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아이
일본 선수가 오른쪽에서 크로스를 올렸다. 키퍼가 득달같이 달려가 높이 점프하여 공을 가로챘다. 공을 잡은 키퍼가 앞으로 달리자 일본 공격수가 진로를 방해했다.
공격수와 부딪치고 넘어진 키퍼가 벌떡 일어서며 심판한테 격렬하게 항의했다.
심판이 달려와 양 팀 선수를 뜯어냈다. 그리고 일본 공격수를 구두로 경고한 뒤 한국 키퍼를 불러 화해시켰다.
- 지금 일본 선수들의 생각은 단순합니다. 골 하나 넣고 세리머니를 안 하겠다. 이것밖에 없습니다.
드디어 이성을 회복한 강 해설이 차분하게 말했다.
- 그걸 어떻게 이용할까요?
- 이미 이용하고 있습니다. 전반전 일본은 슈팅 7회, 한국은 슈팅 2회입니다. 거의 한국팀 진영에서 경기가 진행되었는데도 슈팅 횟수가 고작 7회죠. 그런데 후반전은 채 30분도 안 되었는데 벌써 일본팀 슈팅이 12회입니다. 한국은 슈팅 5회고요.
- 일본 선수들이 조급하다는 말입니까?
- 그렇습니다. 한 골 더 먹을까 봐 겁나기도 하고, 빨리 자신도 골을 넣고 침묵 세리머니를 하고 싶어서 슈팅을 못 참습니다.
- 일본이 공격에서 팀워크라는 훌륭한 무기를 두고 개인전에 더 치중한다는 말이군요. 대표팀에 희소식이지 않나 싶습니다.
- 좋은 소식이죠. 보시면 수비수들이 키퍼 지휘에 따라 일부러 슈팅 각을 조금씩 열어둡니다. 득점이 어려운 위치에서 슈팅을 유도해서 공격권을 빼앗는 것이죠.
- 그리고 또 하나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카드 개수죠.
- 그렇습니다. 키퍼의 킥을 통한 빠른 반격을 막으려고 공격수 세 명이 옐로카드를 받았습니다.
- 이건 그냥 벌어진 일이 아니죠. 먼저 두 중앙수비수와 오른쪽 풀백이 옐로카드 한 장씩 등에 붙였습니다. 도라익 선수의 속공을 방해하다가 얻은 카드죠. 그래서 일본 공격수들이 무리하여 키퍼의 킥을 방해하는 겁니다.
- 솔직히 레드카드 한 장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 현재 일본은 옐로카드 총 7장, 한국은 3장인데 하나는 차 감독입니다.
- 일본이 먼저 교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우린 일본의 교체를 보며 맞춤 카드를 꺼내면 되겠습니다.
안전하게 공을 돌리던 일본 선수들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공을 잡은 왼쪽 풀백이 화려한 개인기로 한국 윙을 제쳤다.
한국 풀백이 일본 윙을 마크하느라 다가오지 못한 탓에 수비를 제친 일본 선수는 편하게 크로스를 올렸다.
정말 훌륭한 크로스로 공이 일본 공격수 머리에 맞춰 떨어졌다. 그러나 키가 180도 안 되는 공격수는 절호의 기회를 허망하게 날렸다. 정직한 헤딩은 공을 골키퍼 품으로 보냈다.
옆걸음으로 공간을 확보한 골키퍼는 도움닫기도 없이 공을 앞으로 뻥 찼다. 중앙선을 밟고 있던 도라익이 총알 같이 튀어 나갔다.
도라익이 두 번째 헤딩골을 넣을 때 가까운 포스트를 지켰던 오른쪽 풀백이 도라익을 따라 달렸다. 유럽 리그에서도 속도로 인정받는 풀백 중 하나인데 도라익과 비교하니 한참 느렸다.
도라익은 순발력이 뛰어나 짧은 거리일수록 속도의 우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나마 키퍼가 찬 공이 느려서 도라익이 전속력으로 달리지 않았기에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다.
낙구 지점을 정확히 예측하여 도착한 도라익은 바닥에 떨어진 공이 튕기기 전에 오른발로 톡 건드렸다. 도라익의 발끝에 맞은 공이 앞으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동시에 원체 빠른 속도로 달리던 도라익이 한층 가속했다. 이대로면 키퍼와 일대일로 대결할 기회다.
삑.
주심이 호각을 불며 달려왔다. 주심의 왼손이 오른쪽 가슴 호주머니를 들추는 걸 본 일본 수비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걸었다.
주심은 옐로카드와 레드카드를 번갈아 제시했다. 카드 누적에 따른 퇴장이었다.
'아파 뒈지겠네.'
도라익은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가속하는 순간 측면에서 태클이 들어오는 바람에 대비도 못 하고 세게 넘어졌다.
다행히 뒤꿈치나 발목을 차인 건 아니고 상대가 세운 발끝에 걸려 넘어진 거여서 부상은 없었다.
일본은 중앙수비수 한 명을 내리고 윙을 올렸다. 중앙수비수 둘 다 카드 한 장씩 받았기에 도라익을 수비할 수 없다. 도라익의 드리블이 그렇게 위협적인 건 아니기에 팀에서 가장 빠른 윙한테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에 따라 한국도 선수를 교체했다. 이미 체력을 소진한 오른쪽 윙을 내리고 왼쪽 윙을 올렸다. 기존 왼쪽 윙은 수비형 미드필더 위치로 옮겼다.
오른쪽은 수비만 하고, 왼쪽을 강하게 두드리겠다는 신호다.
"라익아. 왼쪽 공격은 혁신이한테 맡기고 넌 중앙수비수를 괴롭혀."
팀의 프리킥 공격 상황에 차 감독은 도라익을 따로 불러 전술을 지시했다.
"어떻게요?"
"여기부터 저기까지 마구 뛰어다녀. 뭔가 작전이 있는 것처럼 진지하게."
감독의 지시를 받은 라익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갓 교체된 선수처럼 부지런히 뛰었다. 후반전 내내 감독 지시대로 규칙 있게 움직이던 도라익이 갑자기 활동 범위를 넓히자 일본 중앙수비수도 덩달아 분주해졌다.
후반 60분에 교체로 올라온 선수인데 쉬지 않고 뛰는 도라익을 마크하며 숨이 조금씩 가빠지기 시작했다.
"라익아."
감독이 스위칭 지시를 내렸다. 도라익은 윙 출신의 풀백을 괴롭히던 혁신과 자리를 바꿨다. 때마침 키퍼가 던진 공을 받은 수미가 지체하지 않고 혁신한테 패스했다.
혁신은 스피드와 화려한 발재간으로 중앙수비수를 농락했다. 도라익의 단순한 패턴에 적응했던 중앙수비수는 화려한 드리블을 하는 혁신 상대로 반응이 반 박자씩 느렸다.
잦은 방향 전환으로 중앙수비수의 중심을 무너뜨린 혁신은 공을 오른쪽으로 툭 친 다음 과감하게 원거리 슈팅을 가져갔다. 드리블로 골대와 더 접근하기엔 혁신도 지쳤다.
잘 찬 공이 빠른 속도로 골문을 노렸다. 일본 키퍼는 안간힘을 다해 점프하여 손가락 끝으로 공을 건드렸다. 손가락에 맞아 굴절된 공은 살짝 떠서 크로스바를 강하게 때렸다.
"뛰어."
감독의 외침을 들은 일본 선수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뛰었다. 수비수가 아닌 공격수 출신이어서 수비 상황 판단이 조금 느렸다.
그러나 도라익은 이미 멀어진 후였다.
크로스바를 맞추고 돌아오는 공을 안정적으로 잡은 도라익은 왼발로 가볍게 골대로 밀어 넣었다. 벌떡 일어난 키퍼가 각도를 좁히러 달려 나왔지만, 열차는 떠나고 임도 없었다.
'왠지 좋아하면 안 되는 분위기야.'
골을 넣은 도라익은 담담한 얼굴로 걸었다. 간접 도움을 준 이혁신이 다가와 도라익과 어깨동무를 한 채 휘파람을 불었다.
한국팀 선수들이 한가로운 걸음으로 와서 혁신과 도라익의 머리를 한 번씩 만지고 자기 위치로 돌아갔다.
관중과 벤치도 느릿한 박수로 차분하게 축하했다.
- 오늘 반드시 이깁니다.
강 해설 역시 차분하게 말했다.
동점이 되자 일본팀은 오른쪽 윙을 빼고 풀백을 넣은 동시에 오른쪽 풀백을 윙 자리로 올렸다. 그리고 수미 한 명을 중앙수비수 위치로 끌어내렸다.
그에 맞춰 차 감독은 수미 자리로 갔던 윙을 빼고 중앙 미드필더 한 명 넣었다. 중원 싸움에서 우위를 확실히 하려는 의도였다.
3:3의 점수에 드디어 정신을 차린 일본이 전반전의 패스워크를 회복했다. 도라익의 속공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수비 라인을 올린 덕분에 패스를 통한 압박이 살아났다.
도라익을 놓쳐 세 번째 실점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윙 자리로 간 일본 선수는 이를 악물고 공격에 임했다. 화려한 발재간으로 수미와 풀백을 연신 제친 윙은 키퍼가 나오기 애매한 위치로 공을 띄웠다.
그러나 미리 짐작하고 있던 한국 키퍼는 반 박자 빠르게 뛰쳐나왔다.
쿵 소리와 함께 일본 공격수와 키퍼가 함께 쓰러졌다. 그러나 선수들이 몰리기도 전에 키퍼가 벌떡 일어나 앞으로 달렸다. 세 걸음 달린 키퍼는 공을 강하게 앞으로 걷어찼다.
도라익은 키퍼가 일어날 때부터 몰래 준비했다. 공이 출발하자 낙구 지점을 예측한 후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중앙수비수가 허겁지겁 도라익을 쫓았다.
도라익이 낙구 지점에 이르렀을 때 공은 도착하지 않았다. 도라익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뒤늦게 온 중앙수비수와 자리싸움을 벌였다.
잔디에 튕겨 오르는 공이 도라익의 무릎을 스쳤다. 의도한 건 아니고 공이 불규칙하게 튀면서 도라익의 다리에 맞은 것이다. 도라익의 무릎에 스친 공은 느릿느릿 굴렀다. 도라익은 어깨로 중앙수비수를 밀친 후 공을 향해 달렸다.
'아씨.'
체력이 꽤 소모된 데다가 격렬한 몸싸움을 갓 벌인 상황이어서 힘 조절에 실패했다. 도라익이 찬 공은 생각보다 멀리 굴러갔다. 일본 키퍼가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달려 나왔다.
이를 악물고 달린 도라익이 한발 먼저 도착해 공을 옆으로 툭 쳤다. 그리고 이미 힘이 다해 몸이 굳은 도라익을 공을 덮치던 키퍼가 넘어뜨렸다.
주심이 딱딱한 얼굴로 달려와 키퍼를 옐로카드 누적으로 쫓아낸 후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한국팀 벤치가 크게 환호하며 일어났다.
- 이겼습니다. 이젠 이긴 겁니다.
일본은 세 번의 교체 기회를 전부 소모했다. 이젠 필드 선수 중 하나가 골키퍼 역할을 소화해야 한다.
첫 임무가 무려 페널티킥 방어다.
- 오늘의 영웅은 도라익 선숩니다.
중계 화면이 바닥에 누운 도라익의 얼굴을 비췄다. 흙투성이가 되어 헐떡이는 도라익의 얼굴엔 순수하고 해맑은 웃음이 가득했다.
마치, 생일날 게임기를 선물 받은 유부남의 미소와 같다고 할까.
- 작가의말
이 글은 판타지 요소가 전혀 없는 판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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