩 옮기며 섣불리 출격하지 않았다.
도라익은 또 한 번 오른쪽으로 공을 차고 달렸다. 둘의 거리가 가까워져 이번엔 키퍼도 빠르게 움직였다. 도라익은 전혀 멈출 기세를 안 보이고 또 한 번 치고 달렸다.
키퍼가 도라익의 빠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탓에 슈팅 공간이 나왔다. 도라익이 오른발을 들어 공을 향해 휘둘렀다.
키퍼는 거기에 맞춰 다리와 팔을 최대한 뻗어 수비 범위를 넓혔다.
그러나 도라익의 슈팅은 페이크였다. 오른발로 슈팅하는 대신 공을 건드려 왼쪽으로 옮긴 후, 왼발로 칩슛을 찼다.
키퍼가 오른팔을 최대한 높이 뻗었으나 공을 만지기엔 한참 부족했다.
도라익은 스토크시티 팬들이 모인 곳으로 달려가며 왼쪽 가슴의 구단 엠블럼에 진하게 키스했다.
- 작가의말
오늘 깜빡하고 글 못 올릴 뻔했습니다. 다행히 까마귀 고기를 한 점만 먹어서 너무 늦지 않게 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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