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금질
토미가 찌른 공을 따라잡은 도라익은 첫 터치로 바로 슛을 때렸다. 앞으로 달려오던 키퍼는 머리 위로 높이 떠서 골대로 날아가는 공을 멍하니 바라봐야 했다.
도라익이 최고 속도로 달리는 중이어서 칩슛을 고민하지 않은 키퍼의 잘못이 아니다. 키퍼는 그저 상식 범위에서 고민하고 판단하고 결정했을 뿐이다.
- 푸스카스 3번째 후보 골입니다.
- 강 해설의 개인 의견이며 제작진과 방송사와 전혀 협의가 이뤄지지 않았음을 정중히 알려드립니다.
맨유에 제임스의 패스를 받아 넣은 골은 의외성이 돋보인다. 똑같은 상황을 백 번 만들어도 같은 골이 나오지 않는다.
원정에서 로잔 상대로 넣은 세 번째 골은 어렵기도 하고 과정에서 도라익의 대처가 완벽에 가깝다. 퍼포먼스도 뛰어나서 일반인이 보기에도 전문가가 보기에도 대단한 골이다.
방금 골은 육체와 기술의 완벽한 결합이다. 최고 속도로 달리면서 이렇게 안정적인 칩슛을 구사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 이제 전반전 30분입니다. 입이 근질근질하네요.
- 그 입 다물라.
- 내가 한 살 형인데 왜 반말입니까?
- 채팅창 글을 읽은 건데요.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했다. 관객들은 소변 마려운 사람과 같은 얼굴이고 스토크시티 벤치도 궁둥이를 곱게 붙인 사람이 드물었다.
심지어 로잔 선수들도 경기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모습이었다.
- 맥자넷 크로스!
- 찰리 아담 헤딩!
- 페널티킥입니다.
헤딩 슛으로 득점 가능한 공도 찰리는 굳이 반대편 포스트에 있는 도라익한테 토스하려 했다.
예상치 못한 대처에 수비수는 점프하며 펼친 팔을 제때 거두지 못했고 핸드볼 파울을 범했다.
- 찰리 선수가 공을 잡아 도라익 선수한테 건넵니다.
- 도라익 선수 공에 키스합니다.
- 아시안컵 대 일본전, 프리미어리그 대 뉴캐슬전, 유로파리그 조별 경기 4경기. 올해 도라익 선수가 기록한 해트트릭은 총 6경기입니다.
- 휘슬 울렸습니다.
- 도라익 선수 뜁니다.
- 슛!
- 골입니다. 도라익 선수 해트트릭 달성했습니다. 세계 신기록입니다.
도라익은 오른발로 페널티킥을 찼다. 왼발을 염두에 뒀던 키퍼는 혼란에 빠져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하고 무작정 몸을 날렸다.
전반 41분. 도라익은 유로파리그 5경기 연속 해트트릭의 대기록을 달성했다. 윌슨 감독은 파격적으로 전반 44분에 도라익을 교체했다.
###
12월 9일 스토크시티가 블랙번과 펼친 원정 경기에서 도라익은 전반전에 1도움을 기록한 후 하프 타임에 우디르로 교체되었다.
"담금질 과정이라고 생각해. 넌 더 단단해지는 중이야."
도라익은 경기와 훈련 중에 쉽게 피로를 느꼈다. 도라익은 견딜 만하다고 우기지만, 감독이나 구단 입장에선 사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도라익을 경기장에 오래 둘 순 없었다.
로잔과 벌인 경기도 해트트릭 기록 때문에 선발로 내보냈지만, 목적을 달성하고 바로 교체했다.
혹시 심리 문제가 아닌지 걱정되어 심리학 박사를 고용하여 상담도 했다. 박사의 판단으론 도라익의 마음이 아주 건강하지만, 심리 문제는 정답이 없기에 당분간 상담을 유지하기로 했다.
"예전엔 눈 뜨고부터 감기까지 축구 생각만 했는데 갑자기 안 그러니까 답답해."
도라익의 뇌엔 주변보다 온도가 확연하게 높은 점이 있다. 뇌에 작용하는 약물을 복용했을 때 온도가 올라가는 부위로, 의사는 축구에 관한 생각이 지나쳐 해당 부위가 스트레스받는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팀의 핵심 공격수에 주장이기도 한 도라익이 축구와 거리를 두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자극을 최소화하여 빨리 회복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말인데. 너 그냥 여행 다녀오는 건 어때? 축구를 완전히 잊고."
최경호의 말에 도라익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장 13일하고 16일에 경기 있는데?"
"감독이랑 구단주랑 상의했는데, 네게 19일까지 휴가를 주기로 했어."
오늘이 10일이니 열흘 휴가인 셈이다.
"그래도 돼?"
"13일 리그컵은 이기면 좋고 져도 안 아까운 경기야. 유로파리그 토너먼트에 집중하려면 리그컵도 FA컵도 버리는 게 현명한 판단이야. 윌슨은 진즉에 지고 싶었지만 여론에 떠밀려 지금까지 안고 온 거지."
"알았어."
"우리 라익이 장하구나."
16일 원정에서 스파르타와 유로파리그 경기를 벌인다. 6경기 연속 해트트릭이 욕심날 만도 한데 도라익은 시원하게 포기했다.
빨리 정상 컨디션을 회복하여 팀에 도움이 되려는 생각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럼 형이랑 둘이 가는 거야?"
"아니. 난 비지니스로 바쁘고 너랑 놀아줄 사람은 따로 구했어."
최경호가 음흉하게 웃으며 티켓과 명함을 건넸다. 발렌시아를 경유해 이비사섬으로 가는 비행기 편과 이비사섬에 있는 관광호텔의 주소와 전화가 적힌 명함이었다.
###
"안녕하세요. 아버지 아들 라익입니다."
이비사섬에서 도라익을 기다리는 사람은 아버지 도민준과 같은 팀 새내기 선수 7명이었다.
"안녕하세요. TV에서 볼 때보다 훨씬 잘생겼네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해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막내가 도라익한테 존댓말을 썼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상대는 국가대표에 세계 최고 리그의 주전이고 심지어 팀의 주장이다.
"다들 말 편하게 해. 그리고 우리 놀러 온 거 아니다."
도민준은 야구선수다. 야구는 12월에 단체훈련 금지여서 훈련할 곳이 마땅치 않다. 구단이 훈련 장소와 여건을 제공할 수 없기에 개인적으로 찾아야 하는데 대부분 선수에겐 한없이 어려운 일이다.
때마침 최경호가 연락해 도라익의 상황을 전했고, 도민준은 가능성이 보이는 2군 선수 7명을 뽑아 이비사섬으로 날아왔다.
"나랑 정호랑 라익이 배팅 볼을 던질 거야. 공을 치는 것보다 타격 자세를 지키고 배팅 리듬을 몸에 익히는 데 집중해."
도민준은 반나절이라도 휴양을 즐기고 싶은 후배들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았다. 도라익보다 먼저 도착해 훈련 장소를 미리 물색했고 훈련 장비도 전부 마련했다.
그리고 도라익이 짐 가방을 내려놓기 무섭게 훈련을 시작하려 했다.
"아버지. 나 운동하면 안 돼요."
"이건 야구잖아. 그리고 프로가 쉰다고 몸을 그냥 놀려?"
셋이 공을 던지고 셋이 치고 셋은 줍고. 그러다 지치면 해변의 모래사장을 뛰었다.
배팅 훈련이 질리면 가끔 적당히 깊은 바다에서 수구를 즐기기도 했다.
수구는 가슴 깊이의 물에서 배구공 비슷한 질감의 공을 손으로 패스하고 슈팅하는 종목이다. 파도가 이는 바닷가에서 하려니 균형 잡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밤에 몰래 맥주 마시러 나가다가 도민준한테 들킨 세 선수 탓에 수비 훈련도 했다. 배트로 공을 쳐서 보내면 단번에 받아야 하는 훈련으로, 야구 선수들이 가장 질색하는 훈련 1순위다.
엄한 놈 곁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고, 도라익 역시 팔자에도 없는 외야수 훈련을 했다. 투수인 정호만 손가락 부상을 염려해 수비 훈련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 져버렸네."
13일 홈에서 에버턴을 맞이한 스토크시티는 1:2로 패했다. 가장 큰 방에 오손도손 모여 경기를 관람한 선수들이 안타까움을 이기지 못했다.
"라익아. 너네 팀이 우세인 거 같은데 왜 졌지?"
"축구는 야구보다 승패를 짐작하는 게 더 어려워요. 실력대로 승패가 난다면 우리가 아스널이랑 맨유를 못 이겼죠."
"와. 나 어디 가서 너랑 친하다고 말해도 돼? 아스널이랑 맨유 이긴 선수랑 아는 사이라니 꿈 같네."
"그리고 너 5경기 해트트릭했다며. 그거 야구로 치면 얼마나 어려운 거야?"
"타자로 치면 5경기 연속 끝내기 홈런?"
"와. 지리네. 상상만 해도 막 좋다야."
'즐겁다.'
도라익은 축구를 좋아한다. 그러나 축구가 늘 즐겁지는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친해진 사람들과 관람하는 축구 경기는 무척 즐거웠다.
축알못 야구 선수들과 대화하며 직업으로서의 축구 때문에 느끼던 부담감이 한층 가벼워졌다.
"다들 당장 취침한다. 축구 경기를 보느라고 30분 늦었지만, 기상 시간은 똑같다. 지각한 사람은 내일 짐 드는 일을 도맡아야 할 거야."
도라익과 일곱 야구 새싹은 3일 내내 정신없이 훈련했다. 그리고 스토크시티의 유로파 원정 경기를 맞이했다.
야구밖에 모르던 일곱 청년은 고된 훈련을 쉬게 해주는 축구에 감사하며 열심히 스토크시티를 응원했다.
그러나 찰리까지 출전하지 않은 스토크시티는 스파르타와 1:1 무승부를 냈다. 다행인 점은 코너킥 상황에 레체르트가 헤딩 슛에 성공하여 세트피스 득점이 극단적으로 적은 스토크시티에 작은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예정된 작별의 시간이 늦지도 않고 다가왔다.
"라익아. 스트레스받지 말고 즐겁게 해."
"사인 고마워. 내 동생이 니 찐 팬이거든."
"한국 오면 내가 소고기 살게."
고작 9일 사이에 뭔 정이 그리도 깊이 들었는지. 도라익은 찡해오는 코끝 때문에 웃을 수 없었다.
"여름에 한국 가면 꼭 찾아뵐게요. 부상 조심하고 새 시즌 다 1군 올라가세요."
"엄마한테 전화 자주 드려라."
도민준의 무뚝뚝한 작별 인사를 끝으로 도라익은 탑승 절차를 밟았다.
이젠 다시 축구하러 갈 시간이다. 짧은 담금질을 끝내 훨씬 단단해진 도라익은 어서 경기를 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 작가의말
혹시 최경호의 음흉한 웃음 때문에 오해한 분이 계신다면 사과드립니다. 섬에서 엘과 만났는데 나오는 배가 끊기는 스토리. 진짜 너무 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절대 제가 해당 경험이 없어서 글이 안 써져서 방향을 튼 게 아닙니다.
Comment ' 11